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52. 여산의 동남쪽 외로운 곳에 있는 여산향교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5:37

여산면 여산리 101-1번지에 여산향교가 있는데, 그중 대성전 1곽에 대하여 1984년 4월 1일 문화재자료 제83호로 지정하였다. 이는 향교관리재단의 소유이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그리고 서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기능이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여산향교는 처음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종 3년 1403년 여량현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향교가 불타 없어지자 지방 유림들이 장소를 바꿔 다시 지었다. 그 뒤에도 새로 지어진 대성전은 1970년, 1982년, 1993년, 1994년에 보수한 기록이 있다. 본 향교는 익산향교와 같이 중국 5성(五聖)과 공문(孔門) 10철(十哲), 그리고 송대(宋代)의 6현(六賢), 우리나라의 18현(十八賢)을 배향하고 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무(東?), 서무(西?),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 사마재(司馬齋), 양사재(養士齋), 전사재(典祀齋), 제기고(祭器庫), 복청(僕廳), 내·외삼문, 홍살문, 일주문 등이 있었다. 현재의 대성전의 정면은 3칸 반에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서,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고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동재 2칸, 서재 3칸, 제기고 2칸 등이 남아 있다. 안마당에서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하나로 되어있다. 보통의 향교가 3칸 집이며 각각의 칸에 하나씩의 계단을 가진 것에 비교하면 좀 특이하다 하겠다. 제사를 봄에는 음력 2월 상정일(上丁日)에, 가을에는 8월 상정일에 지냈는데, 현재는 음력 8월 27일에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있다. 당시 여산향교는 교장 1명, 장의 1명, 제임 2명, 교생 50명, 노비 5명의 아주 큰 규모였다고 한다. 나머지 일반적인 면에서는 다른 향교와 다를 바가 없다. 굳이 여산향교의 특징을 들자면 면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다른 곳의 향교는 면사무소에 인접해 있거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이곳은 2km의 거리를 두고 아주 멀리 떨어져있어 일부러 찾아가야 할 정도다. 그러기에 여산향교는 여느 향교보다 더 조용한 곳이며 적막한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여산은 원래 서울로 가는 국고 1번이 통과하는 주요 경로였지만, 지금은 조용한 시골에 지나지 않는다. 산이 높지 않다고는 하여도 돌아보면 모두가 보이는 게 산이며, 몇 명되지 않는 인구임에도 그나마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내가 여산 답사를 하는 동안 다섯 번째 방문길에서 여산향교를 찾아보았다. 밖에서 보던 것처럼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마침 관리인이 마당에 있어 쉽게 방문할 수 있었다. 작은 비닐 모종포트에는 때늦은 오이며 가지가 자라고 있었다. 관리인은 한꺼번에 심으면 오랫동안 먹을 수 없으니 조금 늦게 심는 것도 있어야 한다면서 새싹에 물을 주는 중이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한꺼번에 먹는다고 평생 먹을 것을 다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니, 조금씩 나눠 먹는 것이 현명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같이 물도 주고 풀도 뽑아주고 싶었지만 막상 도와주려하면 방해가 되기도 하고, 이것저것 가르치다보면 오히려 혼자 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에 방해만 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향교안을 둘러보자고 말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눈치를 보면서 살며시 물어보니,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매우 귀찮다고 하였다. 분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대로 비워둘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뜨내기인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가며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내 말에 기분이 상하여 방문을 거절하지 않을까 근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눈을 들어 대성전쪽을 바라보니 요청하지 않은 내삼문이 고맙게도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성큼성큼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또 다시 눈치를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뜸을 들였지만, 관리인의 대답은 의외로 명료하였다. 찾아오는 손님에게서 들을 때마다 매번 응대를 해주는 것보다 이렇게 문을 아예 열어놓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도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응대해주어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열어놓는 것이 일손이라도 더는 면에서 옳을 듯하였다. 기왕에 향교를 관리하기로 하였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매달려 일손을 놓을 수도 없으니 그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향교에서는 연로하신 분이 관리를 하면서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리는 경우도 보았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모두가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하고 있기에 거절할 수도 없는 부작용이라 할 것이다.

전국에 있는 향교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경북 영천향교대성전과 성주향교대성전, 전남 나주향교대성전, 그리고 전북 장수향교대성전이 유명하다. 또 사적으로 지정된 전주향교일원과 김제관아와 향교, 나주목관아와 향교 등이 있고, 그밖에도 시도기념물이나 기타 문화재로 지정된 향교가 230 여개나 된다. 대체적으로 인구가 많이 모인 지방의 유력마을에는 향교가 있었다는 증거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로 일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향학열이 바로 지금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볼 것이다.

이들은 향교가 문화재로 지정되었거나 혹은 향교의 대성전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다. 여기서 배운 학동들이 자라서 나라의 기둥이 되었고 요소요소에 적용된 충신들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가하면 이들은 자기 고유의 학풍을 만들기도 하면서, 유명한 학자의 학풍에 따라 주요 학파를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파들은 학문의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는데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하였으나 때로는 신학문의 개척에도 앞장서는 등 실사구시의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옛 학파를 살펴보면 정몽주와 길재의 사림파에서 시작하여, 조광조에 이르자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조식과 이황이 주축을 이룬 영남학파에 이순신, 유성룡, 이산해 등이 있고, 서인의 중심인 이이와 성흔을 필두로 한 기호학파에서는 윤두수와 정철을 포함한다. 임진란 후 동인이 득세하여 서인을 징벌하자는 문제로 온건파인 유성룡계의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뉜다. 훗날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고, 서인반정이 나자 이번에는 서인이 득세하게 된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개혁을 주장하는 윤증과 남구만, 박세체 등의 소론과 명분을 앞세우는 송시열중심의 노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후에 노론이 벽파로 이어졌고, 남인은 시파로 맥을 이어갔다. 따라서 벽파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시파는 시류에 따라 현실적인 접근을 지향하는 부류였다.

이렇듯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학풍이나 특정 연고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이 지켜야할 도리가 있고 넘어서는 안 될 정도(正道)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개인보다 가문(家門)을 위하는 일이고, 가문보다는 사회(社會)를 위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협된 지역보다는 대승적인 국가관(國家觀)을 가지고 온 백성을 위하는 판단을 하여야 함은 불변의 진리다.

어느 때에 어느 지도자가 옳은 판단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이 지난 후에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는 편협된 사고로 왜곡된 사기(史記)를 만들 수도 있지만, 온 국민이 바라보는 한 언젠가는 국민의 입장에서 후세(後世)들이 판단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2010.10.27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