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50. 등산에 부담없는 용화산의 용화산성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5:50

금마면 신용리 산22-1번지에 있는 용화산성은 2002년 12월 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용화산으로 가는 주된 등산로는 금마서동공원에서 시작하며, 익산시민의 등산 겸 산책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산이다. 이 산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던 데서 유래하여 군입산(軍入山)이라고 불리고 있다.

용화산은 옥녀봉, 노승봉, 선인봉, 성태봉을 가지고 있으나, 선인봉과 성태봉의 봉우리에서만 성곽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래서 성태봉산성(城胎峰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성곽이 언제 만들어지고 언제 폐기되었는지 기록은 전혀 없으며, 유물에 의해서도 그 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고려사에 나오는 후백제군 정벌기에 탄령을 넘어 마성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마성(馬城)이 용화산의 석성인 성태봉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성태봉은 342m로 용화산의 주봉이며, 주봉을 감싸는 성곽과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성곽의 2개소가 존재한다.

주성은 봉우리의 8부 능선에 걸쳐있는 둘레 435m의 석성이다. 이 주성의 서쪽 성벽은 경사가 급한 지역에 축조한 관계로 대부분 붕괴되고 2,3단 정도만 남아있는데, 일부에서는 높이가 2m 정도인 10여단이 남아있기도 한다. 이 성벽은 경사면을 따라 사각형 할석을 조금씩 안쪽으로 들여쌓음으로써 안정감을 주고 있는 산탁(山托) 형식이다.

주성의 남쪽으로는 부성이 있는데, 이는 남쪽의 봉우리로 가려진 곳을 조망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성과는 좁은 능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주성과 부성의 내부는 평탄면을 이루고 있어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모두 문지조차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를 증명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용화산은 금마면 신용리와 여산면 원수리를 경계로 하는 산이다. 이 산의 남쪽 일부에 왕궁면 용화리가 약간 걸쳐있고, 앞을 보면 용화저수지가 놓여있다. 용화산의대부분을 차지하는 금마와 여산은 모두 산악이지만 왕궁쪽으로는 저수지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이 저수지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주 오래전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현재의 미륵산과 용화산을 합쳐 용화산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미륵사가 있는 봉우리는 미륵산으로, 나머지 봉우리는 용화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용화산에서 미륵산을 바라보면 형님 동생하는 사이로 다가온다. 어느 봉우리가 높고 어느 봉우리가 낮은지 분별조차 어렵다.

용화산에서 바라보면 미륵산성이 선명히 보인다. 나무 밑에서는 숲을 자세히 볼 수 없다더니 미륵산에서 미륵산성을 볼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행운이라 할 것이다. 계곡 하나를 중앙에 놓고 양쪽 능선을 따라 석성을 쌓은 미륵산성은 마치 늘어진 목걸이와 같다. 무거운 돌로 커다란 사각구슬을 만들어 쌓아놓은 천연석 화강암목걸이다.

또 용화산의 서쪽면은 군부대의 사격장이다. 따라서 용화산의 제1봉을 지나 2봉에 들어서면 사격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격중에는 산의 경사면 반대쪽으로 다니라는 안내 팻말도 있다.

여산쪽에 이르는 용화산의 동쪽 원수지를 향하는 경사면에는 방송사극 ‘서동요’를 촬영하였던 드라마세트장도 있다. 이 세트장도 산의 정상부에는 이르지 않으며, 중간부분부터 산의 위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가면 용화산성 대신 많은 담을 볼 수 있다. 공주가 거처하던 곳, 무사들이 거처하던 곳, 민초들이 모여 저잣거리를 형성하던 곳 등에 담이 둘려있기 때문이다.

용화산은 높지 않으나 숲이 우거져서 시원하며, 길이도 길지 않아 쉽게 피로하지도 않는 곳이다. 그러나 제1봉에서 제3봉을 거쳐 아리랑고개까지 가려면 제법 시간도 걸린다. 일반적인 코스로는 가파르지 않아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단위의 등산도 줄을 잇고 있다. 나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올랐던 곳이지만, 정작 용화산성은 나에게 있어 생각 밖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에서는 용화산성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산에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다.

순수하게 용화산성을 찾아보기로 마음먹고 나선 것만 해도 벌써 두 번째다. 시간으로나 체력으로나 온 산을 뒤집고 돌아다닐 수도 없으니, 이정표도 없는 성을 찾기란 숲속의 보물찾기나 마찬가지였다. 낮은 산이니 길이 없으면 그냥 길을 만들어가면서 올라볼 수 도 있겠구나 하였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길도 없이 빽빽한 나무들은 사전준비도 없이 찾아오는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헤매고 다니다가는 내려가는 길을 찾지 못하여 낭패를 당할까봐 걱정도 앞섰다.

무작정 오르는 산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한다. 혼자 내려가는 길에 혹시나 다른 계곡을 만나게 되면 산을 돌아야하니 처음 장소를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오늘은 기어이 만나보고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성곽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가까운 골짜기부터 산을 올랐으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어쩔 수없이 내려가야만 했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지나는 농로는 못자리에 물을 대는 호스가 널려있어 마치 지뢰밭의 인계철선을 연상케 하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농부가 튀어나와 물이 안 나온다고 성화다. 조심한다고 하였지만 나도 모르게 그만 이리저리 연결된 생명줄을 건드리고 말았나보다.
순간 30년 전의 지뢰매설작전이 떠올랐다. 모두가 긴장하여 조심한다고 하였었지만, 그때 우리는 비무장지대 작전을 중단해야 할 만큼 커다란 사고를 당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가 얼굴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을 잃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정신차리라고 말할 때까지는 그랬었다.

일 년 농사를 망칠일이 있느냐고, 우리도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니냐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농부에게 혼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산속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그저 반갑기만 하였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을 붙였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가로 질로 호스를 늘어놓은 잘잘못은 따질 겨를도 없었다. 문화재를 찾아 한 번 나서기가 어려운데, 이런 일로 쉽게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입구로 내려온 나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다른 샛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는 여태껏 보이지 않던 길이 산속 농장사이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은 산의 정상부에 이르는 산행길이었다. 그러나 우거진 녹음방초는 많은 돌멩이들을 숨겨놓고 여기가 밭둑인지 물이 흐르던 고랑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눈에 보아 반듯하면 석축이고 헝클어져 어긋나있으면 수로인 것을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고 석축은 보란 듯이 온 산에 묶어놓은 것도 아니다. 그냥 군데군데 허물어져 흔적도 없는 곳이 더 많은 석축이다.

제3봉인 선인봉의 동쪽 경사면 8부능선에는 사방 약 5m의 넓이에 높이 1m, 돌 폭 40cm 정도의 디귿자 형태 돌무더기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돌은 성벽을 이루었던 돌이 아니라 중간에 누군가가 다른 목적으로 쌓았던 것이다.

 

2010.10.13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