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쌍릉은 석왕동 산55번지와 56번지에 있는 커다란 무덤 2기를 말한다. 이는 국가소유의 백제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으로 1963년1월21일 국가사적 제87호로 지정되었다.
석왕동에 2개의 커다란 봉토분이 15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눈에 들어 보이는 곳도 아니며, 크게 부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쌍릉(雙陵)이라고 부른다. 일반 묘가 아닌 커다란 봉분의 묘가 두 개라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다. 내부구조는 백제말기의 굴식돌방무덤이라 불리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의 형태를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봉분이나 석실의 크기로 보아 상대적으로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 남쪽의 작은 것은 소왕묘라고 부른다.
고분의 원형봉토와 그 하부에 일명 둘레석이라고도 하는 호석열을 두른 구조는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왕릉급과 같은 양상이며, 그 중에서도 크기로 따지면 대형급에 속하는 동상총(東上塚)이나 중하총(中下塚)보다도 더 크다. 두 무덤의 크기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원래는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분으로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었는데, 근래에 석상(石床), 장명등(長明燈), 석수(石獸) 등을 봉토 앞쪽에 설치하였다. 이 고분은 일찍이 1916년에 일본인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내부가 조사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대왕묘는 봉토의 지름이 30m, 높이 5m, 소왕묘의 지름이 24m, 높이 3.5m의 원분(圓墳)이다.
두 무덤의 내부는 판석조(板石造)의 굴식돌방무덤인데, 조사가 끝난 대왕묘(大王墓)는 길이 3.8m, 너비 1.78m, 높이 2.27m이며, 소왕묘(小王墓)는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1.7m로 나타났다. 이런 장방형 현실은 부여 능산리고분의 형식과 거의 같다.
널길(羨道)은 남벽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으며, 대왕묘의 경우 널길의 규모는 너비 1m, 높이 1.5m, 길이는 1m 정도이다. 널문(羨門)과 널길의 입구는 판석을 세워 막고 있다. 네 벽면과 바닥, 그리고 천정은 모두 다듬은 판석(板石)으로 축조하고 있는데, 특히 양 측벽과 천정 사이에는 장대석을 안으로 기울어지게 끼워 단면 6각형의 괴임식 구조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의 중앙에는 바닥면보다 한 단 높은 널받침(棺臺)이 마련되어 있으며, 이 널받침은 한 장의 판석으로 되었는데 길이 2.71m, 너비 0.85m이다. 조사당시 고분은 이미 도굴된 후였으나,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부식된 목관을 수습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복원결과 목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이며, 뚜껑의 상부 단면이 둥근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목관에는 관못과 관고리가 달려 있었으며, 관고리에는 8엽 연화문(蓮花紋)의 좌금구(座金具)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복원된 목관의 크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길이 2.4m, 너비 0.76m, 높이 0.7m 정도의 크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쌍릉은 내부구조나 호화로운 목관구조 등이 부여의 무덤들과 비슷한 연대의 축조로 보여, 백제말기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비(善化妃)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설이 많다. 대왕릉에서는 부패된 목관파편과 토기완 1점이 수습되었는데, 이 유물이 능의 연대를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41세 왕인 기준왕릉과 그의 왕비릉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을 증명할 만한 다른 물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준왕(箕準王)을 줄여서 준왕이라고도 하며 이는 애왕(哀王)을 달리 부르는 이름인데, 조선이 위만에게 밀려 패망하자 익산금마에 와서 마한을 세우고 시조(始祖)인 무강왕(武康王)이 된다. 김부식의 고려사에서는 후조선 ‘무강왕’의 묘 즉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과 그의 ‘왕비릉’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나타난 두 가지의 역사서에 의하면 마한 왕의 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일설에 ‘말통대왕’이라는 말은 백제 무왕의 어릴적 이름이었던 ‘서동’이 변하여 그렇게 불린다는 것도 같이 적어놓아 어느 쪽이 확실한지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무강왕의 묘인지 무왕의 묘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나, 일설에는 이라는 단서를 달은 것으로 보아 일단은 마한 무강왕의 묘로 보았다는 것이 더 근접하는 해석일 것이다.
이 묘를 백제 무왕의 묘로 본다면, 백제 의자왕의 입장에 서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부친인 무왕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었으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갔고, 무왕은 부여에 머물면서 즉위 35년 634년에 ‘궁남지’를 만드는 등 흐트러진 정치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을 지켜본 의자왕은 훗날 선왕(先王)의 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익산에 장사지낸 것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혹 다른 추측으로는 무왕이 여러 중신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익산으로 천도를 하였으나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의자왕은 선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사비성으로 재천도를 하면서 선왕을 익산에 남겨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 24권에 의하면 황극원년 642년에 의자왕의 모후가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이는 의자왕 2년에 해당하며, 부왕인 무왕이 죽은 다음해이다. 그러나 이무렵 의자왕이 어디에서 통치를 하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의자왕이 무왕 말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가정하면 의자왕은 사비에 있었고 선왕과 선왕비는 익산에 남아있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을 사이에 두고 죽은 부모의 묘를 그토록 애정을 느끼던 익산에 만들었다면 이해가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근에 미륵사지(彌勒寺地)나 제석사지 그리고 왕궁성지가 있어 이런 내용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모두 확인되지 않은 나의 생각일 뿐이다.
한편 인근에 있는 미륵사지석탑의 해체작업도중 2009년 1월 14일 발견된 사리장엄기에는 모후인 백제의 좌평 사택덕적의 따님이 사재를 들여 미륵사를 건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왕릉을 백제 무왕의 묘로 볼 때 소왕묘의 주인이 사택덕적의 따님일 수도 있다.
그러나 642년에 죽었다는 의자왕의 모후가 선화비인지 사택덕적의 따님인지도 알 수 가 없다. 또 하나의 가설로 미륵사 창건 당시인 639년은 선화비가 세력을 잃어 물러난 뒤에 사택덕적이 새로 부상하는 왕후로 공존했을 수도 있다. 사택덕적비는 자신이 죽으면 무왕의 옆에 묻히려고 일부러 공간을 남겨두고 선화비를 멀리 떨어뜨려 묻었을 것도 생각해볼만하다. 그러나 무왕이 죽은 후 의자왕은 다시 사비성으로 거처를 옮기니, 사택덕적의 따님은 훗날에 사비성에서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다.
백제가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공식적인 역사서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백제가 익산으로 천도과정에서 다시 사비로 원복하였던 것이라 가정하면 그럴 수는 있겠다. 나중에 통일신라는 백제의 공식적인 수도가 아니었던 익산과 쌍릉에 대해 좀 더 등한시하였으며, 더욱이 선화가 신라의 공주였다는 것을 감안하여 관대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너무나 많은 가정을 염두에 둔 것이며, 후백제가 신라를 괴롭혔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만만한 지역이 아니었음도 고려하여야 한다.
하지만 쌍릉이 아직도 청주 한씨의 선조묘로 여겨지는 것은 진행형이다. 위에 언급된 것과 같이 무강왕은 마한의 시조왕으로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우량(友諒)이 청주(淸州) 한씨(韓氏)의 시조로 전하는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묘는 무강왕의 묘 즉 청주한씨 시조의 선대(先代) 묘(墓)로 전해왔다. 그럴 즈음 청주한씨는 국가로부터 쌍릉 주변일대의 토지를 불하받고 소유권등기를 하면서 조상묘역으로 성역화하였으며, 그 일에 공이 많은 사람을 기려 공적비까지 세웠다.
그러나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백제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표기하고, 다시 한씨 문중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 무렵의 관련된 학계 전문가들도 그렇게 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익산시는 묘 앞의 상석과 부속물을 치웠는데, 청주한씨는 이에 대한 소송을 걸어 사유물 무단 제거에 대한 승소를 받아내면서 피해액 1천만 원을 보상받았다. 이 내용은 쌍릉과 그 부속물에 대한 청주 한씨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쌍릉을 마한의 무강왕릉으로 보아야 하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이런 내용들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종결된 상황은 아니다. 이런 틈을 타서 마한의 중심지에 나주가 전개되어 있었다는 얘기들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이 묘의 주인을 마한의 무강왕(武康王)이든 백제의 무왕(일명 武廣王)이든 어떤 결론을 내야 했던 국가의 입장에서, 시대가 멀고 자료가 부족한 마한보다는 비교적 많은 근거가 남아있는 백제의 역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한시대의 목제유물 등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도 커다란 이유였을 것이며, 방식 등이 확인된 백제시대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은 결론을 내는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내가 청주 한씨로서 무강왕의 묘로 판명났다면 더 좋았을 것이고, 역사적인 가치로 보아서도 더욱 귀한 자료가 되었을 것도 생각해본다. 이러한 궁금증을 확실히 풀어줄 능의 유물이 도굴당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이렇게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그래서 자기 가문이나 자신의 일순간이 좋자고 역사를 왜곡하거나 뒤흔드는 일은 정말 없어져야 할 일이다. 이 대목에 서니 매국노와 친일파 후손들의 득세, 그리고 빼앗긴 문화재가 생각나서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최근 들어 쌍릉의 주변에 주차장도 개설하였고, 작지만 아늑한 공원을 만들어 찾는 이를 편하게 하고 있다. 이제는 입구에 쌍릉의 위치를 알리는 간판이라든지, 대왕묘와 소왕묘의 방향을 알리는 안내판도 있어 사적지다운 면모를 갖춤에 반가움이 앞선다. 사극이나 영화촬영지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陵)이지만, 그래도 언제 어느 때든지 그 자리에서 항상 같은 분위기를 주는 것은 가식이 없는 현물이다. 이 쌍릉도 드라마 서동요의 주배경지보다 작고 밋밋하지만, 오히려 그 순수함이 맛을 더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2010.09.20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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