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49. 곰개나루로 알려진 웅포의 고분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5:54

웅포면 웅포리 산90번지 일대는 경주최씨부제학공파종중의 소유로 여러 고분이 있는 지역이다. 이 고분은 1984년 9월 20일 시·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웅포리고분군은 높이 240m의 함라산 정상에서 서측으로 난 능선의 남측사면에 있다. 웅포에서 함라 방향으로 3km 정도의 북동측에 자리한 곳이다.

무덤의 위치는 해발 47m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이 해발 92m로 입점리고분 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은 곳이며, 발굴 전 고분이 위치한 곳의 경사도는 급하여 유실이 많이 된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적은 도굴 및 인위적으로 훼손된 곳이 많았고, 일부는 형태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곳도 있었다.

출토유물은 백제토기, 금동제 이식(耳飾), 철제 도자(刀子) 등 100여 점이다. 묘형(墓形)은 토착묘제인 수혈식고분과 횡구식고분, 옹관묘와 함께 백제중앙묘제인 횡혈식석실고분이 같은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이로써 횡구식묘제의 발생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이 고분은 입점리고분과 같은 시기의 고분으로 백제중앙세력과 토착세력의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고분이다.

웅포리고분은 1986년에 지표조사 과정에서 60여기의 유적이 확인되었으나, 원광대학교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고분 2기, 1992년에 13기, 1993년에 15기 등 총 30기의 고분이 조사 되었다. 그러나 이 30기는 지표상에서 판단하여 고분의 형태가 잘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조사한 것으로, 미발굴 상태의 고분을 감안하면 확인된 고분의 유형이 실제로 분포된 웅포리고분 모두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분의 유형은 구덩식돌곽무덤 15기, 굴식돌방무덤 2기, 앞트기식돌곽무덤 12기, 형태를 알 수 없는 무덤 1기 등으로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무덤은 하부인 해발 60m 아래 부분과, 상부인 해발73m 위 부분에 집중되어 있고 중앙부에는 해발 68m 부근에서 3기만 조사되었다.

위치별 고분유형은 하부에서 총 9기가 조사되었는데, 그중 구덩식돌곽무덤이 6기이며, 앞트기식돌곽무덤은 3기로 모두 고려시대 무덤이다. 중간부에서 조사된 3기는 모두 구덩식돌곽무덤이었다. 상부는 총 18기로서 구덩식돌곽무덤이 6기, 굴식돌방무덤 2기, 앞트기식돌곽무덤이 9기, 형태를 알 수 없는 무덤 1기 등이다.

이러한 분포상황을 정리해 보면 구덩식돌곽무덤은 전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굴식돌방무덤은 상부에서만 2기가 조사되어 매우 적은 분포를 나타내고 있다. 앞트기식돌곽무덤은 총12기 중 하부에서 3기, 나머지는 모두 상부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하부는 고려시대에, 상부는 백제시대에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백제의 무덤이 산의 정상부에 설치하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덩식돌곽무덤에 비해 굴식돌방무덤이 적게 나타나는 것은 굴식돌방무덤이 미처 조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며, 웅포리고분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다가 다른 돌무덤 방식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출토유물 중 대부호 4점, 직구호(直口壺) 1점, 개(蓋) 5점, 삼족기(三足器) 1점, 철겸 1점, 철도자(鐵刀子) 1점이 발견된 92-7고분이 다른 고분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기타 유물을 보면 상기 외에도 단경호(短頸壺), 고배(高杯), 대부소호(臺付小壺), 방추차(紡錘車), 개배(蓋杯), 삼족토기(三足土器), 병형토기, 관정, 광구호(廣口壺)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으로 보아 고분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웅포는 예로부터 곰개로 불렸는데 곰나루 또는 곰포구라는 뜻이다. 당시 여러 마을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였으나, 그중에 곰개마을이 가장 번창하여 웅포면의 중심지로 정하면서부터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덕분에 멀리 떨어져있던 우리 고장에서도 곰개라는 단어를 사용한 상점들이 몇 개나 들어설 정도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웅포면은 거리상 그다지 멀지 않는 곳이었으나, 당시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타지(他地)는 그냥 멀게만 느껴지던 지명이었다.

웅포는 금강을 끼고 생활의 터전을 이루었지만, 요사이는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 금강의 해수유통이 막힌 상태다. 따라서 금강의 수질오염이 심해졌으며, 포구로서의 기능도 상실되었다. 더불어 금강의 맑은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곳에서 자라던 우어가 민물고기로 변해가고 있으며. 그 개체수도 현격히 줄어들어 옛 명성을 잃은지 오래다. 특산물인 황복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예전의 생활은 천렵이나 사냥이 주를 이루었다. 이때에는 웅포와 같은 잔잔한 강물, 그리고 험하지 않은 산들이 많으면 생활하기에 좋은 고장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고장으로 얼마 전까지의 어르신들은 칡을 캐러 다니셨다. 그 길은 하루에 한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소달구지를 타고 갈 수도 없었으니 길도 아닌 지름길로 왕복 50리를 걸어서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웅포는 외진 곳이다. 부여 양화면과 익산 웅포면을 잇는 웅포대교가 완성되고, 그 길은 다시 황등과 삼기를 거쳐 금마까지 이어지는 백제로가 되었지만 아직도 생소하기만 하다.

한때는 웅포에 골프전문대학이 계획되기도 하였었다. 국내 유일의 특성화대학이며 세계적인 선수를 양성하여 골프의 메카로 거듭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교육기관은 아직 출발을 하지 못하였고, 실습장으로 사용하겠다던 골프장만 먼저 들어섰다. 국내최대 규모로 짓겠다던 골프장도 벌써 순위를 넘겨준 상태에서, 처음의 계획은 차츰 탄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골프장의 울타리 안에 웅포리고분군이 있었고, 지금은 발굴이후에 다시 복토되었다.

내가 처음 방문한 시기는 웅포 골프장과 연계한 경비행기 활주로를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 때였다. 그러나 활주로 계획은 무산되었고, 순수하게 웅포리고분을 찾아 방문한 것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이때도 이미 복토된 뒤의 고분군은 흔적을 보여주지 않았다.

 

2010.10.06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