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면 서고도리 산13번지에 아담한 정자가 하나 있는데,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하였다. 아석정은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에 위치하고, 금마에서 미륵사지로 가는 길목의 야산초입에 있는 정자로 상량문에 따르면 1934년에 건축되었다. 현재는 ‘도토성길’의 안내표지판이 위치를 안내하는데, 도토성이란 금마도(金馬都)에 있는 토성을 의미한다.
이 누정은 아호가 경전(景電)인 소진홍(蘇鎭洪)이 세웠는데, 현재의 위치는 자신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문정공(文靖公) 소세양이 퇴휴당(退休堂)에서 활을 쏘던 과녁터의 서쪽이라고 전한다. 소세양은 세온, 세검, 세량, 세득, 세신 등 6형제였다.
누정은 굿대숲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면에 터를 잡아 석축을 쌓고 토방을 올렸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에 원기둥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올렸다. 이 마루는 여느 것과 같이 누대(樓臺) 형식이며, 그리 넓지 않은 기둥 간격에도 불구하고 누각(樓脚)에 빗장을 대었다. 물론 누정을 지을 처음부터 빗장을 대었는지는 아니면 나중에 보강하는 의미로 대었는지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다.
여느 누각처럼 토방에서 마루로 올라가는 꼭 있어야 할 계단이 보이지 않는데, 원래에는 놓여 있었던 나무계단을 어느 누가 훼손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는 누정의 뒤쪽에 커다란 돌로 계단을 깎아놓아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나무로 된 누각에 통돌로 깎은 계단은 사실 잘 어울리지 않아보였다. 색상도 오랜 세월에 나무가 퇴색된 것에 반해 방금 세운 계단은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어 부조화를 이룬다. 그나마 누각의 뒤쪽에 세워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루의 좌우측과 뒤쪽의 등받이는 높지 않으나 바람이 통하는 구조가 아닌 판자를 대어 막아놓았고, 앞쪽 등받이는 각목으로 격자형태의 틀을 갖추어 바람도 통하고 누워서도 내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누정의 바로 아래에 민가가 있는가 하면 좌측에도 민가가 있어 담을 둘러 친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처마 너머인 뒤로는 바로 굿대숲의 대밭이며 북쪽인 우측에는 오솔길 건너에 정려각이 자리한다.
아석정의 현판은 안쪽 앞에 2개와 뒤쪽 3개, 그리고 우측면에 1개가 있는데 주요 편액으로는 ‘아석정기(我石亭記)’, ‘아석정기원운병서(我石亭記原韻幷書)’, ‘아석정(我石亭)’, ‘근차원운(謹次原韻)’ 등이다.
아석정기에 의하면 ‘금마읍내는 호남의 지경에서 50여리를 상거하니 이곳은 우리들이 사는 익산군의 가장 유서 깊은 고장으로 본시 마한(馬韓)땅으로, 무왕(武王)이 도읍한 궁성터가 있다고 하며 왕릉(王陵)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고 적고 있다.
또 당시 금마는 이름난 고장으로 훌륭한 분들이 많았으므로 외지에서 타성받이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아석정기원운병서는 1934년에 소진홍이 썼다. 내용을 살펴보면 아석정기와 비슷하나 뒷부분에서 자신의 싯구를 적고 있다. 전략, 조상유업 이어받아 옳게 살아가기 힘써서 성으로 사람의 바탕을 기를 지어다. 고요하고 편안함을 익혀 배우고, 미미하며 티끌같은 자잘한 취미들이사 지팡이 둘러메고 저녁이며 아침에 나다니기 싫지 않으리 라고 적었다. 또한 ‘근차원운’이나 ‘아석정’ 도 비슷한 내용들이다.
아석정은 좌랑공(佐郞公) 소사식(蘇斯殖)의 정려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웠다고 적었으나, 현재는 소사식의 정려 대신 소세득의 증손인 소행진(蘇行震) 정려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정려각은 소행진의 작은 아들인 소동(蘇同)의 처 민씨에 대한 열녀정려각을 겸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소종규의 처 이씨의 정려현판도 걸려있다. 이 정려각은 1783년 처음 지어졌으며, 중수 현판에는 1976년과 1987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여느 정려각이 그러하지만 이곳 정려각 역시 관리가 되지 않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며 시야도 막혀 답답함을 준다. 충신이나 오래 기려야 할 분들의 정려각이라면, 잘 관리하여 어느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원래의 취지에 합당하다 할 것이다.
당시 아석정의 앞 내(川)는 맑고 시원한 물이 흐르며, 넓은 바위도 있어 쉬는 장소로는 제격이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누정의 이름은 마치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학문을 닦으며 수도하던 정사(精舍)의 유습(遺習)을 본떠 아천석지구(我泉石之句)를 읊조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아석정은 금마도토성으로 가는 길의 입구에 있다. 혹시 산에 오르기 전 잠시 쉬면서 땀을 닦고 가라는 의미는 없는지 되새겨본다. 도토성이 금마를 지키는 무인의 무대였다면, 아석정은 그것을 기리는 문인들의 장소로 만들지 않았을까 회상도 해본다. 문인이란 항상 풍류를 읊고 감상에 젖어 흥얼거리는 사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운율을 논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록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사람도 문인이다. 문인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며, 불의를 보면 분연히 일어나 저항하고 계도하는 역할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올바른 문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석정의 문인은 문과 무를 엮어주고 문화와 생활을 이어주는 멋있는 문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혹시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라도 말이다.
이 아석정과 정려각의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금마도토성이 나온다. 그러나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이 길이 바로 끊어져서 산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높지 않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내왕이 없는 굿대숲의 기슭에 아석정이 있는 것이다.
아석정의 바로 앞에는 민가가 있고, 그 앞에 뚜껑샘도 있다. 이 샘은 금마면 서고도리 서계마을에 위치하며, 도로변에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던 샘이다.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샘은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이 갓을 벗어야만 마실 수 있는 정도로 좁은 곳이었다. 그런데 갓을 벗어 걸어놓으면 샘이 마치 뚜껑을 닫은 것처럼 보이지 않아 뚜껑샘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석정은 뒤에 산이 있어 전망이 좋으며, 앞에는 천이 흘러 근심을 실어가는 곳이었다. 필요하면 묵객들을 불러 시를 짓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 목이 컬컬하면 막걸리나 혹은 뚜껑샘의 시원한 약수를 마셨을 것이니 더없이 평안한 곳이었음이 짐작된다. 현재는 ‘뚜껑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 그 유래를 전해준다.
예전의 아석정은 정읍 칠보의 유상대나 익산 망성의 석천대처럼 경치가 좋고, 자연을 음미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정자 앞을 흐르던 개천은 작은 농수로에 지나지 않으며 생활하수의 수로로 변해버렸다. 오가며 쳐다보고 가는 사람들도 정작 아석정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다. 그만큼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찾아보아야 할 명목이 없는 곳으로 전락한 때문이다.
유상대가 있었다는 것, 석천대가 있었다는 것, 아석정이 있었다는 것 등은 모두가 훌륭한 선조문인들을 두었다는 증거다. 시청이나 문화재청에서 이런 건물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문인들은 이를 기리고 그 명맥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내 것을 긴요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자세가 그립다.
집안의 동생뻘되는 소진덕(蘇鎭德)이 쓴 아석정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돌이 이리 단단함은 그 바탕에 따라 이루어짐이라.
바위에 선 이 정자가 오래 가기를 비는 마음이 반석으로 이어져라.
죽림(竹林)의 운치는 발(簾)에서 풍기는 느낌이 시원하구나.
언제나 산뜻한 냇물소리 베고 자는 한낮의 꿈길에도 맑게 울리네.
못나고 어리석은 아우는 끝내 이리도 무능한데
모든 일에 현명한 우리 형님 능력있고 성실하며
늘그막의 사실 곳에 아석정을 지어내니
마당 가 화단에는 밥터기 꽃나무랑 심어서
서로들 우애하고 사이좋게 화목하네.
2010.11.03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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