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46. 백제의 역사현실을 정확이 알려준 미륵사지 석탑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1. 28. 06:11

금마면 기양리 97번지에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국가의 소유로 되어있으며, 불교와 관련된 절 즉 미륵사터의 서원(西院)에 있는 석탑 1기를 말한다.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전설이 전해오는 미륵사지 내에 있다.

미륵사지석탑의 평면은 방형(方形)으로 다층을 이루고 있다. 탑의 서북부가 붕괴되어 1915년 시멘트로 보수하였고, 1998년 구조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원형복구를 위하여 완전 해체작업에 들어갔고, 2009년 초에 1층 지대석만 남기고 모두 해체되었다.

초층탑신(初層塔身)은 정면과 측면모두 1면이 각각 3칸으로 되어있으며, 외곽 4면의 중앙 칸마다 모두 폭 51cm, 높이 157cm의 문호(門戶)가 만들어져 있어 안으로 통할 수 있다. 문을 열었을 때의 문설주 안쪽 폭은 106.5cm, 높이 159.5cm, 문턱의 높이는 21.5cm이다. 이 문을 통하여 탑의 내부로 들어가면 동서남북으로 보행이 가능한 교차로 형태의 공간이 있는데, 이 통로의 폭은 149cm, 높이는 211cm나 되어 두 사람이 교차통행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또 한 면의 3칸 중 각 양쪽 칸의 중앙부에는 탱주(?柱)로 받쳐져 있으며, 탱주와 우주 사이의 기둥에는 가운데 배가 부른 엔터시스법이 가미되었다.

초층 옥개석은 넓고 얇은 평면석이며, 별석(別石)으로 끼운 3단의 층급받침 위에 처리되었다. 4귀는 약간 반전되고 있다. 2층 옥신(屋身)의 높이가 1층 옥신에 비하여 현저히 축소되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5층과 6층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어서 4층까지의 층급받침이 3단인 것과는 다른 점을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교차되는 지점에 거대한 4각형 석주(石柱)가 있는데, 목조건축에서는 이를 찰주(擦柱)라 하며 이것은 바로 목탑의 형식을 빌린 것이다. 4각형의 한 변이 99cm, 높이가 204.5cm인 찰주의 각 면에는 엔타시스를 표현하였으며, 4각형 석주위에 평방(平枋)과 창방(唱榜)을 가설하였다. 찰주 즉 심초석(芯礎石)의 밑에는 한 변이 145cm인 사각형 초반석이 받쳐주고 있다.

또 두공양식(頭工樣式)을 모방한 3단의 받침이 있어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목조건축의 구조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탑의 외부 네 귀퉁이에는 이 석탑을 수호하는 석인상(石人像)이 세워져 있는데 언뜻 보면 원숭이와도 비슷하여 돌짐승의 문양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 4기가 있었을 것이나 오랫동안 3기만 발견되었다가, 이번 해체과정에서 흙을 파헤치면서 나머지 1기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3기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며, 1기에서만 거의 원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며, 6층까지의 높이가 14.24m로 최대의 석탑이다. 지대석 상단에서 단층기단 상부까지의 높이는 93cm, 단층기단의 폭은 한면이 10.5m나 된다. 1층부를 이루는 방형의 사각형 하부 너비는 8.28m에 이른다. 이렇게 거대한 석탑이 생긴 이유는 기존의 목탑 형식이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전통의 목조 양식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석탑의 형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되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석탑의 시원(始原)이면서 최대의 걸작이다.

탑이 무너지기 전인 9층의 높이는 대략 27~28m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똑같은 석탑이 동쪽에 또 하나 있으며, 두 석탑 사이에는 규모가 더 큰 목탑이 있어서 미륵사에는 원래 3개의 탑과 3개의 가람(伽藍)이 있었다.

미륵사지에는 서탑과 동탑으로 석탑 두 개가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이 석탑이 붕괴되면서 흩어진 돌들을 인근민가에서 가져다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그 속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부재들 외에 미륵사지의 부지조성에 사용되었던 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2009년 1월 19일 석탑의 해체 중에 1층의 심주석 윗면 사리공에서 유물이 무려 505점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3cm, 세로 10.3cm이며, 금판에 음각한 뒤 붉은색 주칠(朱漆)을 하여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봉안기에 기록된 글자는 앞뒤면 각각 11행이었고, 1행에 9자씩으로 앞면은 총 99자, 뒷면은 총 94자로 모두 193자였다. 이러한 내용은 2009년 1월 19일 발표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18등급중 제1품인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기해년(639년)에 가람을 건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서동요로 이어지던 서동과 선화의 이야기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선화는 서동비가 아니었다는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고, 당시 무왕의 재임기간이 41년이나 됨으로 사택덕적은 선화의 사후에 등장한 왕후는 아니었을지도 거론된다.

한편 사리공의 크기는 한 변이 25cm인 정사각형에 깊이 27cm인 육면체모형이었다. 또 심주석의 윗면에는 먹줄로 방위를 표시하였으며, 사리호를 구멍의 정중앙에 놓고 사리봉안기는 그의 남쪽에 놓았다. 조사에 따르면 이 탑의 금제사리호 문양이 왕궁리오층석탑의 사리내합에서의 문양과 공통적으로 확인되어 마치 한 사람의 장인(匠人)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는 639년 11월에 제석사가 재난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번에 발굴된 미륵사지석탑 사리봉안기에는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토대로 이를 종합해보면 무왕과 선화비는 제석사가 있던 왕궁에서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다가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이를 본 후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때의 비용은 제후들을 견제도 할겸 왕실의 제정지출도 줄일겸 사택덕적의 따님을 동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무왕과 선화는 어디에 머물러 있다가 사자사로 갔다는 것일까.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저 멀리 부여에서 왔다면 왕이 사자사를 방문하러 일부러 오기에는 부적합한 얘기가 된다. 이때 왕궁면에 있는 제석사가 끼어들면 자연스런 답이 나온다. 제석사는 왕실사찰로 왕과 왕가 그리고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다니던 절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왕이 다니던 사찰 옆에 왕궁이 있었고, 그 왕실에 있던 왕이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고승이 머무는 사자사로 간단한 행차를 한 것이다. 그래서 2~3년 전에 착공을 하여 639년 1월 29일에 완공을 본 것이다. 이때의 숫자 639와 129의 역학관계를 천관이 풀어야할 숙제라고 한다면 토정비결을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어 질 것이다.

한편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대규모 토목공사나 뛰어난 백제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수세식화장실 등은 왕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시행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익산은 무왕이 천도한 백제의 수도였으며, 왕궁리 유적지와 제석사지 그리고 미륵사지 유적지는 하나의 일련성을 가진다는 의견이다.

내가 이 탑을 우리 아이들에게 처음 보여준 것은 1992년이었다. 이때만 해도 석탑에 대한 조사연구가 활발하지 않아서 찾는 이도 별로 많지 않았었고, 관심도 없던 때였다. 그런 덕분에 우리는 넓은 부지를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메뚜기도 잡았었고, 탑의 내부로 들어가서 돌아 나오는 술래놀이도 하곤 하였었다. 당시에는 고르지 못한 경내 부지에 잡풀이 우거진 그냥 임자 없는 들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기에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아무런 제재도 없이 얼마나 많은 유적들이 훼손되었을지 생각을 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교과서에 나오던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반쯤 무너진 경사면에 임시로 보수하였던 석탑은 전무후무한 석탑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해체된 것이다. 이 탑이 어떤 형태로 복원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또 다시 천년 세월을 이어갈 석탑이 완성되기를 바란다.

 

2010. 09 08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