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58.백제 왕궁에서 사용하던 기와무더기 왕궁리기와요지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2. 23. 06:24

왕궁면 왕궁리 30-9번지는 왕궁리기와요지가 있는 곳이다. 이 일대는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왕궁리 기와요지는 제석사지에서 북방으로 500여m 떨어진 궁평마을의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은 원상복구 후 과수원으로 사용 중이다.

왕궁리기와요지에서는 기와편이나 소토덩이, 숯, 가마벽체 등이 산재되어 있었고 다량의 퇴적층에서도 출토되었다. 가마의 벽체가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이 유적지를 제석사에서 사용하던 기와나 기물을 제작하던 곳으로 추측하였으나, 그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제석사지와 왕궁리기와요지 즉 폐기유적지는 마을의 쓰레기를 내다버릴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어 이를 뒷받침 해준다. 이 유적은 백제기와가 출토되는 지역으로 다량의 소조상(塑造像)이 함께 발견되었다. 기와는 수막새와 암키와, 수키와가 출토되었으며 암막새와 인장와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와요(瓦窯)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지에 가마를 만들어서 직접 구운 것은 아니며, 정관 13년 제석사의 화재 이후 잔재물을 옮겨 쌓아 놓은 제석사지 폐기유적(廢棄遺蹟)이라는 결론을 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학술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유물은 대체로 3개 층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발견된 기와나 유물의 제작시기별 구분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석사지에서 발견되는 연화문수막새와 당초문암막새는 발견되지 않아 제석사의 건립시기와는 약간의 편차가 있음을 판단할 수 있었다. 수거된 평기와류는 모두 7,419점이며 막새류도 627점이나 되었다. 명문와는 등에 직접 각서(刻書)한 것이 3점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정확한 내용을 진단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유물로 보아 제석사지 폐기장(廢棄場)은 7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제석사를 장식했을 소조상도 346점이 수습되었다. 소조상 중에 천부상이나 악귀상 및 동물상 두부편(頭部片)은 백제시대 조각상으로는 처음 출토된 것으로 여래상편(如來像片), 보살상편(菩薩像片), 의습편(衣習片) 등과 함께 백제시대의 조각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부분의 파편들은 원형을 잃어 복원할 수 없지만, 일부 부분적인 복원만으로도 화려했던 조각기법을 파악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악귀상이 왜 이곳에서만 나올까 생각해본다. 제석사는 왕이 다니는 사찰이었으며, 왕이 지휘하던 사찰이었다. 따라서 이런 사찰에 악귀가 붙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고, 혹시나 굴러다니는 악귀가 있다면 모두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못된 악귀들을 잡아다가 모두 악귀상에 넣은 후 이 악귀상을 파괴하거나 불에 구워 죽이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신성해야 할 제단에 악귀는 허용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높은 열에 의해 녹은 이물질이 묻었고, 처음부터 흉측한 형상이었지만 그로인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이상한 형태로 변화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악귀상을 보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제웅이다. 제웅은 짚이나 헝겊으로 만들어서 혼령을 실은 다음 그 사람을 죽이는 방법 대신으로 택한 일종의 대용품이다. 전하는 설에 의하면 제웅을 못살게 굴어 결국은 그 사람에게 해꼬지가 옳겨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악귀상이 바로 이런 대용품은 아니었을까.

소조상의 제작기법은 둥근나무나 잔나뭇가지를 이용하여 골조를 만들고, 다시 새끼를 감은 후, 그 위에 짚이 섞인 점토살을 붙였다. 그리고 마무리는 미세한 사립 점토를 덧붙였다. 의습의 표현에서도 여러 번의 미세사립 점토를 덧붙였으며, 양감과 음감을 표현하는 부분에는 원재료인 흙에 짚이나 직물의 섬유를 다르게 배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소조상을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배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조사를 한다면 백제 말기의 불교미술사, 그리고 건축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중심으로 주위의 지형변형이 심한 편이다. 남으로는 경작지로, 동으로는 도로가, 서편으로는 과수원이, 북편으로는 새로이 들어선 민묘에 의해 지형변경이 이루어진 상태다.

나는 이 기와요지를 찾으러 4번을 방문하였다. 처음에는 바로 옆의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에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서 헤매다 돌아왔고, 두 번째에도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방문한 때였다. 그때는 가다가 확인해도 맞지 않는 곳이었고 다시 돌아오다가 확인해도 맞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다음 두 차례는 제대로 알고 갔었지만, 배밭에서는 갓끈도 고치지 말라는 말처럼 남의 과수원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훗날 겨울에 다시 찾아야 할 장소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다.

2010.12.8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