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면 용화리 산33번지는 많은 묘가 있는 진주소씨익산종회의 문중산이다. 여기에는 묘비가 여럿 있는데 그중 1기의 소자파묘비는 1999년 7월 9일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소자파 묘비는 용화산 동쪽 경사면의 진주(晋州) 소씨(蘇氏) 선산묘지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소자파선생의 묘비로 용화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며 인근의 들녘과 산야가 모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소자파묘비는 기단과 비신,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모습이 완전하고, 비문의 글씨도 비교적 선명하며 그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이수(螭首)와 기단부에 용무늬와 국화무늬가 양각되어 있다. 비문은 남곤과 이행(李荇)이 짓고 글씨는 김희수(金希壽)와 성세창(成世昌)이 썼다. 소자파는 자가 미수(眉叟)이며, 양곡 소세양의 부친으로 성종 14년 148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빈부 도사를 거쳐, 중종 19년 1524년 구례의 임지에서 73세에 순절하였다. 그런데 아들 소세양의 벼슬이 자꾸 올라가면서 소자파 역시 가선대부 이조참판과 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를 추증 받았다.
소자파는 풍채가 뛰어나고 언변이 좋았으며, 10여년에 걸쳐 조정에 등용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비리와 타협을 할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소자파의 묘비는 전체높이가 3m, 방형묘석 위에 세워진 비신은 높이 165cm, 폭 93cm, 두께 23cm로 이수를 갖춘 통비(通碑)다. 방향묘석은 전면과 후면에 2개의 정사각형 선을 긋고 내부에 국화문으로 조각하였다. 또한 윗부분은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이수는 용 한 마리가 앞발을 치켜들고,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이 묘비는 중종 21년 1526년에 건립되어 인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전해진다.
용화산 자락 소씨문중의 산에 가보면 많은 묘가 있고 그에 못지않게 비석 또한 아주 많다. 가는 곳마다 오래 되어 이끼가 끼고 색상이 변한 묘비와 신도비가 있어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유교에 의해 좋은 터를 잡고 대대손손 매장을 하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가려면 구절양장의 굽은 길로 가야했던 도로변이었지만, 이제는 넓은 도로가 새로 뚫렸다. 확장된 1번국도 덕분에 좌측으로는 시야가 가리게 되었으나 앞을 전혀 못 보는 정도는 아니며, 옆으로 높게 올라선 도로가 신경쓰이는 상황이다.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만들고, 낮은 곳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고 모두가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산은 누가 뭐래도 산다워야 하고, 물은 어쨌거나 물다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그럼 산에다 묘를 쓰는 것은 어디에 속할까. 죽은 후에 한줌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묘를 만들어 장사지내는 것이 맞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장이나 조장 등도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하니 누구가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소자파묘비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원래의 길로 제각에서 걸어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는 서쪽 모퉁이에서 차량으로 산위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코스다. 그런데 ‘소자파묘비’는 대략 윗부분에 있으니 차량을 이용함이 좋을 듯하나, 바로 아래에 ‘소세양신도비’가 있어 두 곳을 모두 보려면 처음부터 걸어 올라가는 것이 정석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한 벌안의 묘지에 두 가지의 문화재가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소자파는 아들인 소세양의 직급이 올라가면서 더불어 직급을 높이 받는 형국이 되었다. 거기다가 그것은 소자파 본인이 죽고 난 후의 일이라서 권력의 위력을 실감나게 한다.
그런데 소자파의 묘비가 문화재로 선정된 것은 그의 직급이 높아서가 아니다. 묘비의 건립연대가 인근에서 가장 빠르며, 비의 조각이나 형태 등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자파묘비의 내용을 일부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군(君)의 이름은 자파(自坡)요, 미수(眉叟)는 그의 자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효식(效軾)으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에 증직 가선대부 병조참판이고, 할아버지 이름은 희(禧)로 중군사정(中軍司正)이며 증직 통정대부형조참의며, 증조의 이름은 선(僊)이며 사재소윤(司宰少尹)인데 증직 통훈대부종부시종이다. 성화 계묘(성종14년 1483년)에 시골에서 거행하는 성균시에 합격하여 상사(上舍)가 되었다. 중략, 대과인 문과에 몇 번이나 응시하여 번번이 떨어졌으나 군의 학행이 출중하다고 천거해 내시교관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의영고(義盈庫) 주부(主簿)로 옮기고 다시 남평현감으로 나갔다. 홀로 계신 장모님을 위하여 외직을 구하니 구례현감으로 나가서 있던 중 갑자기 감기로 앓다가 갑신년(중종19년 1524년) 9월초8일 기사(己巳)에 생을 마치니 향년73세였다.
아들 소세양이 황해도 관찰사로 추대되어 있었기에 자파에게 은공을 내려 증직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의 직함을 주며 11월에 익산의 탄곡리에 장사지냈다. 군의 사람됨이 너그럽고 무게가 있으며 장자의 풍도를 갖춰 사물의 이해득실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았다.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한 번도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헐벗고 굶주림을 도와주는데 충분치 못함을 걱정하였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동을 볼 때 타고난 천성이라 여겨졌다. 무릇 어버이를 섬기고 여러 아우들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대접하는 습성이 늙어감에 더욱 두터워지므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선을 쌓는 일이 곡식을 심는 것과 같으니 모종내고 김을 매며 곡식이 다 여물면 잔치 초대를 하기를 기다리네. 후략. 가정5년(중종21년 1526년) 5월
2010.08.25익산 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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