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57. 쇄국정책의 산물 여산척화비(礪山斥和卑)

꿈꾸는 세상살이 2010. 12. 23. 05:55


여산면 여산리 445-2번지에 여산동헌이 있고 그 담장 안에 척화비가 있다. 이는 익산시 소유로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척화비는 인근 여산초등학교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다.

척화비는 1886년 대원군이 병인양요 때 척화(斥和)를 천명(天命)하고, 1871년 신미양요 이후에 서울 종로를 비롯하여 동래, 부산진, 함양, 경주 등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는 서양의 세력이 확장되어 동쪽으로 퍼져오면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조선의 통치 질서를 굳건히 하기위한 방편이었다. 이곳 여산 면단위의 척화비로 보아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한편, 당시 여산이 지니고 있던 익산에서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약 200여개의 척화비가 세워졌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 정도 숫자라면 우리 익산에서도 여산 외에 또 다른 곳에서 척화비가 발견됨직도 하건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조선말기까지 유림의 세력들이 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곳이 여산이라고 하면 맞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현재 발견된 척화비도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나 시도유형문화재에 지정된 경남양산의 척화비를 비롯하여 대략 7~80여개는 될 것으로 추산해본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공사관의 요구에 의하여 척화비는 모두 철거되었다. 말하자면 척화 대신에 친화를 요구하는 과정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척화비의 일부는 땅에 묻혔다가 1915년 이후 다시 발견되고 있다. 여산 척화비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며, 그 이후에 별도로 세워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척화비는 높이 114cm, 폭 46cm, 두께 9cm의 대리석으로 된 비석이다. 이 대리석은 질좋은 아름다운 대리석이 아니라 인근 여산대리석으로 화강암과 고급 장식용대리석의 중간에 해당하는 품질로 보인다. 규모도 그렇거니와 해서체의 내용이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으로 서울 종로에 위치한 척화비(斥和卑)의 내용과 동일하다.

1860년대 조선왕조는 서구 열강의 세력접근을 맞아 구책인 쇄국정책을 내놓게 된다. 그러므로 민족사상에 바탕을 둔 조선조 말기의 왕조에 통상요구를 하는 것은 통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되었다. 병인양요뿐만 아니라 그해 여름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고종 5년 1868년 남연군묘(南延君墓)의 도굴사건을 통하여 그 적대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후 고종 8년 1871년 신미양요라 불리는 광성진전투(廣城津戰鬪)의 전황을 보고 받은 후 척화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리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그 뜻을 전파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당시를 살펴보면 고종8년 1871년4월25일 아침 미군이 강화도를 철수하면서 벌어진 전황을 보고받은 고종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들을 응징하여 쫒아낼 것이니 화평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매국의 죄로서 처형하리라는 확고한 강경한 뜻을 표명하였다. 곧 이어 대원군은 종로를 비롯하여 전국의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이로써 쇄국정책의 입지를 으로 양이로부터 나라를 구한다는 12자가 일약 화두로 떠올랐다.

여기서 말하는 척화란 서로 뜻을 모아 화합하고 친하게 지내보자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이다. 즉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로 교통하는데 찬성하지 않으니, 조선에 외국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다른 나라와 통상이나 교역을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있었다.

흥선대원군의 호는 석파(石坡), 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며 서예와 수묵화 특히 난(蘭)치기에 능했다. 또 자는 시백(時伯), 시호는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헌종 9년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으나, 안동김씨의 세력에 밀려 지냈다. 철종의 후사가 없자 조대비에게 신임을 얻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세자로 책봉받고, 철종 14년 1863년에 12살의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졌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안동김씨의 축출과 부패관리의 처벌로 시작되었다. 허례허식을 줄이고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하는 등 제도개혁에도 앞장섰다.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세금을 걷었으며, 조세운반의 부정을 막았다. 이에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나라가 조용해지자 자신의 정책에 대한 과신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백성에게 무리한 부담을 주었고, 서양문물로 인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맞게 된다. 이때 쇄국정책이 나왔으며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물의 흡수가 늦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이어지자 명성황후가 반(反)흥선대원군을 선언하였고, 최익현도 반대상소를 하였다. 1873년 11월 드디어 고종(高宗)이 친정체재에 들어가자 대원군의 행동이 운현궁으로 제한된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잠시 전면에 나섰으나 곧 명성황후인 민자영(閔玆暎)에 의해 톈진(天津)에 유폐된다. 1885년 귀국하여 다시 운현궁에서 지내면서, 1887년 청나라를 업고 고종을 폐하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위하려다 실패하여 궁지에 몰린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다시 일본을 업고 힘을 얻었다. 이리하여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반일파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되고, 여론이 들끓자 이하응도 결국 물러나게 된다. 1898년 2월 79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광무 11년 1907년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으로 추봉되었다.

여산의 척화비를 보면 요즘의 정치가 생각난다.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한편에서는 그 문을 전기톱으로 부수고 하는 행동들이 모두 쇄국정치의 1번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남들이 따라오기를 바라는 마음, 나와 다른 생각이나 나와는 다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막가파로 끌고가는 정치가 그렇다. 내 지시대로 따르지 않고 행여 다른 길로 갈까 두려워 막고 서는 정치다. 그뿐이 아니다. 언론도 쇄국언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명정대해야 할 신문은 집권자의 대변지요 신속공정해야 할 방송은 집권당의 선전홍보에 지나지 않는 세태가 그렇다.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쇄국은 결코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촌이네 글로벌 시대네 하는 말들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되 내게 필요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을 골라 적용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세상이다. 아무리 쇄국을 해도 옆으로 세어 나가고 차고 넘치는 게 요즘의 정보다. 눈만 뜨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현실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보지마라 하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은 듣지마라 한다고 묻혀가는 것이 아니다.

국왕의 나이가 어려서 아직 잘 모르니 아비인 자신이 나서서 옳은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다던 이하응이나, 국민들의 수준이 낮아서 잘 모르겠지만 미래의 청사진을 보면 자신의 사심없는 생각이 곧 정답이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서로 닮아 보인다.

이하응은 흥선헌의대원왕이 된 1907년으로부터 꼭 100년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였을까. 나라에 대해서 국민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속죄의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악어의 눈물을 흘렸을까. 이하응은 나라를 흥하게 한 사람일까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일까. 역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대원군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가 100년은 침체되었다고도 말한다.

대원군이 척화로 쇄국을 외치던 때, 모든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권세에 눌려 따랐지만 그것은 그냥 그런 척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권력없는 국민들이라 하여도 더 많은 문물과 더 많은 정보를 원했으며, 잘못된 쇄국이 가져온 파국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하응이 철커덕하고 자물쇠를 채웠듯이, 현재 우리에게 재갈을 물리고 안경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볼일이다.

 

2010.12.01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