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0. 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

꿈꾸는 세상살이 2011. 1. 6. 04:36

60. 금마도토성(金馬都土城)

 

금마면 서고도리 산14번지에 있는 성곽으로, 1984년 9월 20일 시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산은 높지 않으나 일대가 대나무로 둘러싸여있으며, 북쪽의 군부대를 포함하여 인적이 드문 곳이다. 산정 일대가 소중영씨 개인소유로 되어있다.

 

금마도토성은 금마면 서고도리의 해발 87m인 굿대숲 또는 깃대숲으로 불리는 구릉 위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저토성(猪土城)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마에서 북쪽으로 약 700m쯤 떨어진 이 봉우리는 북쪽으로 미륵산, 서쪽으로 오금산, 동쪽으로 금마산이 둘러 있다. 익산토성이 있는 오금산과는 아주 좁은 개천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는 고도리석불입상이 있는 옥룡천(玉龍川)의 상류이다. 이 토성은 능선으로 이어진 안부(鞍部)에 물이 없는 해자(垓子)인 공호(空壕)를 파서 절단하고, 독립된 산봉우리에 대머리와 같이 토루(土壘)와 토단(土段)을 쌓아올린 성이다. 성은 원형에 가까운 평면인데, 남쪽 성벽 중앙부는 돌출되어 있어 이 자리에는 우루(隅樓)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이곳을 묘지로 이용하기에 원형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의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금마면 ‘동고도리에 북방 3정(町) 거리의 성황산(城隍山)이 있고, 그 위에 주위가 4정 정도 되는 토성이 있는데 중앙에 성황단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뒤부터 도토성은 성황산성이라고도 불렸다. 1991년 10월 18일부터 180일간의 조사에 의하면 성벽의 둘레는 369m, 문지(門址)는 1곳만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성곽의 너비는 약 4.3m, 높이는 3.5m 정도의 작은 성이다. 성의 북동부가 취약한 곳이라 보강하였다하여도 폭 5.6m, 높이 3.9m에 이른다.

 

금마 도토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벽 앞에 2m 내외의 회랑도를 두었고, 그 회랑도 앞에 다시 성의 외곽을 따라 둘러쳐진 너비 9m, 깊이 2.4m의 인공연못 해자(垓子)를 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흙으로 회랑도 끝에 토루(土壘)를 쌓아 방어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경사가 급한 비탈을 통과할 때는 보호용 기둥 구덩이를 촘촘히 하여 성벽을 튼튼히 하고,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는 간격을 넓게 하여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동쪽 성벽은 산허리의 경사면을 파서 외루(外壘)를 쌓아 올리고, 내부에도 토루를 쌓은 흔적이 있다. 이 토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익산지’에는 저토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강후진(姜候晋)의 ‘와유기(臥遊記)’에서 ‘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편에 의하면 ‘서쪽의 두 토성중 하나를 이 금마도 토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 오금산 토성과 굿대숲 토성의 두 토성을 기록할 때에 「두」를 「토」로 발음하여 ‘토’는 ‘도야지’를 의미하므로 저토성으로 기록하였는지도 모른다.

 

성안에서는 왕궁평 토성 내에서의 출토와 같이 상부대관(上部大官)명의 평기와쪽과, 미륵산성에서 출토되었던 것과 같은 금마저성(金馬渚城)명의 기와쪽이 출토되었다. 통일신라때의 유물로는 막새류와 명문와, 토기류, 중국청자 등이 발견되었다.

 

또 이들 축성 방식은 인근의 보덕성(일명 익산토성 또는 오금산성)과 비슷하며, 아울러 백제 축성기법에 속한다. 석축으로 된 성벽 기저부의 기초석과 벽체로 올라가는 축조기법 역시 부여의 사비성과 부소산성에 아주 가깝다.

 

한편 벽체의 붕괴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는 보강석축은, 판축된 토루의 외측 벽면에 돌로 한 겹 덧입혀 쌓은 듯하여 다른 성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보아 미륵산성이나 왕궁평성 그리고 오금산성과 같은 때에 이룩되었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내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도자기와 기와편들이 흩어져있었으며 개축의 흔적이 뚜렷하므로 고려시대에 수축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이곳에 서낭신(城隍神)과 주인 없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여단(?檀)을 설치하였었다. 성지는 이 고을 출신 소양곡이 말을 타던 자리로 전해져 현재는 말달지기 또는 말다지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마도토성으로 가는 ‘도토성길’은 금마에서 722번 지방도로를 따라 미륵사지로 가다보면,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나타난다. 그 길은 거창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아침 산책으로 나설만한 곳으로 보면 된다. 요즘 같이 해가 긴 날이면 아침 운동으로 1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니 굿대숲은 아주 좋은 코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찾은 굿대숲은 있던 길마저 잡목에 휩쓸려 줏대를 잃고 있었다.

 

내가 만나기 원하는 도토성은,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대밭을 헤치고 나갔어도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길도 없고 성도 없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산이 높지 않으니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는 것은 웬말인가. 그 말을 듣고는 또 다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토성이니 그동안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 익산토성에서 보았듯이 흙으로 된 성벽이 남아있을리가 없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숲 꼭대기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1,000년 전의 토성이 훼손되었을 것은 자명하였다. 서쪽의 도토성 입구를 흐르던 맑은 내(川)도 논고랑의 배수로로 변한지 오래다. 산에는 잡목이 우거져서 숲을 이루었고, 잡초는 길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뒤덮고 있다. 이제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문득 내 집의 뒷산에도 이런 문화재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해본다. 나는 매일 같이 산에 오르면서 길도 손질하고 사람들이 찾기 쉽도록 안내판도 세우고 싶다. 행여나 잡초가 길을 막으면 아예 뿌리째 뽑아버려 씨를 말릴 것이다. 한 손에는 낫을 들고 한 손에는 톱을 들어 손질해주고 싶다. 잘 정비된 산성은 초등학생의 소풍길로도 좋을 것이다.

 

문화재는 꼭꼭 숨겨놓고 사진을 찍을 때 돈을 받는 수입의 원천이 아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왜 그랬는지를 확인하고 현장에서 느껴야 참다운 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문화재는 내가 보고 버릴 일과물이 아니다. 후손이 계속 간직하고 의미를 되새겨야할 정신의 주체인 것이다.

2010.12.22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