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면 제남리 224번지에 남원사(南原寺)가 있는데, 그중 미륵전 1곽에 대하여 1984년 4월 1일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하였다. 이 미륵전은 남원사 소유이다. 여산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논 가운데의 독자천 옆에 위치하고 있다.
1968년 사찰의 주지인 이동원이 건립한 사적비에 의하면, 통일신라 흥덕왕 6년 831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세웠으며 원래는 건물이 수십 동에 이르는 큰 규모의 절로 ‘법당사(法堂寺)’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폐사되었다. 1946년에 주지(住持)로 보명선사(普明禪師) 부임한 적이 있으며, 한성이(韓聖履)스님이 주지로 있던 1968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중건사적비의 크기는 높이 108cm, 폭39cm, 두께 14cm이다. 시멘트로 만든 기단위에 옥개형 개석을 얹은 비석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경내에는 미륵전, 대웅전, 종각, 요사채가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적비의 의하면 조선 선조25년 1592년 남원부사 윤(尹) 공(公)이 부임하여 오던 중 꿈에 석불을 보았고, 부처님이 가르쳐준 그 자리를 파보니 미륵불상 그리고 거북형의 석조받침과 5층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발견한 자리에 법당을 짓고 남원사라 명명하였는데, 윤공은 나중에 예조판서에 승진되었고, 가문의 명성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사적비나 공적비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벼슬이 높아졌고, 후세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를 따져보면 한결같은 내용에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덕망이 있고 학문도 깊으며 자신보다도 남을 위하는 마음이 많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결국은 월래가 된사람이었기에 나중에도 훌륭하게 되었다는 말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남원사는 최근 2001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단장하였다. 익산군지 남원사조에는 약 300년 전에 땅에서 부처가 솟아났으며, 2층 석탑이 있어 남원사를 건축하였다고 한다. 처음 지어진 남원사는 오래전에 폐사되고 후에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다. 현재의 주지승은 법명으로 민법계스님이다. 미륵전은 낮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미륵전 안에는 석조미륵불상과 석조좌대, 영산회상도가 있다. 석불좌상은 방형(方形)의 대좌(臺座)에 결가부좌하고 있는데, 두부(頭部)가 결실(缺失)되었던 것을 보수하고 금물을 입힌 후 안치하였다. 석불을 앉힌 대좌는 하대석과 중대석은 있으나 상대석이 없는 대신 판석을 놓았다. 하대석은 두 겹의 연꽃 앙련(仰蓮)으로 연화대 위에 3대의 중대받침을 놓았고, 그 위에 굽형 받침이 있다. 또 중대석은 방형으로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배치하였는데, 앞면에는 안상 내부에 꽃잎 장식을 조각하였다. 좌대의 형태는 고려 중기의 것으로 보인다.
미륵전 앞에는 5층 석탑이 세워져 있으나 전체적으로 파괴가 심해서 상당부분 원형을 잃어버렸다. 지대석도 없고 탑신도 일층 뿐이며, 2층과 3층 탑신은 자연석을 올려놓아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4층과 5층은 둥근 부도(浮屠)모양의 탑신을 하였으며, 상륜부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어찌보면 아무렇게나 쌓은 성의없는 탑이지만, 어떻게보면 자연의 섭리에 따라 편한 데로 생긴 데로 쌓는 것도 하나의 이치라 할 것이다.
다른 사찰 같았더라면 멀리 떨어져있었을 일주문인데, 남원사는 경내가 좁은 탓으로 미륵전 바로 앞에 서있다. 일주문 앞은 민가와 그리고 논이 있어 넓게 자리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얼핏 보아도 쉽게 띄는 것은 커다란 문짝을 여닫을 수 있는 대문이며, 윗문지방 위에 누각이라도 설치한 듯이 높아 보이는 일주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찰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문을 가졌다고 할 정도다. 혹시라도 일주문의 누각에 올라서면 평평한 사방이 다 내려다보일 것이다.
다른 사찰이 깊은 산의 중턱에 있어서 산사에 올라오는 중생을 굽어 살피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낮은 위치인데, 남원사의 일주문이 중생 위에 높게 군림하는 것처럼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모든 중생들이 나처럼 부처의 가르침에 대응하여 필적할만하다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하면 처사는 자신이 보살이라고 믿는다든지, 보살은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자만심에 빠진 것에 주는 일종의 경고와도 같을 것이다.
화두(話頭)가 육신의 재물에 대하여 돌았다. 세상의 물질을 어느 정도 가졌으면 족하지 더 가져서 무엇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사람은 많은 물질을 가져보면 다시 마음이 변하는 것임으로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신다. 스님도 세상 재물에 대하여 욕심이 많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세상 재물에 구걸을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일부러 사찰에 왔으니 결국은 쓸 곳이 없어야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스님은 깨끗하니 이제 내가 깨끗해질 차례 같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마주보고는 있었지만 일주문은 왜 이렇게 높아야만 되느냐고 물었던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항상 겸손하고 항상 자중해야 하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나였다.
어느 순간 스님이 자리를 정리하신다. 벌써 저녁 공양할 시간이 되었나보다. 우리 같았으면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시간을 늦추어야 할 것만 같은데도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마침 나도 다른 곳에 더 가봐야겠기에 자리를 뜨며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문화재 답사를 마치면 책으로 묶어들고 다시 들르겠노라고 한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내용을 정리하다보니 그 전에 보강답사를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에는 무슨 얘기로 화두를 꺼내야 할지, 세상 재물에 대하여는 어떻게 변했는지 미리 생각해서 찾아야 할 것 같다.
2010.12.15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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