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2. 익산연동리 석불좌상 (益山蓮洞里石佛坐像)

꿈꾸는 세상살이 2011. 1. 6. 04:38

62. 익산연동리 석불좌상 (益山蓮洞里石佛坐像)

 

익산연동리석불좌상은 삼기면 연동리 220-2번지 석불사에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국가의 소유이며 돌로 되어 앉아있는 불상 1구를 말한다.

 

삼기면 연동리석불좌상은 신체가 많이 훼손되었다. 땅속에 묻혀있는 석불의 일부가 보임으로 발굴하였는데, 제조된 연도와 관련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대좌(臺座)는 옛 풍모를 역력히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광배에서는 완숙한 경지에 달한 600년대 백제미술품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현재는 석불사의 대웅전에 안치해 놓았다. 이 좌상을 발견하여 문화재로 등록한 후에 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비석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 좌불상을 사찰안으로 모시고 다시 보물 안내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사찰 담장 밖에 설치된 비석 외에 사찰내의 대웅전 좌측에 보물 안내비가 있고, 세월이 지난 뒤에 새로운 보물 안내비를 세우게 되니 모두 합쳐 3개의 보물 안내비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한쪽에 신구비가 조금 떨어져 놓여있다.

 

대웅전의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은 조선의 4대 명필로 원래 중인출신이었으나 글씨는 물론 학문에도 능하여 벼슬도 높았던 사람이다. 그의 서체는 선이 굵고 대담하다. 글자는 반듯하고 치우침이 없으며 여백이 없이 꽉찬 느낌을 준다. 석봉은 여러 사람의 모함을 받고 탄핵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선조의 총애를 받아 곧 복직되기를 반복하였다. 그 이유는 예와 문에 능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문서나 현판을 작성하는 일등을 도맡아 처리하였던 때문이다.

 

석불좌상을 발견한 처음에는 석불과 광배를 보호하는 시멘트 제품의 보호각(保護閣)을 지었으나, 이 각을 곧 해체하는 대신 미륵전이라는 목조금당을 지었었다. 그 과정에서 1989년 10월에 부근을 조사하던 중 백제 무왕대에 지어진 연동리사지(蓮洞里寺址)를 발견하였다. 백제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평기와의 등문양이 대부분 무문이나 단선문 또는 정격자문으로써 6세기 후반의 정암리 와요지에서 나오던 유물과 유사하였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며, 미륵사지의 출토유물과 비교하여 고려시대의 12~13세기 까지는 법등(法燈)을 이어오다가 폐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불상의 높이는 156cm, 좌대는 전면 폭이 225cm, 높이 약 45cm로 하면에는 10cm 가량의 돌대를 두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절단된 것을 근래에 새로 만들어 붙여놓았다. 광배의 좌대 아래에는 가공된 지대석이 둘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석불좌대의 아래에도 이와 같은 지대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주형광배는 머리광배에 백제의 연화문와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16엽 연화문을 두었다. 그 외연에는 넓고 좁은 형태를 반복하는 연화문상의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주위에 6조의 원권문을 돌렸는데, 가장 외연은 수직으로 내려뻗어 신광부(身光部)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신광부에는 수직 돌선의 안쪽에 또 하나의 수직 돌선을 두고, 내부에는 연화문 대좌 위에 화염보주문을 놓은 문양이 좌우에 각각 3개소씩 6개를 배열하고 있다.

 

광배의 전체 높이는 4.48m이며, 삼국시대의 금동 3존불 광배와 직결되는 표현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 있다.

 

몸체의 여러 곳이 떨어져나가고 원형이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인 몸매, 넓은 어깨와 하체는 균형 잡힌 자세를 이룬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무척 얇게 처리하여 신체의 굴곡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듬성듬성한 돌출형의 옷주름 의습(衣褶)은 도안화되어 있고, 굽힌 손가락은 세련되었으나, 두 손과 팔, 각진 무릎 등은 다소 어색한 형상이다. 옷자락은 4각형의 대좌(臺座)에서 내려져서 결가부좌한 양발을 감싸고 있다.

 

왼손은 가슴에서 법의를 가볍게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위에서 법의를 쥐고 있다. 대좌에는 커다란 연화문이 복련으로 조각되어 있고, 현재 가슴부분은 훼손이 심하다. 광배의 두광부는 세 겹의 동심원으로 둘레를 처리하였고, 중앙에 화심이 조각되어 있다. 그 외연에는 화염문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안에는 윤곡선대를 양각하였다. 또 그 안에는 운문과 7구의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어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현재 광배는 거의 완전히 남아있으나, 우측 하단이 부러져서 부분 보수를 하였다.

 

이 불상의 머리 부분이 상실된 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침입해 왔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더 이상 전진 할 수가 없었다. 이 안개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걷히지 않았다. 그러자 왜장은 이것이 필시 이 부근에 있는 이상한 어떤 신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라 하여 부하를 시켜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였더니 정말 다른 이상한 것은 없는데 주변에 이 석불만이 외로이 있다는 보고를 하자 이에 격분한 왜장이 칼로 석불의 목을 쳐서 밭에 버렸다. 그러자 곧 안개가 걷히고 진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석불이 안개를 일으켜 왜군의 진군을 막았던 것이다.

 

삼기면에 있는 석불사는 손바닥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듯 정겨운 사찰이다. 작고 아담한 사찰로 옹기종기 모인 불전과 일주문 등은 마치 잘 정리된 고택, 그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선비의 집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내가 듣는 석불사가 더욱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귀에 익어 온 이름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직 학교에 다니기도 전인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 집에 가끔 놀러오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삼기에 살았는데 황등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알고 보니 석불사 스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아들인지, 어디에 사는지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뒤에도 석불사에 대한 친근감은 계속되었다. 훗날 내가 교회에 나가면서 불상이나 불전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사찰의 주변경치나 건물의 구조 등에 신경을 쓸 때에도 석불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고개를 들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그런 곳에 있었다.

 

그러나 석불사는 산세 좋은 계곡에 있는 그런 절이 아니다. 인가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그런 절도 아니다. 여느 사찰보다도 작지만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시골마을에서 새로 난 신작로의 네거리에 우뚝 서있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생활 속에 종교가 있고, 종교 속에 생활이 있다는 그런 사찰중의 하나다.

2011.01.05  익산투데이 게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