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 五層石塔)
왕궁리오층석탑은 왕궁면 왕궁리 산80-1번지에 있으며, 국가소유인 석탑 1기를 말한다. 불교에서도 부처의 상징인 탑으로 1997년 1월 1일 국보 제289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의 궁궐터로 불리는 왕궁리의 왕궁평성 내에 있는 높이 8.5m의 석탑인데 일명 왕궁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익산읍지’의 ‘금마지(金馬誌)’에서 ‘왕궁탑재궁허전고십장루석완연속전마한시소조(王宮塔在宮墟前高十丈累石宛然俗傳馬韓時所造)’라고 하는 탑이다.
전반적인 탑의 구조는 인근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을 모방하여 단층기단(單層基壇)과 얇고 넓은 옥개석, 그리고 3단의 옥개받침으로 되어있다. 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본모습이 드러났다. 탑 주위에서 ‘상부대관(上部大官)’, ‘제석사(帝釋寺)’ 등의 명문이 찍힌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어느 사찰의 절터인지가 논란되고 있다.
건립연대 또한 불확실하나 백제영역 안에서 후세에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형식에 신라탑형식이 첨가된 고려초기의 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석탑의 해체당시 고려시대 양식의 불상 1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세음응험기가 발견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정확한 문헌에 의해 전해지는 것을 믿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사리함의 양식이 백제의 것이며, 석탑인근의 유물도 백제의 것이라는 점, 석탑지 최하층에서 백제유구가 발견된 점 등을 들어 백제계 석탑이라는 해석도 하고 있다. 그 뒤에 여러 정치적 시대를 거치면서 고려대까지 이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석탑의 중간보수 과정에서 고려시대의 유물들이 첨가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히 존재한다.
호남읍지 익산군 고적조에 보면 후백제 견훤이 있었던 곳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인데, 완산의 형상이 마치 개와 같았기에, 고려태조 왕건은 개의 꼬리에 해당하는 이곳 왕궁리에 석탑을 세움으로써 개의 꼬리를 밟아 잡을 수 있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 탑이 완공되던 날 멀리 떨어진 완산벌은 3일 동안 안개가 끼어 하늘이 어두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5년 11월부터 1966년 5월까지 탑의 해체복원과정 중 1층의 옥개석과 기단부에서 19매의 금제금강경판과 금제사리함, 사리병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당시 해체복원의 총감독은 석공 김천석(金千石)이었는데, 옥개석 이음새에서 천석(千石)이라고 새겨진 꺾쇠를 발견하였다고 하나 근거자료가 없다. 또 탑을 보수하는 도중인 1965년 12월 5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 사이에 금강경판과 사리함, 심초석에서 청동불상 불가삼보(佛家三寶)를 발견하자마자 따뜻하고 쾌청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먹구름과 흙먼지가 일었으나, 유물수습이 끝나자마자 다시 잠잠해졌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이때 발견된 사리호와 2009.01.14 발견된 익산미륵사지 석탑에서의 사리호가 같은 문양이었으며, 제작기법이나 제작솜씨가 거의 동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축조연대가 정확한 미륵사지에 비해 연대가 불분명한 왕궁리오층석탑도 백제 무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설도 제기된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 밑부분에서 목탑의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보다 빠른 시기에 목탑이 있었음이 확인됨으로써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발굴에 의하면, 탑기(塔基) 네 모서리에 8각의 부등변 고주형(不等邊 高柱形) 주춧돌이 놓이고, 이 우주석(隅柱石) 사이에는 길고 큰 돌을 몇 단 쌓아 올렸으며, 우주석이 1층 옥신(屋身)의 우석(隅石)을 받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서 갑석(申石)과 면석(面石)에서 떨어져나간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각 면에 탱주(撑柱) 2개씩이 있는 단층 정4각형 기단임이 밝혀졌다. 이렇게 부서졌기 때문에 일부 기단을 보강하는 한편, 토단(土壇)을 쌓아서 보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탑신부 1층 옥신은 우주가 새겨진 기둥모양의 4우석(隅石)과 탱주가 새겨진 중간석(中間石)으로 되어 8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2층은 4면이 각 면 1개씩이고, 3층 이상은 2개씩의 돌로 되어 각각 우주형(隅柱形)이 표시되어 있다.
옥개석은 매우 넓고 받침과 지붕이 각각 다른 돌로 되어 있다. 받침은 각 층 3단으로 4개씩의 돌로 짜여 있으나 등분되지는 않았다. 뚜껑인 개석(蓋石)은 1층부터 3층까지는 8개의 돌로, 4,5층은 각 4개의 돌로 되어있다.
추녀는 얇고 추녀의 밑은 수평이나, 우각(隅角)에서 가벼운 반전을 보여주는 곳에 밑으로 풍령공(風鈴孔)이 뚫려있다. 옥상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轉角)의 반전곡률(反轉曲率)도 경미한데, 옥신을 받치기 위하여 딴 돌을 끼워 놓았다. 기단에서는 품자형(品字形) 사리공을 가진 정4각형 심초석(芯礎石)이 있었는데, 동쪽 구멍에서는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갖춘 청동여래입상 1구와 청동령 1개가 발견되었다. 북쪽 구멍에서는 향류(香類)가 발견되었으나, 서쪽 구멍은 일찍이 도굴당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석탑을 인근의 미륵사지석탑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오층석탑은 단조롭고 작은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나 각 부재들의 크기도 대조를 이룬다. 특히 1층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문을 만들 규모도 아니다. 낮은 단층기단 양식은 미륵사지석탑과 유사하여 고려초기의 석탑과 다르며, 2층의 탑신은 미륵사지석탑처럼 1층에 비해 너무 낮아 높이감이 거의 없다. 옥개석의 각 층을 3단으로 높게 한 것도 미륵사지석탑의 옥개석과 비슷하며, 수평의 옥개석하면 추녀부가 모서리 전각의 반전과 곡선으로 이어진 듯 보인다. 옥개석은 미륵사지석탑처럼 낙수면이 평박하고 합각이 뚜렷하며 광대하다. 사리호의 문양이나 제조기법, 솜씨 등이 미륵사지석탑의 사리호와 비슷하다. 크기가 크건 작건 차별하지도 않았고, 높이가 높든 낮든 비교하지도 않았기에 탑은 제 목숨을 천년이나 이어왔다. 그러나 탑을 만들고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간데가 없고 새롭기만 하다.
왕궁리5층석탑은 발견된 불상으로 보아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고려시대에 보수하면서 추가한 유물일 수도 있다. 반면에 백제계 목탑의 형식이라든지 인근 미륵사지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과 발견 사리호가 미륵사지석탑의 사리호와 거의 흡사한 점들은 백제의 석탑으로 보는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어린 시절 황등에서 살았던 내가 알고 있던 왕궁은 아득히 먼 시골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왕궁면은 가본 적이 없어도 낯설지 않았고, 어딘지 모르게 따사로운 이미지를 주는 그런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어느 울타리 안에 고립된 느낌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자급자족을 하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그런 인상이었다.
처음 본 왕궁리오층석탑은 넓은 평지에서 조금 높은 구릉 위에 혼자 외로이 서있는 망주석과 같아보였다. 그러나 이 탑은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옛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는 터줏대감이었다. 집주인이 누구냐고 물어도,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어도 아무 대답도 없는, 이름이나 성조차 알려주지 않는 그냥 벙어리수호신이었다.
2010.12.29 익산투데이 게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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