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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리

꿈꾸는 세상살이 2011. 1. 7. 07:38

초파리

창암 한호철

 

“탁! 탁!”

테이블을 치는 소리만 요란하였지 사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깨알보다도 더 작은 초파리들은 형철의 손바닥을 잘도 피해 달아났다.

“톡! 톡!”

플라스틱 자를 들고 때려보아도 결과는 매 한가지였다. 야무진 파리채 하나 없는 그는 매사에 준비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사자가 연약한 모기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초파리가 꼴 보기 싫어 멀쩡한 바나나를 내다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초파리 한 마리가 형철의 콧구멍으로 들어갔다.

‘잘됐다. 너 이놈 죽어봐라!’ 제 놈은 이제 나갈 구멍이 없으니 곧 숨이 막혀 죽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형철은 초파리가 폐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갑자기 전설의 고향에서 미움 받던 고양이가 사람에게 복수를 하던 대목도 떠올랐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는 공무원들이 민원인에게 보복성 법적용을 하였고, 그로 인하여 지탄을 받았다던 기사도 생각났다. 비록 생긴 것은 작아도 온갖 지저분한 곳에서 병균이란 병균은 잔뜩 묻혀왔을 초파리가 그런 보복성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형철은 코맹맹이 소리가 나도록 힘껏 코를 풀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해란이 들어왔다.

“아저씨 뭐해요?”

“응~ 아무 것도 아니야.”

해란은 형철의 손에 들린 휴지를 보더니 자초지종을 알고 싶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민원서류의 오류를 짚어내던 눈빛을 번득였고, 여기저기 냄새까지 맡아보고 나서야 앉았다.

“일찍 왔네? 아무리 빨라도 열두 시는 되어야 올 줄 알았는데.”

“열두 시요? 근무를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럼 근무가 아니야? 정말 어떻게 일찍 온 거야?”

분명히 이번 토요일은 특근이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돌아오면서 근무가 아니라고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형철이었다. 그래도 해란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어제 미리 얘기해두었었거든요.”

“그래? 그것참 다행이네. 그럼 바로 가? 있다 가?”

둘은 오늘 엘마트 푸드코너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맛있는 잡채를 해 먹기로 약속을 하였었다. 그런데 해란이 예상보다 일찍 왔으니 시간계획을 재점검해야 할 판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벌써 손을 잡고 있었다. 마트는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니, 토요일 오전인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다~ 우리 같은 사람들 아니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둬요.”

“그래라. 사람이 많으면 많아서 좋고, 적으면 적어서 좋으니 아무러면 상관이야 있겠나.”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형철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근데 뭐라 말하고 나왔어? 아직 1년도 안 된 사람이.”

형철은 이제 막 들어간 신출내기가 근무를 따돌리고 퇴근을 하였다는 점에서 신기함을 느껴졌던 것이다.

“과장님한테 얘기 했어요. 이사하려면 미리 준비할 것도 있고 사야할 것도 있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아무 것도 안 물어보고 그냥 가라고 해?”

“아저씨! 우리 저쪽으로 가요. 어서요.”

해란은 그 많은 인파속에서 누군가를 보았다는 듯이 방향을 틀었다. 잘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것에서 뭔가 낌새를 챈 형철이었다.

“왜! 누구있어?”

“아저씨, 저기 과장님이 왔어요. 아마 우리를 못 본 것 같아요.”

“그랬구나. 그럼 빨리 돌아서 나가자.”

해란의 입장에서는 과장님을 이런 데서 만난다면 조금은 어색할 만도 하였다. 이런 때는 마치 형철이 무슨 공범이라도 된 양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대방은 이들을 못 본 것 같은 느낌에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다.

굳이 더 살 물건도 없었던 해란은 스파게티를 골라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계산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확인하면서 물건을 세던 해란이었으나, 오늘은 무사통과였다.

“2만 7천 5백 원 나왔습니다. 고객님.”

계산원은 오늘도 똑똑하고 상냥하게 말했지만, 그 말속에는 진정한 친절이 없다고 항상 투덜대던 해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리나케 서명을 하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해란의 시야에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아까부터 해란의 머리핀을 유심히 바라보던 시선과 마주친 것이다.

“어머! 과장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여기서 만나는 군.”

“예, 뭐 좀 살 게 있어서요.”

이제 돌이킬 수 없음을 안 해란은 그냥 당당하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돌한 해란이 이 정도였다면 어색하기는 과장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조건 침착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해란의 신조였지만, 과장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 들통 났을 때처럼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지금의 심정을 보면 자리를 피하고 싶어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음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둘은 간단한 패스트푸드로 점심을 때우기로 한 것도 잊은 채 집을 향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동안 해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과장님이 어떻고 계장님이 어떻고 하면서 한 시도 입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그녀가, 오늘은 아바타의 스위치를 꺼놓았는지 잠잠 모드였다.

이 상황에서 과장님을 탓한다거나 해란을 거드는 어떤 말을 할 형편도 아니었다. 둘이 결혼은 물론이며 동거를 하는 관계도 아닌데다가, 그렇다고 그냥 얹혀사는 사이도 아닌 아주 단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해란과 형철이 만난 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형철이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하였는데, 그것도 근 1년을 쉰 다음이었으니 4년이나 늦게 다니는 셈이었다. 그때 형철은 민중의 지팡이가 민중을 휘젓고 다녀서는 안 된다며, 날파리 같은 인생들을 혼내주기 위해 국가고시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비록 자신의 편에는 아무도 없다하여도 포청천과 같은 명판관이 되고 싶었던 형철이었다. 그럴 즈음 해란은 이리저리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한창 주가를 올리던 모범생이었다.

둘은 성씨가 같아 쉽게 가까워졌고, 해란은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이후로 상종가를 치닫고 있으나, 형철은 아직까지도 공부에만 매달리는 고시준비생이었다. 그 뒤로 해란은 가끔 라면도 끓여먹고, 때로는 술도 한 잔씩 기울이다가 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 해란이 오늘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담배부터 찾아들었다. 형철은 라이터를 꺼내어 담뱃불을 붙여 주었지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배 끊었다더니.”

“몰라서 물어요? 내가 왜 담배를 피는지. 나도 지난주에 담배 끊었었단 말예요.”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더라?”

“몰라요. 그런 거는 알아서 뭐해요?”

해란의 대답은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탁구공마냥 통통 튀고 있었다.

“그랬어~요? 야야! 그런다고 담배가 무슨 상관있냐? 끊었으면 끊은 거지, 왜 피워? 야~ 천하의 오해란이도 별수 없구나.”

“자꾸만 시비 걸 거예요?”

해란의 말투가 도전적으로 변하자 형철 역시 맞받아쳤다.

“그래, 그럴 거다. 그러니 우선 시원한 우유부터 한 잔 마시고 보자.”

형철은 싸울 의사가 없음이 분명하였다. 물론 해란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뭔가 잘해 보자고 하면서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차가운 우유 한 잔의 효험이 나타난 것일까. 해란은 비닐봉지에서 당면을 꺼내들고 싱크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수돗물을 트는가 싶었는데, 바가지에 차고 넘치는 수돗물을 잠그는 것을 잊고 말았다.

“해란아, 정신차려!”

“예? 근데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형철이 내지른 고함소리에 해란이 놀라는 듯하였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우선 피하고 보자는 본능이 작용한 것이었다. 게다가 누구를 닮았는지 동문서답에 엉뚱하기까지 하였다.

“아저씨! 나 사무실에 갔다 올게요.”

“사무실에? 알았어, 갔다 와야지. 그런데 커피는 한 잔 타주고 가면 안 되겠니.”

“커피? 양촌리 커피? 그 정도야 뭐.”

형철의 작전에 말려들었는지 해란이 커피포트를 들고 물을 받으러 가다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야 자신이 수돗물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머머! 내가 왜이래?”

“그 봐라. 뭐든 신경을 써야지, 왜 혼줄을 놓고 있냐?”

의기양양해진 형철은 훈계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사람이 항상 조신하고 조심해야지. 왜 덜렁대고 그래!”

해란이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신에 뭔가를 자랑하는 듯 말했다.

“근데, 아저씨! 나 내일 지방간다!”

“지방출장? 혼자?”

“아니! 나 지방 발령났어. 내가 교환근무 신청했거든.”

“그래? 어디로?”

“고향에 가려고.”

형철은 할 말이 없었다. 내일 간다는 사람이 이제 말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고향에 간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 있어야 더 좋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 순간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면 해란에게 기운을 넣어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 듣고 보니 참 잘한 거 같군. 해란은 예전부터 고향을 많이 그리워했으니까.”

“그런 거 같아 보여요? 사실은 나도 많이 생각했거든요.”

“왜 안 그러겠어. 고향에 가서 일하는 것도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니 여기나 다를 바 없지.”

“알아요. 그런데 저도 여기 생활이 몇 년인데, 정이 들어서 서운하기는 해요.”

이야기가 길어 질까봐 형철이 말을 끊었다.

“그럼 빨리 사무실에 가서 과장님한테 인사하고 와야지.”

“인사요? 어제 다 했는데...”

형철은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볼 심산으로 농담을 만들어냈다.

“그럼 사무실에 가는 이유가 뭐야. 우리 사이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러 가는 거야?”

“누가 그렇대요? 사무실에 가서 퇴근카드 찍어야 하니까 그렇지.”

이제서 해란이 속 있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형철로서는 전혀 뜻밖의 대답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퇴근카드? 아니, 오늘도 찍어? 나는 일찍 퇴근한다고 말하고 나온 줄 알았는데...”

예전부터 경찰들이 나무그늘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다리 밑에서 잠을 잔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또한 공무원들이 근무시간에 자기 볼일을 보면서 업무상 외근이라고 적는 다는 말도 자주 들어왔다. 그래서 새삼스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막상 자신의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참으로 묘한 감정이 일었다.

형철은 이런 사람들을 혼내주겠다고 국가고시를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해란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채 1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가 그렇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오싹해지면서 소름도 돋았다. 형철은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어떤 기운이 솟구쳐 오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럼, 들어가서 퇴근한다고 공개하고 오겠다는 말이지?”

형철은 해란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오래 시간을 끌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과장님은 뭐라고 할까?”

“과장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나하고 같은 입장이니 누가 뭐라 하겠어요?”

해란도 이 국면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형철이 빨리 가라고 등을 떼밀기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괜히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말을 이었다.

“면은 나 올 때까지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둬요. 그리고 커피는 아저씨가 타요.”

“그래 알았어, 어서 갔다 와.”

해란은 어정쩡한 상태로 방을 나섰고, 그런 등 뒤에서 형철이 소리쳤다. 그러나 이런 말이 해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 것을 계장님도 알아? 다른 직원들도 알고?

“...”

“다른 사람들도 아냐고?”

해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형철이 어떤 의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해란이었기 때문이다.

형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모든 것을 까발리고 정의의 깃발을 드높였을 형철이었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제대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피가 끓고 있는 청년이었지만, 막상 그런 일의 당사자가 해란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런 사람을 자기가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도 서글픈 일이었다. 가슴 한 쪽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도 들었다.

남들은 세상살이를 쉽고 편하게도 하더니만, 유독 자신은 혹독한 시련을 겪는 것 같아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라면 처음부터 진리와 정의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항변도 늘어놓았다. 이기주의가 가득한 세상, 오로지 먹고 먹히는 경쟁만이 존재하는 세상, 이런 것이 현실이라면 형철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커피포트의 물로 커피를 타기에는 너무 식어 있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형철은 먹다 만 바나나에 손이 갔다. 그 순간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초파리 떼가 날아갔다.

“아니, 이 녀석들이 잠깐사이 이렇게 늘었네?”

어떻게 알았는지 달콤한 바나나의 진액을 서로 먹겠다고 모인 녀석들이었다. 쫒으면 날아갔다가 다시 와서 앉은 모습은 얄미운 하이에나처럼 보였다. 형철이 즐겨보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초원의 왕이 잡아 놓은 먹이를 빼앗으려던 그 하이에나다. 떼거지로 몰려와서는 쫒으면 물러섰다가, 돌아서면 다시 덤비는 것이 영락없는 하이에나였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이에나를 많은 사람들이 싫어한다. 우선 균형 잡히지 않은 생김새도 그렇지만, 남이 공들여 잡은 먹잇감을 거저 얻으려는 심보가 얄밉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당한 게임이 아니라 일방적인 숫자의 우세를 내세워 덤비는 것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짐승이었다. 그런데 마침 탁자위의 초파리가 하이에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니 해란과 과장님이 떠올랐다. 자기는 한 일도 없으면서 별도의 수당이나 챙기고 남을 감시하는 면에서 하이에나를 닮은 사람들이었다.

형철은 날아가는 초파리들을 향해 허공박수를 쳤다. 한 번 박수를 칠 때마다 두세 마리는 충분히 잡았지만, 이 녀석들을 다 잡으려면 저녁을 굶어도 부족할 판이었다. 그러는 중에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내용을 확인해 보세요.”

힐끗 쳐다보니 해란에게서 온 문자였다. 보나마나 조금 늦는다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덮어두었다. 그럴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잡아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한참 지난 후에 초파리들이 조금 뜸 해지자 문자를 확인해보았다.

“아저씨, 잡채 맛있게 먹어요. 나는 과장님하고 저녁 먹으로 가야돼요.”

시계는 오후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형철이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것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또 잡담이나 하고 있을 해란과 과장님이 시야를 가리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러고도 시민을 위해 일했다고 할 것을 생각하니 형철의 마음이 뒤집어졌다. 지금까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저녁을 먹으로 간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에 첫출근이면 내일은 짐을 싸들고 내려가야 할 테니, 오늘 다시 오기는 이미 틀린 일이었다.

형철의 손바닥은 있는 힘을 다해 초파리를 내리쳤다. 맛있는 바나나를 포기하고서라도 모조리 소탕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연약한 바나나는 형철의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온 테이블 위로 튀어나갔다. 살점이 떨어져나간 바나나 덩이에 초파리의 시체들이 박혀 있었다. 그래도 죽은 것보다 날아간 숫자가 더 많아보였다.

“이것들이 연약한 민초의 진액을 빨아먹다니...”

씻지도 않은 채 전화기를 집어 든 형철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고시준비생으로서 지금 뭔가 한 마디 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되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만 하였다.

“지금은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잠시 후에 다시 걸어주십시오.”

수화기의 똑똑하고 야무진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형철에게서 힘없는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런, 초파리 같은 녀석들! 이것들을 그냥...”

그러나 허공에 맴도는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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