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3. 성당면 은행나무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03:55

 

 
▲ 성당면 은행나무 
성당면 은행나무는 높이가 15m, 둘레가 6m, 수령이 4~500년이나 된 노거수이다. 성황당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줄기의 형태로 보아 온갖 풍상을 견뎌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성당면의 은행나무(聖堂面 銀杏木)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12번지에 있는 은행나무 노거수 1주를 2000년 11월 28일 시도기념물 제109호로 지정하였다. 이 나무는 기획재정부 소유다. 성당포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마을을 지켜주는 성황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현종 3년 1662년 성당포구에 성당창이 설치되면서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漕運船)의 무사항해 및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는 금강 하류를 터전으로 고기잡이를 하던 포구로서,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堂山祭)가 행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은행나무의 수령(壽齡)은 400∼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5m, 가지 둘레 약 6m, 가지 직경은 2m이다. 남북으로 뻗은 잔가지는 18m, 동서로는 16m에 달한다.

성당포구는 예로부터 수로를 이용하여 상권이 발달한 곳이었다. 성당창이 있었던 시절에는 성당포 또는 성포라 불렸었다. 이곳에서는 당시 고산현, 금산군, 남원부를 비롯하여 인근 10여개의 군현에서 세금을 대동미로 납부하여 실어가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머물다 갔던 곳이며, 상주하는 관리들과 더불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13개의 조운창이 있었는데 강원도 1곳, 충청도 3곳, 전라도 6곳, 경상도 2곳, 황해도 1곳이었다. 이때에도 전라도는 만은 세금을 내고 많은 노역을 하던 곳으로 통했는데 당시는 주된 산업이 농업이었기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전라도의 6곳 중에 우리 익산은 포함되지 않았었는데 금강연안 지역에서는 모두 군산으로 가서 운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곳을 살펴보면 부안의 안흥창, 군산의 진성창, 영광의 부용창, 나주의 해릉창, 영암의 장흥창, 순천의 해룡창 등이다. 이처럼 전남에서는 내륙에서도 강을 이용하여 운반하였는데 전북에서는 강을 이용한 운반은 없는 것은 평야지대로 육지 운송도 그리 어렵지 않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성당창에는 5~600백석을 실을 수 있는 조운선이 63척이 있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서는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배가 12척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배들은 성당에서 출발하여 군산항을 거친 후 서울로 향했던 것이다. 이때는 모두 황포돛단배로 바람을 이용하는 기술이 주된 항해술이었던 시절이다.

물론 지금이야 성당창도 없어지고, 성당포구에서 고기잡이를 나가는 사람도 없지만 이 은행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마 돌아올 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무성한 줄기와 함께 아름답고 특이한 모양을 자랑하는 은행나무는 오늘날도 마을의 안녕과 무사함을 기원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는 같은 황룡산 줄기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더 있어 은행나무와 함께 성황당(城隍堂)으로 활용되었었다. 또 느티나무 바로 밑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한풍정(寒風亭)이라는 현판을 가진 정자도 있다. 마을의 언덕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포구는 항상 기다림과 기원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만선으로 돌아온 다음날에는 오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물결처럼 밀려오는 한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망부(望夫)의 눈물받이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순풍당에서 국가의 안녕과 풍어, 그리고 조운선의 무사항해를 기원하던 별신제를 지냈으나, 순풍당이 없어진 후로는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지신밟기와 농악놀이, 당산굿 등이 벌어졌다. 이 느티나무는 황산벌에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한 도승이 요양생활을 하던 중 심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제는 인위적인 개발에 밀려 뱃길이 끊기고 바닷물도 들어오지 않게되자 자연스레 특산물인 황복과 우어가 사라졌고, 지금은 민물고기로 변한 일부 어종만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성당포구의 끝자락인 강변 야산언덕 2천여 평에 고란초(皐蘭草)가 자생하고 있음이 확인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자주 발견되는 고란초자생지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크게 주목받고 있거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된 곳은 없다. 다만 고란초가 고란사에서 처음 발견당시에는 희귀하고 특이하여 신비하고 귀하게 여겨온 데서 비롯된 선입견이 전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孔子)의 인품을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원래 행단은 장자(莊子) 어부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치유(緇惟)의 숲에서 은행나무로 만든 단(壇)에 앉아 쉴 때, 제자들은 독서를 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출발한다. 이후 공자가 유명하여지자 학문의 격이 높고 클 때 공자를 연상하며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여기서 행단고슬(壇杏鼓瑟)이라는 4자성어가 생겨났다. 그 후로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향교와 넋을 기리는 서원에서 은행나무를 심어 그의 인품과 사상을 기리게 되었다.

이렇게 심어진 은행나무는, 눈에 보이는 나무는 분명하였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유교의 상징까지 간직하면서 공자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향교와 서원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 그 역사를 말해준다. 전국적으로는 많은 수의 은행나무가 보호수나 천연기념물 지정되어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숫자는 느티나무 16수에 비하여 은행나무가 21수로 타 수종보다 월등히 많다.

은행나무의 원산지는 중국 남방의 절강성에 있는 천목산(天目山)으로 은행나무가 고생대부터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고생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2억 5천만년 이전에 끝나 사라져버린 시대다. 은행나무가 그때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고유 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은행(銀杏)은 살구와 같은 모양이면서도 색이 하얗다고 하여 은빛 살구라는 뜻으로 백과수라 부르고 ,지금 심으면 손자 대(代)에나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라고도 부른다. 또 잎이 마치 오리의 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자(鴨脚子)라 부르기도 하였지만 이름이 상스럽다고 하여 은행으로 바뀌는 수모도 당했다.

이러한 은행나무는 남송시대(南宋時代:1127~1279)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고, 다시 18세기에는 서양으로 전파되었다가 미국으로 전해졌다. 영국의 큐왕립식물원에는 1762년에 심어진 은행나무가 현존한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3천년된 은행나무가 살아있는가 하면, 우리나라에도 천연기념물 제30호인 경기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가 높이 42m, 뿌리둘레 15.2m에 나이 1100살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은행나무들을 보고 중국의 곽말약(郭沫若:1892~1978)은 ‘동방의 성자(聖者)’라 불러주었다. 이것은 아주 오랫동안 외로이 지내며 수도를 하는 고승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행은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를 약용으로 쓰거나 여러 가지 요리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껍질을 벗겨 부드러운 씨를 말리면 백과(百果)라고 하며 폐와 위를 깨끗하게 하는 약용으로 사용된다. 또 진해(鎭咳)작용과 거담(祛痰)작용에 유용하다. 씨를 둘러싸고 있는 물렁물렁한 과육은 독성이 있어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며 피부 염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은행잎에는 여러 가지 화합물이 들어 있는데, 특히 방충작용을 하는 부틸산이 많이 들어있다. 따라서 은행잎을 책 속에 넣어두면 좀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몇 종의 플라보노이드계(系) 물질은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 나무가 따로 있어 꽃도 따로 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행꽃을 알지 못한다. 이는 잎이 나면서 바로 꽃이 피는 연유로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