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열향교대성전(咸悅鄕校大成殿)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579번지에 함열향교가 있는데, 그중 대성전 1곽에 대하여 1984년 4월 1일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하였다. 이는 향교관리재단의 소유로 되어있는데 전라북도에는 26개의 향교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해온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敎化)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중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더욱 세분화되고 발달하였다. 이는 지방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직접 가르치면서 민중에게 유풍(儒風)을 심어주고 사회적으로는 미풍양속을 고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도덕과 예절을 중시하고 민심을 교화하며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享祀禮), 양로례(養老禮), 계몽강습회(啓蒙講習會) 등을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수령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향약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가르쳤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교육기능은 없어졌다. 지금은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는 제사기능만 남아 있다.
함열향교(咸悅鄕校)는 함라면 함열리에 부지 1,300평으로 함라산을 등지고 동남쪽으로 향하며,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 조선 태종 6년 1406년에 세워졌다는 설도 있고, 세종 19년 1437년에 현재의 용산리(龍山里)인 감물아현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성종 22년 1491년에 명륜당을 신축하였으며, 중종 2년 1507년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향교 전체를 보수하면서 난심재를 지었다고 한다. 선조 24년 1591년에 약 1km떨어진 현재의 금성리인 금곡(金谷)으로 이전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재위: 1724∼1776) 때에 다시 지었다. 그후 순조 31년 1831년에는 현재의 이곳 함라로 다시 옮겨왔다.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1965년에 기와를 다시 잇는 번와(燔瓦)와 단청으로 보수하였고, 1984년에 단청을, 1992년에는 지붕을 보수하였다. 어느 때부터 봉안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공자의 영정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영정(影幀)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온 남궁씨(南宮氏)가 중국에서 모셔온 것이라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원래 가져왔다는 공자의 영정은 없어지고 현재는 복원된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함열향교에 대하여 전하는 문서는 많지 않으나 1914년의 갑인보(甲寅譜), 소화17년 1942년의 유림명부(儒林名簿), 1947년의 청금록(靑襟錄) 등이 있다. 특히 유림명부에는 일제 강점기에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던 유명 인사들이 기록되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대성전의 동쪽에는 정면 2칸의 영소전(靈昭殿)이 있고,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난심재(蘭心齋), 그리고 5칸의 고패집 교직사(敎直舍)가 있다. 대성전과 영소전, 난심재는 각각의 담장을 가지며, 대성전 앞의 내삼문 아래에는 명륜당이 있다. 명륜당은 오른편에 정면 4칸의 동재가, 왼편에는 정면 3칸의 서재가 있다. 명륜당과 동재, 서재는 하나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마당에서 대성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3개로 되어있는데, 대성전 3칸에 맞춰 하나씩 배치되었다. 이곳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4성 즉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와, 송대(宋代) 4현 즉 주자(周子),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희(朱熹)를 배향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18현을 양쪽으로 나누어 동무에는 설총(薛聰), 안향(安珦),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준길(宋浚吉)을, 그리고 서무에는 최치원(崔致遠),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 등을 각각 배향하고 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함열향교의 인근에는 선정비나 불망비가 하나도 없는데, 이는 4개의 비석을 익산향교로 옮겨간 것과, 황등이나 함라, 성당에 각각 하나씩 산재되어있는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입구에는 최근에 세운 하마비가 있고, 오래된 홍살문도 높다랗게 서있다. 홍살문을 이루고 있는 목재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그만 상처를 입었다. 한낱 나무기둥도 저렇듯 오랜 세월을 비바람 맞아가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짧은 일생동안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게만 여겨진다.
함열향교는 함라면 함열리에 위치한 관계로 함라마을 옛담장과 이배원가옥, 김안균가옥, 조해영가옥, 김육불망비와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함라면 소재지에서 올망졸망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았으며, 단지 함열향교만이 150m 거리에 떨어져있다. 따라서 함라에 존재하는 문화재 6종류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열향교의 외삼문은 항상 열려져있다. 어느 누구라도 찾아오는 손님은 막지 않는 다는 태도다. 어느 향교든 마찬가지겠지만 여기도 조용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공자왈 맹자왈하며 글 읽던 소리가 사라진 마당에는 폭염을 이기지 못한 풀이 긴장을 풀고 늘어졌는데, 그 위에 걸터앉은 햇볕은 도무지 떠날 기세가 없다.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잠겨있지만, 대성전에서 난심재와 교직사로 통하는 쪽문이 있어 그곳으로 내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관리인이 살고 있어 출입을 허락받아야 한다. 지금은 반드시 향교에 가서 책을 읽어야하는 불편함도 없어졌거니와, 각 개인의 종교가 다양하다보니 굳이 향교의 제사를 제1로 삼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래서 향교를 돌보지 않는 나의 마음에 다소나마 위안은 된다.
함열향교와 함라마을 옛돌담길 사이에 서벽정터가 있다. 이곳은 1920년대 하당 이집천(1900-1959)이 함열관아터 위 함라산 초입에 지은 별장이다. 당시는 건물3채와 육모정이, 그리고 아름드리 느티나무 10여 그루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고 한다. 뒤에는 높지 않은 산이 안아주고, 앞으로는 마을과 관청 그리고 유명한 삼부자집이 있었으며, 뒤에는 향교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을 것이다. 현재는 별장으로 들어가던 입구에 ‘서벽정’을 알리는 비석만이 남아있다. 이 글씨는 1924년에 ‘오당수화(五堂壽畵)’, 1929년에 ‘서벽정시고(棲碧亭詩稿)’를 지은 주인 이집천이 직접 썼다고 한다. 향교 앞에서 살던 이배원의 장자(長子) 이집천은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쳐 좋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갑자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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