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낭산산성(益山 郎山山城)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48번지에 산성이 있다. 이 지역은 국유로 산성 일대에 대하여 1973년 6월 23일 시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였다. 이 산성은 미륵산 북쪽 약 4㎞ 지점인 낭산리 상랑마을의 해발 162m 낭산(郎山) 정상에 있어 낭산산성이라 부른다. 작게 깬 돌로 쌓은 석성인데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둘레는 약 1,059m 이다.일명 구성(舊城) 또는 북성(北城)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문헌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편 마한성(馬韓城)이라 불리는 것은 익산군지(益山郡誌)에 따라 마한성은 낭산 위에 있으며 둘레는 일천삼백육척이고 높이는 구척이라는 기록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마한시대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다만 성 안에서 백제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후세에 와서는 익산 일대가 마한의 옛 도읍지였다는 점에서 마한성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정식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미륵산성이 기준성으로 불리고, 낭산산성이 마한성으로 불리는 이유는 서로 비슷한 맥락이다. 기준성이라 불리는 것은 기준왕이 금마에 와서 마한을 세우고 성을 쌓았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마한성이라 불리는 것은 어느 왕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한시대에 성을 쌓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이 낭산산성과 관련된 문헌자료는 ‘삼국사기’ 진지왕3년 (578년)조로, ‘신라가 알야산성을 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알야산성은 바로 낭산산성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이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백제시대의 알야산현을 신라 경덕왕 때 개명하여 야사현(也山縣)이라 부르다가 낭산현(郎山縣)이라 부른다’는 내용이 있어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산성의 북쪽은 거의 정상부분에 성벽이 위치하고, 남쪽은 일부 골짜기를 감싸고 있다. 테뫼식 산성으로 익산구지(益山舊誌)에는 석축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쪽부분은 석축의 흔적이 완연하게 드러나나, 북쪽과 동북쪽에서는 흔적이 희미하다. 한편 서쪽에는 석축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기는 하나, 그 위로 흙이 덮혀있어 이곳이 성벽임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성벽은 전형적인 공법으로 판축(版築)을 하고 토루(土壘)를 올렸으며, 경사면은 주로 내탁(內托)을 하였다. 또 평탄면에서는 내외로 겹축한 흔적도 남아있다. 현재 보이는 석축의 높이는 약 2.1m, 폭 2m로 군데군데 발견되고 있다. 성벽은 대부분이 붕괴되었으나 2개소의 수구(水口)가 확인되었다. 동남쪽에는 높이 2.8m, 폭 2.1m, 길이 10m, 남서쪽에는 높이 2.8m, 폭 2.5m, 길이 15m 정도의 성벽이 남아있다.
또한 남쪽과 동쪽 그리고 서쪽의 성문터가 확인되었고, 우물 1곳이 확인되었다. 남쪽에서는 문지에 사용되었을 회전용 주춧돌도 발견되었다. 성의 동남부에는 가로 50m, 세로 60m정도의 평탄한 대지도 있다. 여기에 건축용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해 있어서 유물지였음이 확인되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주민들에 의하면 성내에서 화살촉과 석기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산성의 외곽에서는 토기조각과 무문기와, 선문기와, 격자문과 어골문이 시문된 백제후기대의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다. 이로써 백제후기부터 고려 때까지 사용되었을 산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에는 준왕(箕準王) 즉 기자조선의 무강왕이 노닐던 곳이라고 전하는 석천대(石泉臺)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준왕의 둘째 아들이 바로 한씨로 석왕동 쌍릉의 대왕묘 주인공이라는 학설도 있다.
석천대라 함은 바위틈에서 물이 나는 곳으로, 주변에 집터를 이루거나 일정한 휴식공간을 만든 것을 말한다. 즉 한 마을을 이루었거나 커다란 누각이나 정자가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기준왕의 거처를 비롯하여 작은 집무처를 말할 수도 있다. 여기의 석천대는 무강왕이 쉬면서 여가를 지냈다고 전하는 곳이다. 이런 예는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있을 시에 시를 짓고 여가를 즐겼다는 정읍의 유상대와 유사하다.
낭산면 석천리의 원로들을 만나보면 마을자랑에 침이 마른다. 자기들도 낭산에 올라봤지만 성은 무너지고 흔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석천리에는 아주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보통의 우물이 긴 장대석으로 네 귀를 맞춘 것에 반해 여기는 시멘트로 커다란 사각형관을 만들어놓았다. 이것은 틀을 짜서 우물을 관리하는 것이 최근일이라는 증거다. 깊이는 겨우 5m남짓이지만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우물에 지붕을 하고 담장을 쌓으면서, 언제 새겨놓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석천(石泉)’이라는 표지석은 땅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정말로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석천이 있었던 것이다. 고재석옹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어 그 위를 지나야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위 끝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평탄하게 하였으니, 마을길이 안전해진 반면 더 이상 석천대의 상징인 넓적바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석천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바위를 찾아내어 유산(遺産)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석천리는 마을입구에 ‘석천대’라는 입석(立石)이 서있어 예스러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당시 마한의 위상을 짐작할 만한 곳이 또 하나 있다.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일대의 달궁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다. 달궁은 반야봉과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 등으로 둘려 싸인 계곡이다. 그 옛날 삼한시대에 익산의 왕이 달리 별도의 궁을 세웠다고 하여 달궁이라 불렸고, 정령치에서는 정장군이 황령치에서는 황장군이 이 궁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전하는 전설이지만 개선동이나 황나들이라는 지명이 이들을 뒤받치고 있어 별궁이었을 가능성을 전달해준다. 이 역시 어슴푸레한 궁터를 비롯하여, 역사적 자료가 더 없어지기 전에 발굴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낭산은 아리랑고개를 지나 미륵산 북쪽에서 낭산사거리를 거쳐 채석장앞으로 난 길을 가다보면 오른쪽에 위치한 산이다. 길가에 산성을 알리는 팻말이 있으나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문화재를 알리는 작은 비석과 안내판은 나무와 풀에 가려있다. 산성은 안내비에서 샛길 입구를 따라 올라가지만, 낭산교회의 뒤로 난 등산로로 혹은 상낭마을 경로당에서 올라가는 길과도 만난다.
내가 낭산산성의 입구를 찾아 나선 것도 네 차례나 되었다. 처음에는 시골길을 감상하다가 발견한 15년 전의 일이요, 두 번째는 낭산산성으로 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일부러 확인하러 간 때였다. 이때는 모두 산에 오르지 못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산성에 오르겠다고 다짐만 하던 때였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그런 약속을 쉽게 지켜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0여 년이 지난 2009년 4월에 길을 나섰다. 산이 낮으니 간단히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초여름을 방불케하는 더위에 날을 잘못 잡았다는 후회를 하였었다. 뚜렷한 길도 없는 곳에 칡넝쿨은 우거지고, 가는 곳마다 찔레는 양팔을 뻗어 영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옛길을 더듬어보아도 손에 잡히는 것은 거미줄이며, 쓰러진 나무들은 그곳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듯이 가로막고 있었다.
낭산교회를 지날 때만 해도 기분은 좋았었다. 야산을 일궈 개간한 땅에서는 쑥들이 한바탕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키가 작으면 떡 벌어진 어깨를 뽐내고, 키가 크면 큰대로 일어서서 부채질도 해주었다. 하나가 힘들어하면 하나가 위로하고, 누군가가 지치면 다른 누군가가 거들었다. 그렇다면 내년에는 내 잔치상에 너희들을 초대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눈을 마주쳐 보았다. 그러나 이도 잠시뿐, 작은 밭고랑이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것은 바로 무주공산이었다.
군데군데 물이 흐를 만한 수로가 있으나 산등성이를 가로질렀으니 아마도 해자(垓子)인 듯하다. 그러나 잎이 무성한 잡목은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햇살이 돌틈 속에 박혀 떠날 줄을 모른다. 우거진 숲은 그 옛날의 영화를 버리지 못한 채, 어서 오라는 손짓만 하고 있을 뿐 길을 내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네 번째로 찾은 낭산은 상낭마을 경로당에서 출발하였다. 인근 모정의 작은 사거리가 이정표였다. 마치 삼지창과도 같이 벌어진 중에 가운데 길을 택하여 고샅을 훑어나가니 어느새 산의 초입에 닿는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남문지의 돌더미에 도착하였다. 이 길은 혼자서도 산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외길이었던 것이다.
산성의 남문지에서는 2중으로 된 성벽이 보이고, 바로 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지도 있다. 그러나 후사면의 경사가 급한 것으로 보아 비탈을 깎아낸 곳으로 추정된다. 자료에는 한 군데의 우물지를 지적하였으나 현지에는 물구덩이 두 개가 있어 어느 곳이 오래된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낭산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산, 높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은 산, 그러니 어서 고사리 손을 붙잡고 고사리를 뜯으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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