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6. 학현산성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00

 

 
▲ 학현산성 원경 
멀리서 본 학현산으로 해발 155m의 낮은 산이다. 왕궁면 보석박물관 뒷길로 왕궁저수지를 좌측으로 끼고 돌아야 한다. 산에 오르는 길은 많이 있으나 동쪽 자락은 인근 봉동과 북쪽 기슭은 비봉과도 맞닿아 있다.


학현산은 왕궁면 동용리 산79번지 일대로 보석박물관 뒤에 있는 낮은 산이다. 해발 214m의 주봉과 그 북서를 향해 펼쳐진 경사면을 감고 있는 테머리식 석성(石城)은 학현산성으로 2002년 5월 30일 익산시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동용리 동통마을이며, 성(城)의 평면은 동서로 긴 각진 타원형을 이루면서 서변이 가장 낮은 해발 155m이다. 산의 일부는 완주군 비봉면에 접해있어서 비봉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학현산은 위치상으로 보아 천호산과 산맥을 같이하며, 천호산이 비봉으로 통하는 문드러미재에서 하나는 용화산으로 다른 하나는 학현산으로 뻗어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산은 높지 않으나 산세는 가파르고 능선이 짧아 험한 편이다. 옛 금마도읍지를 중심으로 보면 동편 방어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데, 내성을 먼저 쌓고 외성은 나중에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성은 변형된 사각형으로 완벽한 치수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북쪽변이 199m, 동쪽변이 83m, 남쪽변이 285m, 서쪽변이 119m, 전체 둘레는 686m이다.

기록에 따르면 성의 서쪽에는 거의 평탄한 회랑도(回廊道)를 가지며,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서 차츰 높아져 산 정상을 감싸서 남으로 이어진다. 이 범위 안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지가 있다. 남쪽은 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나 서쪽으로 가면서 차츰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학현산성에 대한 축조와 폐기에 관한 문헌자료가 없으며, 단지 전해오는 바에 의해 삼국시대에 축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하여 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성은 대부분 산탁(山托)을 하였는데, 이는 성의 내부는 경사진 부분에 흙이나 돌을 채워 평탄하게 만들고 외부에는 담벽을 쌓아 수직으로 성벽을 만드는 방식이다. 또 일부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는 산탁을 한 후, 그 평면위에 다시 새로운 성벽을 쌓는 협축(夾築)을 한 곳도 있다. 그 이유는 완만한 경사지에서의 산탁은 성벽의 높이가 높지 않아 적이 올라오기 쉽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곽은 대부분 붕괴되고 북쪽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성벽의 폭은 4m이고 잔존 성벽의 높이는 2m 내외이며, 20cm 내외의 할석을 장방형으로 거칠게 다듬어 평적하고 있다.

주능선과 성곽내부 중간부, 수구지 테라스상의 광장부근에는 약 100여 평의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으며, 주봉에는 붕괴된 석재들이 높게 쌓여있어 장대지(長大地)였을 가능성도 있다. 건물지에서는 백제계의 격자문, 어골문, 집선문계의 등(燈) 문양이 있는 기와들과 함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성내에서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토기와 조선시대의 유물까지도 출토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녹슨 커다란 자물쇠가 발굴된바 있다.

북(北)사면은 무너져 내린 돌들이 계곡을 따라 무려 50m에 널려져 있다. 이 능선은 가팔라서 쉽게 무너져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동(東)사면은 그런대로 성벽의 윤곽을 보여주는데 그 높이가 2m정도로 추정된다. 성벽 밖으로 폭 5m 정도의 공간이 있어 평지를 연상시키며, 이곳에서 보면 성벽이 더 높아보인다. 그래서 이쪽의 성벽은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남쪽으로는 타원형의 좁은 공간에 해당되어 별다른 형상은 없다. 그러나 남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으로 거의 평지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곳에 높이 1m의 돌무더기 몇 개가 있지만, 이것은 옛 성벽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근래들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치성을 드린다고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 경사면은 길도 없는 급경사인데다 나무가 우거져서 확인하지 못했다.

내가 처음 학현산성 답사에 나선 것은 2009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달력으로 보면 아직도 따뜻한 봄날이었지만 실제 기온은 벌써 한여름을 달리고 있었다. 평소 다니던 행동반경의 범위를 벗어난 시골길은 정말 조용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불과 도로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마치 다른 세상인 듯하였다. 등 뒤 보석박물관에는 대형관광버스가 줄을 서고, 시원한 함벽정에는 오붓한 산책객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러나 왕궁저수지를 지나면서는 전봇대에게 길을 물어보고, 날아가는 나비에게 안부를 전해야하는 곳이었다. 저 멀리 길 끝 높은 곳에는 교회가 있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의 길이 없는 곳,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는 길, 정말 천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뿐이었다. 왕궁저수지를 좌측으로 끼고 돌아서서, 한적한 시골의 아스팔트포장도로를 따라 호남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갔던 길은 차츰 산성을 비껴서는 그런 길이었다.

그리고 한 달쯤이나 지났을까. 두 번째 답사 때에는 항공사진으로 도상훈련도 하였었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사진속의 도로는 차량이 다닐 수 없는 길이었고, 걸어야할 등성이는 잡풀이 우거져 분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야 보였지만, 앞을 보면 빽빽한 나무들로 도무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온산을 무작정 헤집고 다니다보면 어디선가는 성의 흔적을 만날 수 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한낮의 날씨로 보나 나의 행장으로 보나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산성을 찾아 들어서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오늘도 이대로 물러서지만 다음에는 학현산성을 잘 아는 누군가를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산행도 혼자서 찾아오고 말았다. 놉을 얻어 같이 갈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고, 어느 세월에 낙엽지고 풀들이 고개 숙이기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마을 이장님과 통화를 한 후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 외딴 폐가에서 출발하였다. 다행히 폐가와 마주하고 있는 집에서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간단한 안내를 받은 나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그러나 부푼 기대는 바로 후회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은 있었지만 그것도 뽕나무아래에서 멈췄고, 이내 칡넝쿨이 길을 가로 막았다. 그러고 보니 아름다운 산딸기 줄기는 두터운 청바지보다도 한 수 위였다. 어쩐지 안내를 하는 사람이 왜 왔느냐고 물어보고, 무엇하러 왔느냐고 자꾸만 물어보는 말에 잠시 신경질이 날 지경이었는데, 그것도 다 나를 위한 걱정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기왕 이렇게 왔으니, 당신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나는 산에 오르고야 말 것이라는 자만심이 나 자신을 부추겼던 탓이었다.

엉켜진 풀을 헤치며 조심스레 걷는 발길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를 긴장시켰었지만 그것은 한낱 밭둑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이것이 성벽의 일부일 수도 있겠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작은 돌로 성을 쌓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우거진 풀섶 사이로 잠깐 돌이 보이면 무작정 달려가서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석성의 흔적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얼마를 헤맸을까. 땀이 비오듯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끝에 매달렸던 현기증이 내려와 아는 체를 한다. 맴맴 소리내어 울어야할 매미는 어찌된 일인지 빙빙돌며 날갯짓을 한다. 파란 하늘이 노래진다. 내가 원하는 성터, 보아서 만족할 만한 성벽을 찾지도 못하였는데 나를 보고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이 일은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들이 고개를 숙인 겨울에 답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실천도 하지 못한 채 봄이 오고 있었다. 다시 4월이 되자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어 등산화를 고쳐 신었다. 이번에는 도상훈련대로 임도를 따라 걸어가는데, 끊어진 도로는 잡목이 무성하고 일부러 묘목을 심은 곳도 있었다. 그래도 아직 나뭇잎이 자라지 않은 산등성이는 붉은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도로를 따라 중간정도를 지나자 그마저 종적을 감춰버린다. 거기에는 새로 이사 온 찔레를 닮은 가시나무가 있는가 하면, 엄나무 사촌인 가시나무도 널려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카시아를 닮은 도둑놈지팡이와 키 작은 오리나무도 보였다. 졸참나무 뒤로 집채만한 바위가 보였었는데, 다가가보니 그것은 우거진 나뭇가지의 그림자였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언제 산위로 옮아왔는지 학현산의 잡나무 숲은 내 눈을 홀리고 있었다. 이리꼬불 저리꼬불하면서 무작정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산죽이 무성한 곳에 돌더미가 보였다. 북쪽 경사면을 뒤덮은 돌들은 강자갈처럼 둥근 것이 아니라, 불쏘시개용 장작과도 같이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할석이었다. 분명 일부러 쌓은 돌들이 틀림없었다.

학현산성은 정상의 9부능선 위에 있었다. 미륵산의 성벽에 길들여있던 나는, 산 아래에서부터 성벽을 찾았던 노력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분명히 테머리식 석성이라고 하였었는데, 비탈 경사진 곳에서 헤매다가 돌아섰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쪽면은 길이 없어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동쪽 경사면에는 성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오솔길도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오가며 감벌도 하고 대나무도 손질하던 그런 길이었다. 이 산길은 남쪽의 완경사를 따라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을에서 쉽게 올라오는 길이 있다는 말인데....나는 학현산성 답사에 나선지 1년만에 그 현장을 확인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문화재에 관한 한 참으로 문외한에 틀림없어 보인다.

잠시 쉬어가라고 연분홍 진달래가 조막만한 손을 내밀었다.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이, 어디에서든지 누구든지 찾기 쉽도록 안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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