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9. 구익옥수리조합사무실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19

69. 구익옥수리조합 사무실 및 창고 

 
전체적인 건물의 평가는 고급스럽고 튼튼하며 환기 등을 고려한 현실적인 감각이 가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화동 54, 56, 56-5번지에 벽돌조 2층 건물이 있다. 전체부지 4,337㎡, 사무실 237.3㎡, 관사 101.7㎡, 창고 59.5㎡로 되어있는 이 건물은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전북농지개량조합의 역사는 1908년 2월 옥구서부수리조합의 창립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에는 임익수리조합과 임익남부수리조합이, 1910년에는 전익수리조합이, 1911년에는 임옥수리조합이 창설되었으며 1920년 2월 5일 이들의 통폐합으로 익옥수리조합이 탄생하였다. 익옥수리조합(益沃水利組合)은 전익수리조합과 임익수리조합, 그리고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조합을 통합한 것이다.

한창 산미증산운동이 불어 닥치자 익옥수리조합은 1920년 완주군 고산면에 대아댐을 착공하여 1923년 6월에 완공하게 된다. 이 대아저수지의 물은 대 간선수로(幹線水路)를 따라 지금의 군산비행장까지 농업용수를 끌어왔고, 농민들에게는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익옥수리조합은 1930년 8월 12일 같은 부지 안에 사무실을 새로 지었다.

1941년에는 전북수리조합이 창설되고 1961년에는 주교, 어우, 비봉, 옥구방조의 4개 조합을 흡수·통합하였으며, 1962년 1월에 전북토지개량조합으로, 1970년 1월에 전북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바뀐다. 한편 전북수리조합의 사무실이 비좁아지자 1971년 평화동 부지 내에 신청사를 건축하기에 이른다. 현재는 1977년 익산시 목천동에 또 다른 대규모 청사를 지어 이전을 한 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최근인 2009년 12월부터는 익산시 문화재단이 발족하면서 빈 사무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현 사무실은 적은 인원이 사용하기에 너무 넓은 감이 있으나, 적당한 사무실이 마련되지 않아 임시로 사용 중이다.

청사의 벽체는 붉은 벽돌을 네델란드식으로 쌓았으며, 세부적인 조적 수법은 매우 뛰어나다. 창호도 오르내리식으로 대단히 길게 만들었으며 인방은 수평아치를 이루고 있다. 창틀 주변은 인조석으로 재료를 대비하여 구성하였고, 꽃잎 모양을 부조형상으로 처리하였다.

돌출된 중앙 현관을 들어서면 전실(前室)이 있고 전실에서 사무실과 이사실, 그리고 응접실로 통하도록 하였다. 정면에서 볼 때 좌측 1층부의 이사실이 현관보다도 더 돌출되어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벽돌의 색깔에서도 확인된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좌측면 중앙에 계단실을 두었으며 한쪽 모서리에 벽을 구획하여 금고로 활용하고 있다. 2층은 사무실과 교환실, 이사실로 활용되었고, 지붕층인 3층에는 아직도 책장 등이 남아있어 문서고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일반 ㅅ자 목조트러스와 달리 맨사드형으로 견고하게 짜여진 쌍대공 꺾임 트러스 위에 아연판을 그물잇기 형태로 덮었다. 지붕부에는 채광과 환기를 위하여 회전창과 박공형의 환기구를 설치하였다. 처마돌림띠는 다섯 켜로 밑에서부터 마구리쌓기, 길이쌓기, 세워쌓기, 길이쌓기, 마구리쌓기로 0.25내어쌓기를 하고 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 먼저 시작하는 계단참까지는 철근콘크리트이며, 계단참에서 남향하여 2층으로 가는 계단은 목조로 되어있다. 난간은 1,2층 모두 목재를 사용하였다. 2층을 지난 계단참에서 3층으로 가는 부분에 판자로 된 여닫이문을 달았다. 3층에서 찬바람이나 더운 바람이 2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목조트러스트 가구법에서 수준 높은 건축기법을 보여 주는데, 건축의장 및 기술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바닥 콘크리트에 대한 공사기록이 ‘조선과 건축’지(1922-45)에 실렸다. 다른 건물에 비교하여 외관의 원형도 잘 남아있는 편이다.

건물 뒤로 돌아가 보아도 특이한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뒷면 우측부분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었으나 메운 것으로 보인다. 이 문의 박공은 붉은 벽돌 길이의 1/4을 내밀어 빗물을 방지하는 턱을 만든 것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현관이 아닌 출입문의 윗부분은 모두 이런 처리를 하였다. 사무실에서 2층으로 올라가던 부분의 외부에서도 문이 있었다가 메운 흔적이 보인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은 1층 사무실을 거치지 않고, 외부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출된 이사실과 현관의 슬라브 지붕 위 난간을 경계석 모양으로 된 돌로 두른 것은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다. 건물 기초부의 하부 보에 돌을 쌓은 것도 보기 드문 예이다.

정면에서 보아 건물의 좌측에는 작은 창고가 있다. 이 창고까지를 포함하여 문화재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창고에는 특이사항이 없고, 문을 달았던 부분의 벽돌 내밀기는 사무실 건물과 다르지 않다. 상부보에 해당하는 부분은 적벽돌을 세워 쌓아 힘을 받도록 하였다. 창고의 앞에는 커다란 히말라야시다가 두 그루 있다. 이들은 커서 아름도 넘고 키는 한 눈에 올려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새로 지은 건물의 난방용 굴뚝이 3층 높이를 넘었었는데, 이 나무의 크기도 3층인 본 건물을 훌쩍 넘어 지붕위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외벽은 붉은 벽돌로 되어있으며, 창문과 창문 사이에 벽돌로 치장쌓기를 한 것이라든지, 테두리보의 벽면도 붉은 벽돌로 쌓은 것 등은 현재 건축기법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지붕에는 환기통이 있고, 빗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경사진 그레이팅을 만들어 놓았다. 테두리보의 외부에 장식된 원형의 꽃받침 무늬는 정교하면서도 일정하게 되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그러나 문양이 동그란 모양이어서 일장기를 연상케 한다.

당시에 이런 건물이 있었다는 것은 주변에 관리해야 할 농지가 많았다는 뜻이고, 또한 많은 소출을 내기 위하여서는 물관리를 잘해야 하였다는 반증이다. 주변에 익산 주현동의 오하시농장과 춘포면의 호소가와농장, 오산면의 후니농장, 김제시 죽산면의 하시모토농장 등이 있었던 것을 보면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도 확실하다. 익옥수리조합의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그만큼 아팠던 역사의 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