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미륵사지석등하대석
동원의 앞에 있었던 석등은 방형 96㎝의 하대석만 남아 있으며, 중앙에 직경 28㎝, 깊이 12㎝의 간공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중앙의 석등은 조금 크고, 좌우 동서원의 석등은 약간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원과 중원, 그리고 서원 중에서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이 동원의 석등대좌이다. |
금마면 기양리 71-7번지와 95-1번지에 국가소유의 석등 좌대 두 기가 있는데, 1999년 4월 23일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사지석등하대석은 미륵사지의 동원 탑지와 금당지 사이의 남북 중심축에 자리하고, 금당지에서 남쪽으로 14m 이격된 거리에 있었다. 처음 발견 당시에 경작토층의 물속에 장기간 잠겨 있어 표면이 일부 떨어져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전반적인 보존 형태는 양호한 편이다. 지금은 하대석의 패인 곳에 물이 고여 부식될 우려가 있어 투명한 유리로 뚜껑을 달아놓았다.
미륵사지는 넓은 경내를 가지고 있어 어디에 어떤 유물이 남아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석등하대석은 부피가 작은데다가 높이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므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 유물이다. 혹시나 한눈을 팔다보면 걸려 넘어질 위험도 따른다.
등은 어둠을 밝히는 조명기구로서, 불교에서 석등을 만든 것은 부처의 진리를 비쳐주고 모든 중생을 선한 길로 인도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미륵사지 석등은 원래 탑과 금당의 중간에 배치되어 3개가 있었는데, 발굴조사과정에서 2기만 확인되었으며 화사석(火舍石) 3개가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전시되고 있다. 1기는 동쪽의 석탑과 법당터 사이에 있고, 다른 1기는 중앙의 목탑터와 법당터 사이에 있다.
보통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두는데, 이 석등은 3단의 받침돌 중 아래받침돌까지만 남아있다.
중원(中院)의 석등은 하대석과 옥개석이 남아 있는데, 하대석은 지복석 위에 놓여있으며 105㎝의 방형이다. 하대석의 상면에는 8엽의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직경 34㎝, 깊이 18㎝의 간공이 있다. 옥개석은 상하 2단으로 되었는데 상부는 2매로 나뉘어져 있고, 상하단 모두 8각형으로 만들었으며 하부가 127㎝ 내외정도이다.
중원 석등에서 또 하나 주시할 부분은 하대석과 상대석 사이에 전형적인 백제연화문이 조각되어있으며, 옥개석은 2장으로 되어있어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있다. 둘레에는 돌을 정연하게 깔았으며, 석등 앞에는 향로나 제상(祭床)등을 놓고 공양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동원(東院)의 석등은 하대석만 남아 있으며, 지복석(地伏石) 위에 놓여진 하대석은 96㎝의 방형석이다. 상면 중앙에 직경 28㎝, 깊이 12㎝의 간공이 있으며 8엽의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중앙의 석등은 조금 크고, 좌우 동서원의 석등은 약간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원과 중원, 그리고 서원 중에서 가장 상태가 양호한 것이 동원의 석등대좌이다.
서원의 석등은 그 자리에 흔적만 남아있고 유물은 발견되지 않은 실정이다. 동쪽에 있는 하대석의 꽃잎 끝이 좀 더 위로 말려 있을 뿐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맨 윗면에는 윗돌을 꽂기 위한 둥근 홈이 나 있다. 지대석은 1변이 136cm, 두께 10cm 이상이다. 동원과 중원의 석등 하대석은 간주석(竿柱石), 상대석(上臺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屋蓋石), 보주(寶珠) 등이 모두 유실되었고 하대석(下臺石)만 남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석등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빨라 한국석등의 시원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등은 아주 많은 숫자가 문화재로 등록되었지만, 석등하대석의 경우는 익산의 미륵사지석등하대석을 제외하면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하대석의 복연은 백제말기 연화문 수막새의 무늬와 같은 양식으로 백제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더구나 발견당시의 위치로 보아 미륵사지 석등하대석이 백제 무왕 때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990년대 초의 미륵사지는 제대로 발굴되지 못했으며, 잡초가 우거지고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풀밭이었다. 아이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따라다니거나, 운동화를 벗어들고 메뚜기를 잡기 바쁜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렇다고 야산이나 동산처럼 굴곡지고 나무가 엉켜있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기둥을 받친 돌들이 나뒹굴었고, 축대를 쌓은 돌은 어디에 있었는지 구분도 되지 않았었다. 그때의 석등하대석은 어쩌면 작은 소꿉놀이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석등하대석은 백제 무왕이 밝힌 등불을 잃어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그것은 자기 잘못도 아니었건만, 무엇이 죄스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 긴 세월을 논 속에 묻혀 지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내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 나보다도 나아 보인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석등을 다시 켤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홍수 난 물속에서도 견뎌왔고, 차가운 얼음 속에서도 버텨왔나 보다.
그러면 이 좋은 시절에야 더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지 않는가. 꿋꿋이 버텨왔으니 편히 쉬라고 위로하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비록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도 있지 않을 것인가.
행여 그날이 아주 멀다고 하더라도, 여태껏 지나온 세월만큼만 더 있어주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마운 석등하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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