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68. 주현동구일본인대교농장사무실

꿈꾸는 세상살이 2011. 5. 4. 20:13

68. 주현동구일본인대교농장사무실

 

 
▲ 오하시농장 쌀창고 정면 
대교농장에서 거둔 쌀을 보관하던 창고건물이다. 중앙부는 2층 높이이고 좌우측의 회랑부는 1층 높이로 기와지붕을 하였다. 당시는 지금보다 단위수확량이 적었을 것인데도 최근 우리네 농협창고만큼이나 큰 쌀 창고를 지었으니 마음이 무겁다.

주현동 105-9번지에 41.32㎡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이 있는데, 이는 추본기의 소유로 2005년 11월 11일 근대등록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대교농장의 사무실이었는데, 대교농장은 1907년 9월 대교여시(大橋與市)에 의해 개설된 농장이다

강점기인 1912년 토지조사령이 내려지면서 일본인들은 국가소유나 미개간지를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토지를 기반으로 대규모농장을 만들었다. 1904년 설립된 익산의 호소가와농장(細川農場), 1903년 설립된 옥구의 구마모토농장(熊本農場)과 함께, 1907년 설립된 익산의 오하시농장(大橋農場)은 1908년에 이미 1,000ha 이상을 소유한 농장 그룹에 합류하였다.

그러다가 한일합방 이후 1926년에는 김제 죽산의 교본농장, 김제 광활의 다목농장, 김제 광활의 아부농장, 도내 각처에 농지를 가진 우근농장, 김제 청하의 승부농장, 정읍 태인의 정목농장 등 1,000ha 이상의 농지를 지닌 농장은 9개로 확대된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도 1,000ha 이상을 소유한 농장주는 9명, 북해도에서도 13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우리 전북에서의 토지 수탈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러한 농장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하여 군산항을 개설하고, 전주와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게 된다. 이것이 총 연장 46.7km의 전주 군산간 도로인데, 1907년 공사를 시작하여 1년 6개월 만에 개통하게 된다. 1912년에는 호남선 철도를 개통하고, 1913년에 바로 군산선 철도를 완공할 정도로 중요한 교통망을 형성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동원 가용한 인력이나 장비로서는 가히 놀랄만한 일이다. 그런 후 군산항에서의 쌀 수출량은 전국의 25%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부산 다음으로 많은 양이었다.

대교농장은 1914년 익산시 남부시장에 사무소를 건축하고, 1928년 당시 1,300여 정보의 논을 소유하였다. 익산시의 전신인 이리시의 구도심 대부분은 대교농장 소유의 토지였다고 보아야 한다.

호남보고(湖南寶庫) 이리안내(裡里案內)에 의하면 1915년 당시 전북에 40여 개의 농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대교농장의 주임은 전중덕태랑(田中德太郞)이었는데 그로 인해 사세가 더욱 확장되었다고 하였다.

1928년에는 275만원의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농장주로 대교여시(大橋與市)가 등장한다. 그리고 농과대학을 나온 그의 딸이 상무로 재직하였다. 당시 익산지역에는 1,000ha 이상의 농지를 가진 농장이 3곳이 있었다. 춘포면의 세천(細川) 직영농장(1,397ha)과 오산면의 불이흥업(不二興業)주식회사(1,418ha), 익산 주현동의 대교농장(1,300ha)이 그것이다.

대교농장 부지에는 사무실이 있었던 것과 같이하여, 호남지역 최대의 쌀 창고도 있었다. 옛 사무실은 2층 건물로 일본식 모습을 하고 있다. 재료는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벽체의 1층 부분은 나무판자를 덧대어 비늘벽으로 처리한 것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2층에 해당하는 부분의 외벽은 골진 함석으로 덧대었는데 나중에 관리 목적상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내부에 들어가 보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없다. 이는 내부의 벽을 보완하면서 막아버린 것으로, 학생들 실습교실로 사용 중이다. 따라서 이 건물의 앞에는 새로 지어 행정실과 교실로 사용 중인 학교의 본관건물이 있다.

옛 농장의 사무실은 화교학교 사무실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북쪽은 다른 사람의 소유 건물이 붙어있고 뒤편은 공지로 비어있다. 남쪽은 학교의 본관사무실, 서쪽에도 새로 지은 부속사가 있는데 이 세 건물은 복도를 통해서 드나들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네 모서리각이 위에서 하나로 만나는 우진각(遇陣角)지붕으로 일식기와를 올렸다. 현재 망와에는 일식문양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진각의 용마루는 기와 10장을 엎어놓아 당시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용머리는 대교를 상징하는 양각을 넣어 특별 주문한 제품으로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관계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2005년도에도 내부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사무실의 서측에 별도로 있는 2층의 기다란 목조건물은 본래 대교농장의 창고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칸을 나누어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었다. 남북을 축으로 하는 건물은 서쪽은 ㅅ자 지붕으로 이어 내려갔으나, 동쪽은 중간 정도에서 높이를 한번 낮춰 처마처럼 달아낸 것이 회랑과도 같은 건물이다.

옛 쌀창고였던 건물은 지금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화교학교의 운동장가로 담장이 쳐져있어서 시야를 가리기는 해도 흔적은 여전하다. 쌀가마를 높이 쌓아야하기 때문에 천정이 높은 것이라든지, 오랜 보관으로 쌀이 눅눅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환기장치 등은 당시의 규모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대로 수탈의 아픔을 막아주는 담장이 되어 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농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당해서였는지, 익산지역의 3·1운동은 교통이 편리한 시장입구의 대교농장의 사무실 바로 앞에서 시작되었다. 우연찮게도 주현동 105-19번지에 ‘순국열사비’가 있으니 대교농장 사무실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옛 사무실이었던 화교학교와 쌀창고였던 주택은 예전의 지적번지 주소에서 만세길이라는 도로명주소로 바뀌었으나, 다시 2009년도에 중앙로4길이라는 도로명주소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교학교가 중앙로4길, 옆의 주택은 인북로10길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으니 혼란스럽다.

순국열사비(殉國烈士碑)는 1919년 4월 4일 이리장날의 만세운동 도중에 순국한 열사들의 넋을 기리는 비이다. 이 비문은 이승만대통령이 썼고, 1949년 4월 29일 시민의 뜻을 모아 그 안타까운 사건의 현장 익산시 주현동 105-19번지에 세우게 된다. 그러나 친일세력이었던 이승만대통령이 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이름자가 새겨진 부분을 뭉개버려 훼손된 채로 전하여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떵떵거리며 말 많은 친일파를 다 어쩌지 못하면서 말없는 추모비의 글자에 대하여는 엄격한 우리의 현실을 본다. 금마면 용순리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사용하라고 1천석의 재산을 모아준 이재환, 우이현, 안종운 등은 1920년 항일단체인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였다가 같은 해 12월에 강경에서 체포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홍순갑이 귀국하여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1922년 왜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3년 만주의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였고, 1929년 초 신민부산하 고려국민당 중앙검사부 집행위원으로서 군자금 모집차 입국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은 갖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29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이밖에도 왕궁면출신의 송영식과 주비단장이었던 소진형, 금마면출신으로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김화곤, 흑백당사건의 홍건표 등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애국지사의 추모비와 수탈의 현장이 같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다. 무조건 부수고 분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의무이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치우고 바꾸는 욕구해소의 대상은 아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