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80. 익산 백제토기도요지(益山 百濟土器陶窯址)

꿈꾸는 세상살이 2011. 6. 13. 10:19

익산 백제토기도요지(益山 百濟土器陶窯址)

3000년 세월의 흔적 익산의 문화재를 찾아서(80)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넓은 입 항아리, 가는 목 항아리, 3발 토기, 굽다리 접시, 뚜껑, 개배 등이 있다.

금마면 신용리 산92-2번지에 있는 가마터로 토기를 굽던 도요지를 말한다. 백제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군부대 내에 위치하며 익산시 소유인 가마터 일대를 1973년 7월 9일 시도기념물 제14호로 지정하였다.

이곳은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미륵사지동편 해발 15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 주민에 의해 토기편이 신고 된 이후 백제토기도요지로 확인되었다. 당시 위치가 군부대의 내부에 있던 관계로 조사가 어렵다가, 1987년 2월 9일부터 3월 16일까지 전주국립박물관에 의해 정식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가마터는 미륵산동편의 해발 150m 지점 경사면에 11m의 간격을 두고 2기가 발굴되었다. 이 가마는 6세기 중반경에 해당하는 것으로, 반원형의 천장이 위로 향하면서 경사를 이루는 굴가마 즉 다른 말로 등요(登窯)형식이며, 뱀 머리의 평면을 가진 반지하식으로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백제 토기의 특색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출토된 유물들은 넓은 입 항아리, 가는 목 항아리, 3발 토기, 굽다리 접시, 뚜껑과 개배(蓋杯) 등이 있다.

1호 가마는 아래쪽에서 경사면을 굴광하다가 요상부분에서는 굴을 뚫은 반지하식구조다. 화구(火丘)의 폭은 1.6m, 화구 입구에서 안쪽으로 약 2.5m 지점부터는 아치형태가 남아있는 소성실에 이른다. 요의 최대 폭은 3m이며, 측벽의 높이는 90cm이다.

2호 가마도 반지하식인 것은 동일한데 전체 길이가 11m, 최대 폭은 3.2m, 중앙 천정의 높이는 2m, 양 측벽의 높이는 1.7m, 소성실의 길이는 5.5m, 화구 폭은 1.8m에 달한다. 이러한 형식의 요지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스에키(須惠器)의 원류가 백제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설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토유물로는 입이 큰항아리인 광구호(廣口壺), 항아리(甕), 세발토기 등으로, 부근에 있는 익산토성의 발굴에서도 비슷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출토유물을 살펴보면 6세기 중후반경의 백제토기도요지로 판단된다.

현재 이 백제토기도요지는 발굴 후 다시 매립하였기에 겉으로 나타나는 원형은 보존되어있지 않으며, 군부대 내에 위치하여 출입 또한 통제되고 있다.

이곳에 가려면 금마에서 낭산으로 가로질러 넘어가는 소도로를 따라 아리랑고개의 9부 능선에서 찾아야 한다. 아리랑고개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갈라놓는 고개이다. 고개의 좌측으로 있는 미륵산은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을 두었고, 또 하나 군부대의 훈련장으로 가는 길을 두고 있다. 백제토기도요지는 가는 탐방길은 훈련장으로 가는 곳에서 시작된다. 특별히 통제된 곳으로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는 곳이지만, 부대의 훈련이 없는 날은 정식 허가를 받고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위는 온통 숲이 우거지고 길도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찾아가는 것은 쉽지가 않다. 나도 수차례 탐방에 나섰지만 이런 곳은 낙엽진 겨울에 떠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흙을 구워 만드는 그릇으로 흔히 말하기를 도자기라 하면 일반적으로 백자와 청자를 연상한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청자가, 조선시대에 백자가 발달하여 유명하였던 기록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좀 더 세분하면 흙으로 구운 것을 모두 도자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일반 흙으로 거칠게 반죽하여 빚은 것을 도기라 하며 낮은 온도에서 막 구워 흙의 성질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여 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재료에 백색의 고령토 성분이 많이 함유된 흙을 사용하여 곱게 반죽하고 잘 빚어서 만든 것을 자기(磁器)라 부르며, 몸체에 생긴 공기구멍의 정도에 따라 유약을 바르기도 하고 바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기에서 더 나아가 약 1,200℃의 높은 온도로 연소되어 용화(熔化), 즉 유리처럼 물을 침투시키지 않는 상태로 소성(燒成)된 도기를 석기라 부르고, 작은 입자인데다가 곱게 반죽하였기 때문에 공기구멍이 거의 없어 유약을 바지 않았다. 그러나 치장용이거나 특별한 경우에는 유약을 바르기도 하는데, 납유약, 소금유약, 장석유약 등 3가지를 사용한다. 특히 아름답고 화려한 석기를 만들기 위하여 심홍색 자줏빛으로 두껍고 농도 짙은 연보라빛 청색 장석유약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청자와 백자는 석기의 일종으로 청색유약과 투명한 유약을 발라 만든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그러나 제작과정이 같은 것은 아니며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색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제작 연대별로 유행하던 문화에 따라 제작기법이나 색상, 유약, 문양, 형태 등이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중국제품과 우리나라제품에 있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청자를 빚는 유약은 녹색, 올리브색, 청색, 회색 등이 사용되었으나 이들이 완성된 후에도 같은 색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백자는 투명한 유약을 사용하면서도 온도나 흙의 조건에 따라 회백(灰白), 유백(乳白), 설백(雪白), 청백(靑白) 등이 나타났고, 특히 우명한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 기법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에까지 공법이 전파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도자기로 유명한 곳으로는 경기도 이천이나 여주가 있지만, 예전에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로 유명했던 곳은 따로 있었다. 고려청자로 보면 전남 강진요와 전북 부안요가 유명하였고, 조선백자로는 경기 광주요가 유명하였다. 그런데 이 광주는 경기도 이천과 인접한 곳이며, 이 지방들은 모두 자기를 만드는데 아주 적합한 토질인 것이 그 요인이다. 이곳은 각각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지로 등록되어있다.

익산에 전하는 도요지는 백제토기 도요지를 비롯하여, 금마 미륵사지의 기와를 굽던 가마터, 왕궁 왕궁리유적지에 사용하기 위하여 기와를 굽던 가마터가 있다. 이중 둘은 세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나, 당시 많은 기와의 소요라는 여건상 현지에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흔적으로 밝혀진 것들이다.

우리가 흔히 가마터나 가마를 말하면 불가마로 달궈진 찜질방을 생각하고, 숯을 굽는 숯가마를 연상한다. 요즘 지자체나 특정 단체에서 체험학습으로 많이 제공되는 부분이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거기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잔불로 3초삼겹살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가면서까지 홍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마의 원조는 도기를 굽는 도요지가 우선이고, 숯을 굽는 가마가 다음이다. 숯을 만드는 기술도 어렵지만 도기를 굽는 기술은 더 어렵다. 먼저 도기를 빚는 과정도 그렇거니와 적정한 온도를 적당한 시간동안 달궈야 하는 작업은 직접경험에 의하여만 전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무를 모두 겸비하고 오랜 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기에 힘들고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다. 간장독 하나에 5만원이라는 값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라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흙을 거르고 반죽하여 빚는 과정과,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에 비하면 아직도 무척 싼 가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가 뭐래도 흙을 불에 달궈 구워내는 과정은 예술 그 자체다. 그러나 불가마에 의해 도기를 굽는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현재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내 일이 천직이라는 사명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지금은 편리한 세상이라서 소품제작용 도요지정도는 운반이 가능한 작은 기계로 만들어 파는 현실이다. 나무를 때서 온도를 높이는 대신 전기를 이용하여 일정시간동안 일정온도를 유지하기도 하고, 편리한 시간에 편리한 온도를 맞추는 기계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에 의해 굽는 도기와 참나무를 이용하여 굽는 흙가마의 도기는 다른 차이를 지닌다. 몇날 며칠 달궈졌던 흙가마를 헐고 도기를 꺼내면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깨어버리던 도공들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불가마와 전기(電氣)가마는 그 시작부터가 다른 것임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