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30년 전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사장이 나에게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다보면 지금 당장해야 더 많은 이득이 되는데 행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선보고 중조치 후행정처리를 하라고 하였다. 풀어보자면 우선 급한 일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하고 그의 처분을 기다린다. 그러나 신속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담당자는 공정한 원칙에 입각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다. 그러다보면 뒤늦게라도 서류절차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계획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보고를 한 후 결재를 기다리다 못해 중조치한 내용과 후에 결정된 최종결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누가 어떤 책임을 지어야 할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당시 사장은, 그와 더불어 자신이 조치한 내용과 나중에 결정 난 행정처리 내용이 상이할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담당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강조하였었다. 자신도 구매책임자로 있을 당시 제품 개발일정에 맞춰 부품을 구입하고 조립하여 납품을 하여야 하는데, 행정처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였다. 그때 자신은 결재가 나기 전에 부품을 구입하였고, 나중에 나올 결과가 그 부품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부품 값을 변상해주겠다는 각오로 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배운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20년 전 공장에서 고장 난 전기 보수공사를 하면서 예상 업체와 소요금액을 서류로 보고하였다. 그러자 긴급 사안에 대하여 상급자가 구두로 허락을 하였고, 나는 업체를 불러 휴가기간 동안에 보수공사를 신속히 마무리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서류결재가 난 것은 내가 보고한 내용과 달라져 있었다. 공장 내 전기 전문가가 그 금액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사를 할 수 있다는 보고를 함으로써 내가 잘못 판단한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불거진 절감예상금액 100만원은 업체선정 담당과장이었던 내가 채워줌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그 후 나는 전기담당자에게 어떤 계산으로 그런 금액이 나왔는지 확인해보았다. 결과적으로 공장 직원들인 전기팀이 직접 공사를 할 경우는 인건비가 이미 월 급여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 만큼을 공제하였다는 것이었다. 최소한 3명이 며칠을 해야 하는 공사에서 어떤 방법이든 인건비를 제외하고 예상가를 비교하는 것은 옳은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은 외주업체가 하였으며 생색은 전기담당자가 챙기고, 돈은 계약담당자가 변상한 공사였었다.
우리는 이렇듯 책임과 권한에 관해서는 냉정하고 철저하게 배워왔다. 그런데 요즘 세태의 책임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느낀다.
우리 군에서 이틀이 멀다하고 총기사고나 자살사건이 발생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부대의 총책임자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대체 무슨 방법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답은 간단하였다. 자신이 사직서를 쓰고 물러가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살을 하였는데, 총기로 사람이 죽었는데, 군의 기강이 해이되고 도덕성이 무너졌는데 책임지는 방법이 자신이 옷을 벗는 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책임지는 방법일까.
내가 생각하는 책임방법론으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시켜놓고, 해이된 군 기강과 위계질서를 바로 잡은 다음에 사직서를 쓰는 것만이 답이었다.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우리나라 검찰의 수장이 책임을 지겠다고 하였었다. 그 이유로는 검찰의 부도덕한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검찰의 특정 기소사항에 대해 국민들이 느끼는 불공정 사항에 대하여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니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책임방법은 그렇게 해결될 사안이 아니었다. 진정한 책임이라면 국민에 대한 검찰의 도덕성을 회복시키는 일이며, 어느 사안이라도 공정한 기소권을 적용한다는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므로 그런 후에 사직을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었다.
어느 지자체에서 부실공사를 하여 그의 복구비용으로 재정적인 손해를 입었을 때 관련 담당자기 책임을 지고 사표를 쓰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책임을 지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변상하고, 보수 공사로 인해 발생하는 시민들의 불편함과 실추된 시민들의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할 것이며, 따져보아 잘못이 드러날 경우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상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사직을 하는 것은 옳은 책임이 아니다.
공무원들은 사직서를 내면 그 전에 발생한 비리나 잘못에 대하여 일부는 용인해주는 내규와 관습법이 있는 듯하다. 사직서를 쓰기 이전에 발생한 것이니 공무원이 아닌 신분에 소급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일사부재리나 일사부재의의 원칙과도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금도 면책특권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책임진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세상의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행동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책임을 빙자한 면피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그것을 잘 못 이해하고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 국민들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다. 국민은 국민의 의무를 다 하면서, 공직자나 지도자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관대한지 모르겠다. 공직자는 위장전입을 해도 당시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며, 국민은 당시 정황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모르고 한 행위로 법을 어겼다면 그것도 법을 어긴 것은 어긴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불공정 게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직자나 지도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책임도 다하지 못하면서 국민에게 군림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내 것들 > 산문, 수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깃집을 하면서 마른 (0) | 2013.08.09 |
---|---|
걸어서 운동하고 택시타고 오는 (0) | 2013.08.09 |
역사는 어디까지 알아야 하나 (0) | 2012.11.14 |
예술을 아는 고장 (0) | 2012.11.14 |
글로벌과 사대주의 사이 (0) | 2012.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