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간
예전에는 토사가 많이 쌓이지 않아 내륙 깊이 배가 들어왔던 시절이 있다. 황등에도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 있는데 이름하여 도선이다. 도선은 당시 이름으로 뱃나들이다. 예전에는 황등호를 건너가려면 그 곳에서 배를 타고 나갔다는 곳이다. 그러나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포구가 아니라 먼 길을 돌아가지 않으려는 뱃길이었던 것이다. 황등호는 익산시내와 황등의 중간에 있는 들판에 농업용수를 대주던 저수지다.
이곳을 잠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크나 큰 황등호를 중심으로 하여 황등과 서수, 오산, 임피 등의 논에 용수를 공급하는 저수지였다. 이 저수지는 매우 커서 조선시대에 국내 3대 저수지로 통할 정도였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황등리 도선과 옛 북일동이면서 현재는 신용동 원광보건대학교의 북쪽인 도치마을, 동쪽으로는 임상동의 임상리와 삼성동의 일부까지가 물에 잠기는 거대한 저수지였다. 그런데 이 저수지가 물이 마르기 시작한 때는 저 위에 완주군 경천면의 경천저수지가 생기면서부터다. 강점기 시절에 경천저수지를 만들어 완주와 익산의 삼례 일부에 물을 공급하게 되었는데, 이때 위에서 자연적으로 내려오던 하천물이 경천저수지에 고이게 되자 이와 반대로 황등호에는 수량이 부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자연스럽게 황등호를 매워 농지로 만드니 지금의 독수문이 있는 곳부터 시작하여 임상동과 도선을 잇는 농토가 생기게 되었다. 지금 잘 살펴보면 다른 농지와 달리 전체적으로 조금 낮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황등호 제방이 지금은 자동차로 달리는 도로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허리다리는 요교로 당시 수문이 있던 곳으로 짐작하고 있다. 물론 당시는 둑이 있어도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뿐이었으나, 콘크리트나 돌보다는 흙으로만 쌓았을 것이니 둑 위가 제법 넓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옛 문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간혹 발견되는 부분적인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다.
이때 황등호의 이남은 호남지방이 되었다는 설도 이유가 있는 설명이다. 따지고 보면 황등호가 있는 곳이 전라도의 위쪽인 북쪽이니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다.
이런 도선에 살던 친구들은 장대식을 비롯하여 규형이와 재철이, 그리고 봉순이와 창래가 있었다. 이때의 재철이는 학교만 같이 다녔을 뿐이지 사실은 이름도 그냥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훨씬 많은 형이었다. 이 마을 역시 황등의 석재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일부는 석재관련 일들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식이 역시 일을 하다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아 한때 고난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 뒤에 서울에서 작은 공장을 한다고 들려왔고, 급기야는 재혼을 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래서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결혼식에 초청하니 올 사람은 미리 신청하라고 하였다. 결혼식을 하는데 동창들이 무슨 신청을 하고 승낙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결혼하는 상대자는 유명 연예인이라서 결혼식 하객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니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장대식은 평소 그런 분야에 관심도 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분야에서 일한 적도 없었으니 참으로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전해들은 말로는 누군가가 장대식을 소개시켰다고 하였다. 돌려 말하면 장대식은 누군가가 유명 연예인에게 소개시킬 만큼 행동이 남달라 보였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아니 우리가 알고 있던 대식이는 그런 쪽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었을 것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의 대식이는 조금은 수줍은 듯도 하였었다. 키도 보통은 되었지만 큰 편에는 속하지 못하였으며, 그렇다고 활달한 성격도 아니었다.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었으며 반이나 학교에서 하는 운동에서도 돋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냥 보통의 시골아이들과 같은 상태였으나, 훗날 성인이 되어서 그렇게 변한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접촉을 해 본 결과로는 대식이가 우선 조용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도 항상 나대며 큰 소리로 좌중을 휘어잡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설명하며 웃는 모습은 상대방에게 호감이 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여 무슨 일을 하겠다고 정하면 그 일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지만 자신 나름으로는 심사숙고하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여 내린 결론일 것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중에는 정말로 내가 놀랄만한 일도 목격하였다. 무슨 일을 하면서 혹은 어디로 가면서도 항상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고 일을 상의하고 확인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나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하여 집행하여왔다. 그런 중에 바쁘지 않고 덜 중요한 일은 항상 나중에 만나서 몰아서 처리하자는 주의였다. 그런데 장대식은 아주 사소한 일을 확인하면서 중간 중간 격려와 독촉을 이어간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낯이 간지러울 정도로 확인하며 애정공세를 펼칠 때는 차마 곁에서 들어줄 수가 없는 상황까지도 일어났었다. 그 말을 듣는 나로서는 나는 저렇게 하지 않았는데, 남자도 저렇게까지 해야 되는 것일까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서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대식이가 어떤 행동을 하였기에 대한민국에서 다 아는 유명 연예인을 소개받았는지 나는 짐작도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기에는 그래도 소개시켜 주어도 될 만은 하니까 소개시켜 주지 않았을까 생각은 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 면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나의 성격이 하루아침에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변명을 하자면 그렇게 쉽게 변하면 사람의 성격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순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사람이 사는 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상해야 좋은 지 무뚝뚝해야 좋은지. 세밀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참여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맡겨두고 지켜봐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어떤 것 하나를 골라 이게 맞다고 할 수는 없음을 잘 안다.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상황에 맞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 정석임도 알고 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 혹은 어떤 한 쪽으로 치우쳐서 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옳은 행동은 아니었음은 누구나 다 안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보다가 패널티 킥을 왜 저렇게 찼을까, 기왕 찰 거면 들어가든지 말든지 골키퍼가 없는 저쪽으로 찰 것이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면 절반의 성공이지 않을까. 아무리 잘 차는 선수라도 키퍼가 있는 곳으로 차게 되면 그 중 절반은 막히게 된다. 따라서 각각 절반의 확률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기왕에 막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차면 들어갈 확률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처럼 어떤 결정을 하든지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할 것이라면 기왕에 좋은 쪽으로 결정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말하자면 자상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는 것이 무뚝뚝하고 자유방임형보다는 더 좋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아무리 잘 해도 모두를 만족할 만큼 잘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조건에서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대식이를 생각해본다. 대식이도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서는 잘못했다고 비난을 받거나 불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는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고, 그를 잘 실행하는 결단력이 있다는 점은 높이 사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가 서울시펜싱협회장을 맡았던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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