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느 지역이건 지명 중에 신기리가 있는가 하면, 최소한 신기마을은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존 마을에 비해 나중에 생긴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새터민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기는 새로 만들어진 마을로 우리말로 하면 새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 정착한 이주민이거나 피난 때 정착한 사람들이 이룬 마을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김종완이도 황등리의 새터에 산다. 그런데 그 새터가 언제 생겼는지는 나로서는 알지 그런 새터에 종완이가 언제부터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말하는 이것들이 종완이를 알고 있는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예전에 우리가 자랄 때에는 자연과 더불어 노는 그런 놀이가 성행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람이 세게 부는 겨울에는 연날리기가 있었고, 볕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개울에서 물장구치며 노는 것을 들 수 있다. 추운 날에는 대체로 활동량이 많은 운동으로 몸을 녹이며, 더운 날에는 비교적 조용하게 지내는 놀이가 많았었다. 예를 들어 딱지치기, 자치기, 못치기, 엿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와 같은 놀이는 활동량이 많은 편에 속한다. 또 남자들이 좋아하는 썰매타기, 굴렁쇠굴리기, 숨바꼭질 등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놀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여자들이 즐겼던 놀이로는 풀각시놀이, 공기놀이, 풀싸움, 소꿉놀이, 실뜨기, 승경도놀이 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한 곳에서 많이 움직이지 않는 놀이에 속한다. 물론 여자라고 하여도 그네타기, 널뛰기, 고무줄놀이 혹은 팔방놀이처럼 뛰고 걷는 놀이도 많이 있기는 하다.
이런 놀이들은 현재의 게임방이나 컴퓨터 프로그램에 빠져 몸은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움직이는 그런 놀이와는 다르다. 좁은 공간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넓은 공간을 활용하면서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이루어지는 놀이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예전의 놀이는 넘어지고 자빠져서 깨어지는 상처의 연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의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보내고 학원이 끝나면 개별 과외를 시켜야 하는 부모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놀이들이었다. 게다가 놀다가 다치는 것이란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들릴 것이다. 실제로 자치기를 하다가 남의 된장독을 깨는 것이나, 숨바꼭질을 하다가 화장실에 빠지는 것 등도 가끔 일어나던 풍경이었다. 심하면 쥐불놀이를 하다가 남의 짚더미를 태워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일도 있었다.
김종완이도 나와 같은 세대로서 이런 놀이들을 하면서 자라왔다. 그러는 중 수많은 상처가 났어도 변변한 연고 한 번 바르지 않은 채 다 견뎌냈다. 그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상처가 치유되었다. 남들이 다 그렇게그렇게 살아왔는데, 종완이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로 남았다.
동네에서 아이들과 함께 못치기를 하던 중 못에 눈이 찔려 단 한 번의 실수로 실명을 하고 만 것이다. 남들도 다 하는 놀이를 하다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또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아이들이 놀다가 보면 작은 상처야 생길 수도 있는 것인데 그것을 두고 시댁부모 혹은 친정부모가 아이를 잘못 보아서 그렇다고 훈계를 하는 요즘 세대라면 어떠했겠는가. 내가 보아도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에 비하여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종완이도 어렸을 적에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표현이 적어지더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까이서 종완이를 보아 온 친구들은 그럴수록 일부러 불러내어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종완이도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였으며 신앙생활도 열정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종완이는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키가 작고 몸매도 동글동글하다. 말하자면 잘 생긴 몸매가 아니다. 그런데 종완이가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게 느끼는 바이다. 누가 말리는 사람은 없건만 자신이 자리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래서야 어디 사회생활이라도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심히 그를 지켜보노라면 보통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사회생활은 잘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종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종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본인 스스로가 잘 어울리지 않는 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은 타인과 더불어 살지 않아도 혼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는 종완이는 타인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 마음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며, 실제로 행동도 그렇게 하는 아주 보기 드문 모범 시민에 속한다.
어느 날, 한동안 보이지 않던 종완이가 웃으며 나타났다. 그런 종완이를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종완이는 크게 웃으면서 ‘좋은 일이야 만들면 있지’라고 대답하였다. 좋은 일은 자기가 만들어야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종완이는 그랬다. 신장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는 사람의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한쪽 신장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한쪽 눈이 실명이면서 신장마저 제공한 사람이다. 그것도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에게, 옛날처럼 돈을 만들기 위한 장기매매도 아니고 순수한 기증이었다. 우리는 이런 종완이를 보면서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어떤 말로 위로를 하거나 칭찬을 하여도 가슴 속 허한 종완이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곧 죽어간다는 사람에게 자신의 장기를 떼어 줄 수 있었는지,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파본 사람만이 안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후, 얼마간 쉬던 종완이가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어찌 되었든 특수 전문직에는 종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성실함도 보였다.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한지 석 달이 되었을까, 뜻하지 않게 다리를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했다. 이일을 두고 우리는 종완이를 놀려댔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면 너에게도 좋은 일이 와야 하는데, 아직 좋은 일이 오지 않은 것을 보면 네가 좋은 일을 더 해야 한다는 가보다고 말했다. 심한 말에 듣기 거북한 말을 하였지만 종완이는 모두 받아 넘기며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다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는 김종완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종완이가 하루 빨리 나아서 예전처럼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원하였다.
상당 시간이 지난 후, 종완이가 퇴원은 하였으나 아직 후유증도 남아있고 재활치료도 해야 하므로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한 것은 뻔한 내용이다. 다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형편이었는데, 다치고 나서는 생활이 더 팍팍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더 복을 받아야 하는 데, 어찌하여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가 하는 원망의 마음도 들었다.
그런 종완이가 노래 부르듯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지 사람이 돼지나 개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사랍답게 사는 것, 그것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종완이처럼 남에게 장기를 떼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모 잃은 아이들을 거둬 먹여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종완이만 알 것 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를 종완이가 주관식으로 냈으니 그것이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 나도 좋아야지만 남도 좋아야 한다는 마음, 소수의 특권보다는 여러 사람이 좋아야 한다는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김종완이었다.
그런 종완이는 우리 몰래 또 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우리가 어떻게 막거나 물릴 수도 없었겠지만, 좋은 일이라면 꼭꼭 숨겨 남이 모르게 한다는 데에 종완이의 매력이 있었다.
‘사후 신체기증 서약’.
내가 죽은 후에 혹시 내 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거든 가져다 사용하라는 서약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 신체가 부패되어 망가지기 전에 빨리 가져가라는 것이다. 살아서는 신장기증, 죽어서는 신체기증.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만이라도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우리는 종완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정작 종완이의 키가 작으니 우러러 볼 수는 없지만 각자의 마음속으로는 우러러 보고 있었다. 종완이가 남에게 이런 배려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종완이에게 어떤 배려를 하였는가 생각해보면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음에 미안해진다. 위에서 말한 대로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복을 받고 좋아져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도록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무슨 말로 변명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나서도 김종완은 일을 찾아 나섰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새로 얻은 직장에서 뜻하지 않게 이번에는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어서 빨리 낫기를 바란다고 위로하는 우리들에게 농담을 던졌다. 긴긴날 병원에 갇힌 종완이는 그래도 할 말이 남아 있었나보다. ‘그래야지, 지금처럼 아프기만 하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줄 멀쩡한 신체가 하나도 없게 생겼다’고 말했다. 내가 주기로 했으니 잘 사용하다가 넘겨주어야 하는데, 어쩌다 다쳐 가지고 기증 받을 사람에게 나쁜 신체를 인계할까봐 미안하다는 그 마음씨가 아름답지 아니한가.
정말 종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한 눈이 실명에다가 신장 하나가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을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사람으로 태어나 돼지나 개처럼 살아야 하겠느냐고 충고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친구가 내가 아는 친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어쩌면 내가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내 대신 해준 것을 대리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대리만족 시켜줄 친구가 있다는 것도 하나의 행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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