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미소 짓던
예전 우리들이 말하는 같은 마을은 앞뒤로 다섯 집 혹은 열 집 정도의 거리를 두고 무리를 지어 모여 있는 경우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집들이 연이어 있다거나 계속하여 도로를 따라 붙어있는 경우에는 자주 어울리는 집까지를 같은 마을로 쳐주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행정구역상 같은 마을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것이 맞으니, 조금 멀거나 가깝거나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진복이와 우리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논이 가로놓여 있어 마치 다른 마을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예전에 이처럼 논을 사이에 두고 돌아다녀야 했던 집들이 제법 있었다. 이런 경우는 집에서 나오는 물이 논으로 흘러들어가서 거름이 많아지고 벼의 생육도 좋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모를 내거나 추수를 하거나 할 적에도 가까워서 좋은 점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논을 천수답이라 하지만 우리는 군논이라 불렀다. 물론 멀리 다른 마을이 있고 그 중간에 넓은 들이 놓여있는 전형적인 경우는 별도로 하고 말이다.
군논은 굳이 따지면 군불과 마찬가지로 없어도 되는, 그러나 있으면 요긴한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니 집을 지어도 좋은데 거기에 논을 만들었으니 덤으로 생긴 논이라는 뜻으로 군논이라 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진복이는 같은 마을이면서도 우리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어디를 놀러 가려해도 어차피 논을 건너야 하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자기가 놀고 싶은 곳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진복은 학교에 가는 길에서는 자주 만나서 갔었다. 당시 해향단이라는 것이 있어서 같은 마을의 학생들은 모두 모여 한줄로 서서 등교를 하던 그런 규율이 있었다.
애향단은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이지만, 당시 사회상으로 보아 반공방첩에 대한 준비교육이며 새마을운동을 하기 위한 바람몰이 혹은 돌격대성 교육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진복이는 우리 마을 아이들과는 노는 시간이 적었고, 그럼으로 인하여 평소에도 말이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진학을 하면서 서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어느 날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날을 때에도 진복이는 말수가 적었었다. 그러나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골라 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기분 나쁠 말은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하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모습은 예전의 진복이와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긴 이름을 바꾸기 전 예전의 진복이는 우리들에게 진용이로 불렸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진용이와 훗날의 진복이가 서로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진복이는 시내에서 작은 전업사를 운영하였다. 무슨 모임을 하더라도 전업사 사무실에서 모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전업사라는 것이 크게 벌여 넓은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꺼려하지 않았다. 우선 별도로 비용이 들어가는 식당이나 찻집을 가지 않아도 좋았으며, 일단 모이면 조금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하며 함께하는 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주인인 진복이가 마다하면 전업사에서 모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식구들이 반대를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또 밖에서 만나든지 아니면 야외로 나가는 경우에는 항상 사전 답사를 하여 행사 당일에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진복이는 이렇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은 내가 불편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반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시내에서 다시 황등으로 이사를 하였다. 고향을 찾은 것도 기쁜 일에 속할 것이지만, 그보다도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뵐 수 있고, 형제들과 항상 만날 수 있는 그런 면이 더 좋았다던 진복이었다. 그렇게 이사를 하면 시골의 저렴한 토지를 이용하여 좀 더 넓게 그리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우리도 그런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진복이가 이사 간 집은 여러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던 집이었다. 마당이 있어 개가 뛰놀며, 뒤안이 있어 장독대가 있는 그런 집이었다. 거실은 넓어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도 넉넉한 하였으며, 방마다 설치한 고정식 옷장은 거추장스럽게 가구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설계하였다. 이런 집은 나이 50살이 넘은 요즘 우리 쉰 세대들이 꿈꾸는 그런 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복이네 집을 부러워하였었다.
사람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기본 도리인 줄은 알지만 요즘 세태가 그렇고 각자가 하는 직업상 다 그렇게는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어느 누가 잘 모시고 어느 누가 잘 못 모시고 하는 말로 평가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진복이도 부모님을 직접 모시고 살지는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가까워진 진짜 고향에서 부모님을 뵙고 달려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정말 그랬었다. 다시 서울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기공사업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전기공의 임율이 높아 일당이 센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다. 전기를 만지면 자칫하여 감전의 위험이 따르며, 혹 감전사고를 당하여 몸에 이상이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학교 1년 선배도 전신주 작업을 하다가 감전되는 바람에 떨어져서 사망한 경우가 있었다. 또 평지에서 그런 일을 당해도 세포가 죽어서 불구의 몸이 되는 수도 가끔 목격한다. 이러니 전기공의 임금이 높은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진복이가 서울로 이사를 간 것은 뭔가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끝을 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굳이 서울까지 이사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하던 사업이 잘 안 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었다. 그때만 해도 진복이는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그런 언행을 하였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코가 석자라서 자신이 어떻게 주체하지 못할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긍정적인 말로 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고향에 자주 왔다는 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힘들어도 내색을 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처리해가던 일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지금쯤은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하고 있으리라 믿어본다. 사람이 하던 일을 죽을 때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한데,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끝까지 해나가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환경변화에 따라 휘둘리고 당시 조건에 따라 이익과 손해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진복이도 자기가 하던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끝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이 또 다른 일에 대한 준비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며 새 출발했기를 바란다.
잔잔한 미소로 대하던 그 당시의 진복이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할텐데... 나이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의 결과가 자신의 얼굴에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자신이 살아온 과정대로 자신의 얼굴에 묻어난다는 것이다. 나도 내 얼굴에 책임져야 할텐데...진복이가 내 인생에 각성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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