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산삼을 캐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05

산삼을 캐는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아무리 시골에 있는 초등학교라 하더라도, 2000명도 넘어 인근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다니던 해에 7반까지 있었으며 한 학급당 50명 혹은 60명이었으니 어림 계산으로도 그런 계산이 나온다. 그 후로 관내에 다른 초등학교를 만들고 지역별로 학생을 나누어 모집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자라서 별의 별 직업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중에서 산삼을 캐는 사람도 있다. 황등리에 사는 최성룡은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하였지만 좀 특이한 직업을 들자면 산삼을 캐는 일에도 관여하였다는 것이다.

성룡이는 덩치도 크고 힘도 좋지만 산을 타는 동작은 날렵하다고 할 정도로 일가견이 있는 친구다. 예전에 강천산으로 춘계 단합대회를 갔었던 적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산삼 한 뿌리를 캐왔던 실력자다. 우리야 손에 쥐어주면서 이게 바로 산삼이라도 하여도 잎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많은 풀 중에서 쉽게 구별해내는 것은 참으로 용한 재주에 속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전문 직업가와 여벌로 따라다니는 손님의 차이일 것이다.

듣자하니 그렇게 하여 캐낸 산삼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부러워서 물어보면 어떤 것은 식구들이 먹기도 하였지만 어떤 것은 술병에 넣어 약으로 쓰일 산삼주를 담기도 하였단다. 그러나 술로 담근 산삼주가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하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산삼이 비싼 것은 확실하니 산삼주는 더 비쌀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싸게 구입하여 허약한 애들 엄마에게 먹이고도 싶었지만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말도 못 꺼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성룡이는 통도 크게 행동하였다. 우선 떡두꺼비 같은 손이 그렇고 행동도 야무지게 하는 편이었다. 차도 비싼 고급차만 타고 다니며 어떤 때는 최고급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주위의 시선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언감생심이었고, 심사가 뒤틀려서 곰곰 생각해보면 이렇게 비싼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이니 그것으로 인한 수입도 많아서 그럴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산삼을 캔다는 사실을 아는 동창들 중 일부는 정말 특별한 곳에 선물할 일이 있다거나 꼭 필요한 경우에는 일정한 금액을 주고 사간다는 말도 들었다. 그럴 때에도 사가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나에게 부럽기는 마찬가지여서 질투가 나는 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애써 외면하거나 일부러 피해 다니기도 하였다면 뭐라고 말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동창 중 한 명이 폐암에 걸려 사경을 해매고 있었다. 이때 여러 친구들이 각자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도움을 주었으며, 특효가 있다는 민방약을 구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은 정성과 기도로 위로하고 격려하였던 것이다. 이때 성룡이는 산삼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들렸다. 도움을 주었다면 얼마나 큰 물건으로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나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데에 마치 내가 무슨 큰일이라도 한 양 공감이 갔었다. 그런데 사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서로 나누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요 세상의 이치라면 너무나 욕심 어린 소망일까.

그 후에 나는 성룡이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매주 내가 연재하고 있는 지방신문에 났던 기사로써, 산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진열된 산삼이 담긴 병과 산삼뿌리가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형편이 곤란하여 제 값을 치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나누어 주는 도움도 주었다니 그런 면에서는 성룡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주 내용은 이 부분이다. 물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베풀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나누어 준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성룡이는 타고 다니던 최고급 오토바이를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각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옆에서 보는 나로서는 그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것은 순전히 계산된 영업 전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알리면서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세운 영업 전략이라면 어느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일이 사회의 통념에 반하는 일도 아니며 기업윤리를 져버리는 일도 아닌 다음에야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룡이는 내가 사는 마을의 옆 동네에 산다. 그러나 직업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보니 자주 어울리지는 못한다. 때문에 성룡이의 성격을 내가 잘 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은 행동으로 해석해보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겉모습하고는 다소간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그리고 아무 때나 똑같이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처해진 환경에 따라 그리고 당시 여건에 따라 나의 능력에 한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룡이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사람은 열 번을 변한다고 하였다. 그만큼 상황이 다르게 변할 때마다 행동도 다르게 변한다는 말이며, 처해진 환경에 변화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 몇 번이나 변했을까. 그러면 나는 이제 몇 번을 더 변할 수 있을까. 내가 성룡이가 베풀었던 것처럼 남에게 베풀 수 있을까. 나에게 더 많은 물질적 축복이 있다고 한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은 남을 돕는데 물질이 많다고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가수 김장훈은 자신의 수입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 액수만큼을 계산하여 미리 돕고, 다음에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정작 자신의 집이 없어 전셋집에서 산다고 하였다. 계산해 보면 그의 나이가 벌써 40이 넘었다. 그가 얼마나 더 남을 도울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가 해온 행동으로 보아 나이가 더 많아져도 어느 정도의 수입이 발생하면 계속하여 도울 것이라는 추측은 해본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우리에게 보여 준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로 인하여 다음 일을 예측하게 한다.


성룡이가 다음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은 열 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소간 그리고 얼마간은 남을 돕는 일도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우리는 성룡이를 다시 생각해줘야 한다. 그때는 마치 김장훈처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보다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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