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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대신 몽골이라 불리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08

이름 대신 몽골이라 불리는


그가 몽골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한 언제부터 그렇게 불려진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생김새로 보아 살은 오동통하지만 뚱뚱하지 않고, 쌀가루를 몽글게 만들어 빚은 송편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조복순은 키도 크고 항상 웃는 표정에다가 얼굴마저 고와서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경제적 여건도 충분하여 어디 나무랄 데가 없는 부류 중 한 사람에 속했다. 거기에다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누가 뭐라고 할까봐 공부마저 잘하니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었다. 단 한 가지 흠을 잡자면 보통의 그런 애들이 그렇듯이 과격하거나 혹은 지구력이 필요하다거나, 또는 체력소모가 많은 운동을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게 불리는 이름의 몽골은 지리부도에 나와 있는 국가의 명칭인 몽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몽실몽실한 느낌을 주는 그러면서 어딘지 모르게 연약하게 느껴지는 이름의 몽골로 붙여진 의태어 별명인 것이다. 그런데 여느 별명에 비하여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의미의 별명보다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대부분의 별명은 그의 생김새를 놀리거나 그의 태도를 조롱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좀 색다른 별명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지 조복순을 몽골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상대방 모두를 가리지 않고 부담 없이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몽골은 복순이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몽골이 동창 모임에 다녀 간지는 언제인지 그 시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참석한 동창 모임이라면 보다 적은 수가 모이는 반창회였던 것 같다.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시피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는 남녀 각 3학급과 마지막 학급인 7반의 남녀공학반이 있었다. 그 남녀 공학반에 몽골이 들어있었고 이 글의 주인공 중 상당수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들리는 말로는 공부를 못하고 말썽만 피우는 애들을 모아 한 반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6학년 7반이었다거나, 사는 지역이 멀어서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빨리 재촉하는 애들만 모아 놓았다는 소문도 무성했었다. 그래서였을까. 7반에 모인 아이들은 자기가 속한 반에 대하여 별로 좋은 인상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해주기 보다 약간은 서로를 경계하며 내외하듯 일정한 거리를 두는 느낌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철부지인 초등학교 6학년으로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또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학생 수를 학급 수로 나누다 보니 남은 남녀를 합쳐야 겨우 한 반이 되는 상황이 되어 편성된 학급이었던 것이다. 모든 학생들이 이런 사실을 알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것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반전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7반에 들어갈 수 있느냐, 아니면 어떻게 하여야 7반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느냐 하는 말들도 들려왔다. 이런 상황들이 모두 지나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5학년까지 서로 남녀를 분반하였다가 마지막 학년인 6학년에 와서 합반을 하였다는 것이 부정적 효과보다는 긍정적 효과가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뭔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었으며, 학급 생활을 포함하여 공부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몽골이 다녀간 얼마 후에 생각해보니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보는 데도 당시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활동반경이 좁았으나 하는 일은 항상 야무지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남아있었다.

달라진 점을 억지로 찾자면 당시의 몽골이 가진 모습에서 이제는 약간 야윈 듯하여 어쩌면 안몽골이라 불러야할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정도이다. 요즘 화두가 군살빼기이며 건강한 체력으로 사는 날까지는 아프지 말고 팔팔하게 살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이다. 그런 참에 살이 조금 빠졌다면 오히려 그것 역시 시대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아 칭찬할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당시 복순이는 여린 젖살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져서 탱살만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복순이는 살을 빼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런 몽골이 고향에 들렀다. 몽골이 우리와 친선 사절을 맺은 것도 아니고 국교 정상회담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옛 고향 시골에 몽골이 나타난 것이다. 힘들게 찾아 왔다가 겨우 저녁 밥 한 그릇을 먹고는 돌아 갈 700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허위허위 달려온 것이다. 하긴 그렇게 먼 길을 왔으니 고향 집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이라도 유하고 가리라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분들도 모두 고향을 떠나서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신다고 하니 그것이 문제였다. 물론 친척들이 계시기는 하지만 모두가 장성하여 각자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처지에 생각대로 찾아갈 편한 일도 아닌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전에도 자주 고향을 찾았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대답은 간결하였다. 부모님이 안 계신 고향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로 그저 말뿐인 고향이었다고 하였다. 객지에 나가 산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신에게 제2의 고향이라 불러야할 곳이 바로 생활터전이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정이 들면 모두가 고향이라던 말도 생각나고, 사실 한 곳에 정착하여 살다보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논리도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몽골에게 여러 친구들이 몽골을 보고 싶어 하니 고향에 잠시 다녀갈 수가 없겠느냐고 물었을 때 단 숨에 달려온 그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비록 전체가 모이는 동창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더라도 남녀가 한 반에서 공부하던 7반의 반창회에는 참석을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이익만 쫒는 그런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조복순이 행하던 일련의 행동들을 되짚어보면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뭔가가 확실하고 내 인생에 있어 보장 받는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흔쾌히 승낙하고 달려 온 그의 성의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릴 적 철부지 우정이 길고 긴 인생역정을 돌아서 죽을 때까지 보상 받고도 남을 만큼의 어떤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먼 길을 찾아와준 정성이 반가웠다. 그렇다고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모두 만나 본 것도 아니었다. 각자가 자신의 환경에 따라 다른 곳에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날 한 시에 다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몽골은 많은 친구들을 만나 본 것도 아니면서 바로 돌아서는 것이 아쉬운 듯, 길게 펼쳐진 추억의 꼬투리를 한 자락 휘어감아 내려놓고 갔다. 다음 모임 때도 반드시 불러 달라고, 다음에는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볼 수 있도록 수고해 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견 생각하면 자기가 해도 될 일을 꼭 남한테 시켜서 해 달라는 것인가 할 수도 있겠으나,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입장에서 볼 때 기댈 곳은 바로 고향이었다. 고향이 아름다운 풍경을 하고 있지 못해도, 고향에는 풍성한 산물이 없어도, 고향에는 많은 친구들이 남아있지 않아도 고향은 고향인 것이었다. 그런 고향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연민의 정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그런 고향을 잊지 않으려고 끈으로 묶어두기도 한다. 조복순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현 시대의 우리가 몽고반점이라는 문신을 떼어 낼 수 없는 것처럼, 몽골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우정을 간직하고 있는 몽골이, 다만 먼 곳에 있다는 이유로 고향의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면서 떠나는 모습은 한편 측은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친구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하는 측은지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하였다.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창창하여 닥친 환경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래도 고향을 멀리하고 친구들을 떠난 객지에서 혼자 추억을 더듬는 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래도 우리는 고향에 남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아주 작은 겨우 동창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자리라 하여도 말이다. 편승하여 남이 만들어 준 자리에서라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참석하고 싶어도 불러주지 않으니 입장권을 사서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엄연한 자격이 있으면 이 사람이 주선하였든 저 사람이 주선하였든 한 자리에 모여 공감대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름 좋을 것이다.

다음에 꼭 불러달라는 말, 그러면 꼭 찾아오겠다는 말이 정겹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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