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가 우선이라는
아파트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였다. 거기에는 초등학교 동창인 원순복이 있었다. 순복이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다를 사람들보다는 좀 더 친분이 있다면 친분이 있는 그런 사이에 속했다. 반가운 마음에 뒤따라오는 차를 미처 생각하지도 않은 채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어 아는 채를 하였다. 차를 세운 후 백미러를 보니 마침 그곳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곳이라 뒤따라오는 차량이 없었으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두세 명에 지나지 않는 한적한 정류장이었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니 하나같이 등산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보통의 등산객들이라면 이제 막 하산을 하여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오후 시간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미륵산에 간다고 하였다.
미륵산이라면 익산 시민이 즐겨 찾는 산이다. 이 산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도 않는다. 거기다가 시내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오가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는 좋은 산이다. 그러기에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모두 찾아다니는 산이다. 익산에 사는 사람치고 미륵산을 열 번 이상 오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근한 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륵산을 가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었으며, 잘 차려 입은 등산복에 완벽한 등산화를 신었으니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미륵산에 간다면 다른 사람들은 평상복에 간단한 운동화를 신고 가는 것이 보통이며, 어떤 사람들은 구두를 신고 가는 사람도 있는 판인데 이 친구가 좀 별나다는 생각도 들었다. 속으로는 얼마나 거창한 등산을 준비 하길래 미륵산에서 저렇게까지 연습을 해야 하는 가하는 걱정이 앞섰다. 어떤 계획이 언제 있는 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준비성이 남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났다. 어떤 모임을 계획하는데 있어 어떤 조건을 가장 먼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지를 순복이와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토요일을 제외하고 남는 다른 날은 다 좋다고 하였다. 보통의 사람들 같았으면 교회에 간다든지 혹은 집안 식구끼리 지내야 한다든지 하는 말로 일요일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순복은 일요일 모임은 참석하지 않으면 되고, 집안 가족의 모임이라 해도 한두 번 빠지는 것은 이해를 할 거라고 하면서 다만 토요일만은 제외시켜 달라고 하였다. 고르고 골랐어도 정말로 토요일에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자기를 빼고 다른 사람끼리 추진하라고 하니 그것 또한 난감하였던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하는 행사들은 대체로 토요일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지 않는가. 평일은 여러 사람이 참석하기 어려운데다, 토요일은 주 5일제가 실행되면서 그래도 많이 여유로워진 것이 사실이다. 매번 있는 모임도 아니니 어쩌다 한 번쯤은 토요일에 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순복이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토요일을 택하면 왜 안 되느냐고 물으니 속 시원한 대답은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하여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단체 행동을 하는데 개인의 사정으로 인하여 모임이 흐트러지는 게 좋으냐고 다그치면서, 소수가 다수를 무시해도 되느냐고 윽박지르니 그제서야 속마음을 드러냈다. 순복이의 대답은 내가 들어도 뭐라고 나무랄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토요일은 한 달에 두 번 자원봉사를 가기로 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번도 다른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이 대체해야 할 수도 있으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토요일 모임은 기피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토요일 약속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순복이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자원봉사란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행하는 개인의 약속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대방과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약속이 이루어지고, 상대방은 나로 하여금 다른 계획을 세우는 연계행동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다시 고쳐 말하지 않아도 원순복의 마음을 이해하였다. 그러니 내가 더 이상 토요일 모임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토요일 선호를 원순복 개인의 일로 인하여 변경할 수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순복이의 대답이 이어졌다. 못 지킬 약속이라면 처음부터 하지를 말고,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면 성실히 실행하라는 것이니 참으로 합당한 말이었다. 그것이 자신과의 약속이든 상대방이 있는 사회적 약속이든 다 똑 같은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아파트 앞 정류장에서 만난 순복이가 완벽한 등산복장을 갖추었던 것에 대한 해답이 나왔다. 듣고 보니 가까운 미륵산에 가더라도 가능하면 제대로 된 복장과 마음자세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 일에 심취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래야 실행하는 일의 성과를 높이고 효율을 높이는 것이라니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미륵산은 해발 440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굳이 등산복장을 갖추는 것이 남의 눈에 띄기 위한 허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방편이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돌이켜 내 자신을 살펴보았다. 나는 언제 자원봉사로 남을 도운 적이 있었던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적으나마 베풀어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남의 일에 등한시하였던 것이 한두 번이었던가.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리처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교리처럼 남을 이해하며 살았던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원래가 나는 남보다 잘 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없는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자신만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젖어있었음을 반성해본다.
내가 돈이 없고 권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눈이 없는 사람에 비하여 두 눈을 가지고 있어 행복한 사람이며, 팔이 없는 사람에 비해 나는 두 팔을 가지고 물건을 잡을 수 있어 완벽한 사람이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 비하여 나는 국어를 잘 소화하며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걷지 못하여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멀쩡한 두 다리로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으며 지친 순간에 머리를 돌려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고향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할 내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다면 그것은 사람의 본분을 다 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나에게 부끄러운 감정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원순복이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범위 안에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얼굴이 예쁜 사람도 있고 마음씨가 예쁜 사람도 있다. 모든 일을 흑백의 논리로 이것 아니면 저것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마음씨 예쁜 사람이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와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굴 예쁜 것보다 마음씨 예쁜 것이 훨씬 더 필요한 덕목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할 일에 대하여 나름대로는 계획을 세우고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은 사전에 치우는 치밀함을 보인다. 따라서 토요일에 나가야 할 자원봉사를 생각한다면 주중에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고, 혹시 모를 방해꾼을 없애기 위해 다른 약속을 않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정한 약속에 대하여 철저한 준비를 하는 마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그 일을 하면 주어지는 보수가 있는 것도 아니며, 자원봉사를 했다는 증명서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자원봉사를 몇 번 했다고 해서 권위가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죽고 사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일보다 자원봉사가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존경스러웠다. 얼굴도 예쁜 사람이 마음씨까지 예쁘니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인가. 어쩌면 이런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동창이었다는 것이 기뻤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사귀는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원순복이 처럼 일상의 개인적인 일보다 자신을 기다리는 자원봉사의 일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내 지인이라는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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