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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스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14

투잡스 


같은 초등학교를 6년 동안이나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경우가 있다. 특히 대도시의 과밀학급의 경우가 그렇고, 예전처럼 학교가 드물던 시절의 중소도시도 그랬다. 물론 남자는 남자들끼리 여자는 여자들끼리 얼굴 한두 번이야 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던 친구들이 많이 있음도 사실이다. 김용윤이는 고향의 같은 마을에 살았던 친구다. 황등면 황등리의 황등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황등리에 살았고, 그 중에서도 보삼마을에 살았으며 그 안에서도 3개로 나뉜 취락지구 중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러고 보면 제법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되면 죽마고우 수준으로 항상 붙어 다니며 말썽피우는 것이 연상된다. 하지만 용윤이와 나는 그렇지 못했다. 용윤이는 신작로 가 즉 상업지역에 살았다면, 나는 길가에서 조금 떨어져 조용한 주택가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같은 마을임은 틀림없어서 당시 애향단끼리 모여서 등교를 할 때에 같이 갔던 기억도 있다. 애향단은 마을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아이들끼리 일정한 곳에 모여 한꺼번에 줄을 서서 등교하는 형태를 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사문화의 잔재이기는 하지만, 당시 여론몰이용 행사로는 아주 제격이었던 것 같다. 반공방첩을 외치고 애국충정을 읊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국가의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은 자신은 정작 일본군 장교의 지원 자격에 미달된 것을 창씨개명과 혈서로 충성 맹세하여 합격하였으며, 나중에 만주에서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는 군대 지휘관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해방이 된 후 독립군을 위하여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둘러대며, 북한정치의 중심당인 남로당에 자진 입당하여 우국지사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나에게 불리하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나에게 유리하다면 민족과 나라도 아랑곳하지 않는 삶을 살아 연명한 사람이 말이다. 지금도 그의 친인척들이 그리고 자녀들이 국가의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그때만 해도 식량을 없애며 병원균을 옮기는 쥐를 잡자고 하여 쥐꼬리를 잘라오라던 때였다. 또 학교 실습장의 땅심이 부족하여 퇴비용 풀을 베어 나르던 시절이었다. 민둥산에 나무를 심었고 절개지에는 잔디도 심었다. 이때 비용이 소요되는 나무는 정부에서 준비하였으며 노력봉사로 도울 수 있는 개인들은 잔디 씨를 받아 모으던 시절이었다. 한동안은 너나 할 것 없이 낭비를 줄이며 근검절약을 강조하고, 나 보다 공동을 위하여 힘을 보태는 그런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름하여 새마을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대가없는 노력봉사가 이어졌고, 피땀 어린 농토를 도로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건 없이 내 놓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지금 와서 부르는 베이비붐세대 즉 전쟁 후인 1953년생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던 1960년생까지의 출생아는 다 그렇게 배우며 살아왔다. 이 기간을 정하는 데에 특별한 원칙이 없어 좀 다르게 정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용윤이와 나도 1955년생으로 이런 베이비붐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들이 자랄 때에는 전쟁의 잿더미로 인하여 먹고 살기 힘든 가정이 많았으나 그래도 전쟁 중인 것에 비하면 천국과 같은 생활이었다. 따라서 현실로 닥친 고난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해보겠다는 각오가 충만해있었던 시절이다. 당시는 가난해도 다 그렇게 참으며 살았고, 없어도 모두가 부족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던 시절이다. 요즘 유행하는 단어로 말하자면 행복지수가 높았다고나 할까.


김용윤이 학교를 마치고 객지로 나간 때가 언제인지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내가 먼저 고향을 떠나 객지로 나섰기 때문에 고향의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용윤이가 고향에서 배웠던 근검절약과 성실함을 객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고학생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객지에 가자마자 용윤이가 바로 결정을 해야 했던 것은 듣기도 생소한 투잡이었다. 낮에는 정규 직장에서 일을 하지만 오후에 퇴근을 하여서는 다른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개인의 욕구나 체면 따위는 상실한지 이미 오래 전이다. 고난을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문화적인 면이나 취미 혹은 개인의 성향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의복이나 먹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객지에 나간 용윤이는 그렇게 일을 하였다. 남 보기에 체면을 구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에는 쓰리잡까지도 받아들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부업을 하는 것이 투잡이며, 야간의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용돈이나 생활비를 벌면 그것이 바로 쓰리잡이 되었다. 이런 생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베이비붐 세대의 극심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사람들 혹은 그들 부모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중간에 더러 만나는 기회가 있었으며, 그가 운영하던 식당에 찾아갔던 기억도 있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이제는 세상의 짐을 벗고 쉴 때쯤 되었을 때, 내가 용윤이의 지난날을 전해 듣고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면 실행할 수 없었을 신념, 나라면 계획 세우지 못했을 희망 등 아무리 생각해도 용윤이는 나보다 한 수 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용윤이가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부모 품을 떠나니, 그와 반대로 예전의 고향이 그리운 사람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용윤이를 만날 때마다 예전에 들었던 그의 생활이 그려져서 귀감이 되곤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용윤이의 생활이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잘한 일이든 잘못 한 일이든 사람은 각자가 들춰내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있으며,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온 지도 한참이나 지났건만 용윤이는 서울을 자주 다녀왔다. 그것은 아마도 서울 생활의 청산에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얼마 후에 드디어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도 옛 고향에 다시 적응이 다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 용윤이는 나를 만날 때마다 나의 안부를 묻고 충고를 해주었다. 내가 심근경색으로 한 때 병원치료를 받았으며, 이후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용윤이는 사람의 병이 다 그렇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였다. 조금은 언짢고 괴로운 면이 있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면 훨씬 빨리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허물없고 만만한 친구인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난다면 더 효과적일 것이라 하였다. 물론 동창이라 하여도 모두가 내 맘에 쏙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동창이라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듣고 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차피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 바가 아니라면 서로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도 용윤이는 나의 형편을 잘 헤아려 주었다. 심근경색이라는 것이 원래 혈액에 관계되어 발생한 것이며 혈액은 음식물과 관련된 것이니, 모이면 고기 먹고 술 먹는 우리 문화의 부작용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가는 모임에서는 항상 먹는 것에 신경을 쓰고 언행도 가려가며 하게 되었다. 이런 일에도 용윤이가 앞장섰다.

용윤이는 자신이 베이비붐 세대로 세상에서 겪어야 했던 인생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느끼는 개인 과거 역시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주변에 처하고 있는 상황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 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을 배려하고 자신에게는 철저히 절제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산업의 주역이었던 사람들 이른바 70․80세대가 느끼는 애환을 품고 속으로만 삭이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70․80세대가 한창 일할 때는 우리나라가 가장 기초적인 1차산업으로 겨우 연명을 하다가 경제국가로의 진입을 시작하는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중년 일꾼으로 변했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안정적인 중진국으로 진입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디. 따라서 선진국과 경쟁하여 이기는 전략을 세워야 했고, 후발주자로서 낙오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세대였다.

그러나 이들이 정작 웃어른이 되고 현역에서 물러날 즈음에는 그들에게 주어진 명예퇴직 바람과 해고라는 돌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요즘 유행하는 한 마디 단어로 풀이하면 낀 세대인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가난하여 절약하고 노력하였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설자리가 없어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세대라 하여 낀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낀 세대는 가정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기가 십상이다. 전 세대의 사람들이 낀 세대의 노력으로 노년 복지라는 좋은 제도를 선물받았지만 정작 자신이 누릴 부분이 없는 세대다. 요즘의 젊은 세대는 예전의 베이비붐 세대처럼 남을 배려하거나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아서 낀 세대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또한 낀 세대는 효도라는 단어를 통하여 부모에 대한 공양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베풀었던 것에 대한 보답을 아직 받지도 못한 채 오히려 자식 세대에게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는 세태가 되었다.

이런 때에 용윤이가 하는 말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위로해 줄 사람은 역시 동병상린의 낀 세대뿐이니 동창들과 잘 어울리자는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펑펑 마시며 먹고 놀자는 얘기가 아니다.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을 터놓고 하소연을 해보자는 것이며, 어깨 짐이 무거우면 잠시 내려놓고 쉬었다가 가자는 것이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같이 상의해보자는 것이다.

한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고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일 것이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몸으로 때워서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부자라는 사람도 가족 간의 시비를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였으며,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날밤을 세워 간청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오월동주 상태로 껍데기만 같은 무리이거나, 동상이몽으로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물리적인 조건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별다른 이야기가 없어도 다 이해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초등학교 동창들 특히 같은 마을에 살았던 죽마고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가족처럼, 혹은 그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이 고향 친구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김용윤이다. 서울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생기기는 그렇게 안 생겼어도 자상하고 마음 씀씀이가 넓은 것이 용윤이의 특징이다. 말은 그렇게 많이 하지 않지만 그래도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김용윤이다. 그러고 보면 김용윤이 비록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아마도 동창들에게 있어 좋은 친구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