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는
라용현은 초등학교 동창으로 그 중에서도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다. 사실 말이 고향 친구일 뿐 나와는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친구에 속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하는데 15초면 된다는 말처럼, 많이 그리 자주 만나야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용현이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사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훨씬 더 자주 만나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그것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용현이가 나서서 서대는 바람에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대로 나는 그만큼 무관심하고 신경이 무디어져 있다고 하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다.
학교 다닐 때의 용현이는 나보다 키가 훨씬 커서 뒤에 앉았었고, 나는 키가 작아서 앞에 앉았기 때문에 많이 어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졸업 후에 성인이 되고 보니 사람이 키 차이로 결정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옛날 공부잘했다고 결정짓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여 좋은 기회가 주어졌거나, 처음에 직업을 잘 선택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있다. 또 둘째로 얻어지는 사회적 직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사람을 판가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비록 그런 지위나 돈으로 인하여 사람을 차별하는 경우가 발생은 할 수 있겠지만 가슴 속 깊은 저면에 깔린 판단의 기준은 역시 양심이지 않을까 싶다.
어릴 때 자란 시골을 지키는 사람들은 대체로 위에서 언급했던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용현이 역시 고향을 지키는 지킴이다. 그래서 용현이도 남들보다 많은 돈을 벌어서 돈으로 행세를 하거나 지위가 높아 업무상 우월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알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용현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좋은 사람이라는 축에 들어간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하거나 장차관을 지냈고 정치계의 거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민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이 다반사인 것에 비하면, 어쩌면 최상의 극찬이라 할 수도 있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라용현은 글자 그대로 최상의 극찬을 받는 사람 즉 괜찮은 사람인 것이다.
어제도 문자메시지가 왔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유의하시게,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잠시 들러 한숨 돌리고 마른 목 적시고 가세나.’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너를 만나면 어떻게 해주겠다는 거창한 내용도 아니다. 하지만 초복을 맞아 시의적절하면서도 진심이 묻어나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힘이 들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그냥 바쁘게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때에 세상 짐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그 사람을 돕는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용현이가 나를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마음으로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오늘 같은 더위에 시원한 물 한 모금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러한 라용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평소 나를 만났을 때 술을 산다거나 밥을 산다거나 아니면 옷을 사서 나에게 선물해 주어서 고마운 것이 아니다. 그저 말 한 마디라도 듣는 사람을 배려하며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는 그 마음씨가 고마운 것이다.
사람들은 말 한다. 전화로 위로하고 돈 대신 말로 때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고. 물론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고 정작 그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그것을 알고 대해주는 전화일 경우에는 다른 사항이다. 어쩌다 한 번 그것도 남에게 하면서 너도 같이 하나 끼어서, 남의 형편이 어떤 지도 모르면서 획일적으로 걸어주는 전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용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상대방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 가족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후 그에 맞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남의 어려움에 끼어들어 일처리를 하는 전담반이 되기도 한다. 원래 고향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만드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하기 싫으면 평양감사도 못한다고 말이 생겨날 정도인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그래서 내가 용현이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라용현이 모든 동창들에게 모든 일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방이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의 어려움을 당한 때에 나서서 도와주는 소신도 가지고 있다. 아울러 그런 친구들에게는 형제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성심을 다해 보살피고 그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동참하는 성의를 보인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동반자가 되어주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말벗이 되어준다. 보호자가 없는 병실에서는 심부름꾼이 되어주고, 힘들고 지친 병자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간증자가 되기도 한다.
사실 말이지만 나는 동창친구들에 대하여 용현이처럼 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영원히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것은 원래 각자가 타고난 기능적 재주가 다르듯이 성품 또한 달라서 네가 하면 나도 한다고 말은 하여도 실천은 할 수 없는 것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천성이 착하고 남을 아껴주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메마른 세상에서 남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칭찬 받아 마땅한 일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용현이는 말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내가 한 일을 남에게 알리지 않으며, 먼저 나서서 일을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다. 내가 죽은 것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던 말처럼, 내가 남을 도와주었다고 하여 소문을 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이다. 행여 조그마한 생색이라도 낸다면 그렇게 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친구도 세상이 힘들고 지칠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힘들고 외로울 때에는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것을 두고 세상을 헛살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용현이가 자신의 일에 대하여는 절대로 남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는 데서 발생한 결과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는 용현이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베풀었으니 네가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네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미안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나로 인하여 남이 신경 쓰고 자기 일을 못하는 것이 싫어서 그런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를 할 것 같다. 그러나 본인이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을 때 혹시 친구라는 이름 때문에 욕을 먹지 않을까 두려운 체면치레였다면 그 말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저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우정으로 그렇게 하였다면, 다른 친구 혹은 상대방도 그처럼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우정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뒤집어 보면 나도 용현이와 같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은 고향 친구들이 몰랐으면 하는 일도 있기는 하다. 알고 있어서 마음이 쓰이고 자기 일을 접어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 아닌 걱정을 부담지우는 것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일이 창피해서 남이 알까 두려운 경우도 있겠지만, 결혼이나 상을 당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는 일조차 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담에 관한 일 이전에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 혹은 가족끼리만 알고 지내도 좋을 문화로 바꾸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결혼문화나 장례문화는 지금에서 조금은 바뀌는 것도 좋을 듯하다. 먼데 있는 단 장보다 가까운데 있는 쓴 장이 낫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가까운 데에서 쓴 장을 뚝 떼어 덜어주는 사람에게 수고를 덜어줄 필요도 있을 듯하다. 물론 이런 문화마저 없어진다면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이웃 간의 정이 없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갈수록 형식을 따지고 호화로운 사치문화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미풍양속이라기 보다 핑계 있는 소비문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부족에서는 결혼식을 치를 때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한 달씩이나 축하해주며, 신랑신부는 각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화답하는 문화가 있다는 말도 들었다. 이것은 보기에 좋은 전통문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요즘처럼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야 할 곳도 많은 시절에는 조금은 변화를 주어야할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적합한 문화가 보존되어간다. 따라서 우리의 결혼문화나 장례문화가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형식을 중시하고 호화롭고 거창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고려해볼 일이다.
용현이의 딸 결혼식도 그러했다. 거창하게 아주 호화로운 형식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이 하는 것들은 다 했었다. 소박하지만 예절은 다 갖추고, 간소하지만 절차는 다 차리고, 약소하나마 하객들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이런 것들이 본래의 의미를 전달하면서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을 지키는 대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판단한 기준으로, 그러나 남을 도울 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행동하는 용현이는 분명 소신 있는 친구가 틀림없다. 좋은 일에는 남이 모르게 하며 남이 나에게 쏟는 우정에서는 부담을 줄여주려는 마음씨, 그런 것들이 좋은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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