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타협 대신 격렬한 토의를 하는
내가 군대에 갔던 때는 지원에 의한 직업군인이었기에 모두들 나름대로의 뜻을 두고 모여들었다.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갑이라는 전투병과를 제외하고 공병과 통신을 비롯하여 각종 지원병과가 있었는데, 군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고루 적용되는 모든 분야에 특별히 모집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후보생들은 전투교육사령부에서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각자의 병과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은 후 자대에 배치되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10개월 교육에 36개월 근무였다면 믿어질지 모르겠다. 당시는 요즘에 도입된 군대에 친구 동반입대 개념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는 병과에서 근무를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장교지망생들로 전국에서 모인 응시자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원하는 병과에 응시 한 후 합격이면 합격이고 불합격이면 불합격으로 선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지원 자격 역시 대학 3학년 수준 이상의 조건으로 나름대로는 학교에서 혹은 반에서 상위권에 속했던 학생들이 모여들었었다. 되돌아보면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학생군사훈련단 일명 ROTC에 들어갔어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사관학교생도들도 전혀 부럽지 않은 자부심덩어리의 후보생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으니, 위의 두 부류는 장교로 임관한 후에 후반기 교육을 받았지만, 우리는 아직 장교가 되지 못한 후보생 신분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 차별이라면 차별이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몰아 부칠 때에는 젊은 혈기를 못 이겨 싸우기도 많이 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자대에 배치를 받고도 차별은 계속되었다. 비록 포상기준에 적합하여도 군에서 오래 근무할 동료 장교들을 위하여 상훈을 양보한다거나, 진급 순서를 바꿔주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에 크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크게 소용도 없는 일이라면 동료를 위하여 베푸는 것도 좋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김영태는 서너 명이 있다.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직장 선배로서의 김영태가 있는데, 이 사람은 회사를 그만 두고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그 후에 몇 번을 만나기는 하였지만, 사업장 위치가 고창으로 멀리 떨어져있어, 서로의 안부조차 주고받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고 말았다. 또 한 사람은 직장 동료의 부친으로 전라남도에 사시는데, 시골에서 농업과 관련된 개인 사업을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와 동년배인 군대동기로 키도 나와 비슷하게 작으면서 야무지게 생긴 친구다.
김영태는 고향이 전남 순천이다. 요즘의 순천은 교통의 요지이면서 항구도시로 제법 활기 넘치는 도농복합도시에 속한다. 물론 예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도 가진 자와 있는 자들에게 풍족한 세상이지 약자에게는 항상 높은 장벽으로 다가오는 것들의 일상이다. 영태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인하여 유년 시절을 풍족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시간만 나면 집안일을 돕고 이것저것 찾아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그가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공부밖에 없었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것이며 배가 있어야 고기를 잡을 것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어린 학생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이다.
사회의 환경과 가정의 환경을 간파한 김영태는 공부로 승부를 걸기로 작정하였다. 그러고 나니 공부를 하는 시간이 즐거웠고, 아무리 오랜 시간을 공부하여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이것이 김영태가 공부를 하게 된 동기라면 동기가 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달리기를 잘 하는 아이들은 어떤 달리기에서든지 항상 1등을 하였다. 그것은 달리기에 소질이 있거나 부단한 노력으로 그럴만한 기능을 갖추었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어렵다고 말하는 공부 역시 반에서 1등을 하는 아이들은 항상 1등을 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것도 공부에 취미를 느끼는 아이가 있고, 어쩌면 타고난 재질이 있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인 김영태도 이런 부류에 속했다. 공부로는 반에서 1등을 도맡아하였으며 전교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가 듣기로 전국에서 1등을 한 학생이 하는 말 중에, 자기는 평소 교과서를 위주로 하였으며 학원이나 과외수업을 받지 않았다는 이야기기 있다. 거짓말 같은 이 말도 사실은 맞는 말이기도 하다. 반에서 1등은 그렇다 쳐도 학교에서 상위권에 드는 아이들은 과외나 학원에 다니지 않는 다는 것을 익히 보아온 우리다. 김영태 역시 그러했다. 학원에 가고 싶어도 갈 형편이 안 되는 그로서, 그가 받은 성적표는 힘든 과정을 잘 이겨낸 종합 선물세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영태를 군대에서 만났다.
나는 공병을 지원하였지만 영태는 병참에 지원하였었다. 후보생들은 전반기 교육장인 보병학교에서 처음 만났으며 서로는 훈련을 받느라 바쁜 나머지 터놓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굳이 찾자면 같이 훈련을 받는 도중에 인사를 나누며 사귀어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체육대회나 측정 혹은 평가에서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면서도 동병상련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이렇듯 어렵게 만난 친구들이기에 상대방을 이해하고 더욱 굳건한 전우애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훈련을 받는 도중에 나는 중대 간부를 지원하여 작으나마 공동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각 내무반과 훈련생 개인을 점검하면서 영태와 가끔씩 부딪치곤 하였다.
그때 보았던 영태는 키가 나만큼이나 작아 내가 보기에 부담감이 없었다. 외모로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전투복에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이 볼품이야 없었지만 눈망울이 매섭던 친구로 기억된다. 영태는 교육 기간 동안 나의 가장 취약점이었던 달리기를 비롯하여 공부 또한 잘하여 얄미운 친구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에 틈만 나면 공부하고 시간만 나면 공부하였다던 영태는 군에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확고하였다. 무슨 일을 하면 완벽하게 하고, 또한 남보다 잘하여 선두에 선다는 게 최우선 과제에 속했다. 하지만 이때는 전국에서 모인 내로라하는 친구들이 공부면 공부 훈련이면 훈련으로 경쟁하였으니 그리 만만치는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공부보다는 중대 공통의 일을 담당하여 전우들의 인상에 남기자는 주의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아 온 영태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설득하면서 힘든 난상토론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이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일반 상식에 의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결론지어진 것이라는 신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금도 김영태는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얘기인 동시에, 여러 가지를 따져 보았을 때 이보다 더 좋은 결론은 도출해 낼 수 없다는 자신감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약간의 조정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세상 일이 항상 내가 생각한 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이니 남을 배려하는 면도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배려를 하는 것은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은 현실적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에서 내가 지원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둘을 합의하여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 영태의 성격도 그렇지만 그것은 나 역시 허락되지 않는 사항이다.
이러한 행동은 때로는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며 때로는 많은 손해를 입게도 된다. 그러나 김영태의 성격으로는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으로 일관한다. 불에 타 죽을지언정 간신배가 넘치는 세상에는 나가지 않겠다던 개자추처럼, 혹은 부패한 관리들과는 같이 주군을 모실 수 없다고 강가에 빠져죽은 굴원처럼 선비는 모름지기 자신의 영달과 안위를 무릅쓰고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를 한다. 내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마음 속 깊은 곳의 양심마저 바꿀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진두지휘하며 상대방을 어거지로 이끌고 가는 것 이전에 잘 설득하고 가르쳐서 이해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삼모사가 좋을지 조사모삼이 좋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과 당사자의 입장에서 어떤 조건이 전제되는 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고사는 원숭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고사성어다. 따라서 내일을 계획하며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간과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가 위의 고사를 배울 때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우선 많은 것을 선택하고 보자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하여 오늘의 작은 양보도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종자가 되어 열 배 혹은 스무 배의 수확을 낸다면 오늘 조금 양보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려와 협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자신감과 패기로 사는 김영태에 대하여 한 가지 주문을 해본다. ‘야, 영태야! 이제 술 좀 줄여라. 너도 이제 나이를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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