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원수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20

원수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조병용이라는 분이 있다. 이 분은 나보다 연배가 16살이나 위시다. 그런데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였다고 하여 가까이 지냈었는데, 오래 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분이 담당했던 업무와 직급이 있었지만 인생의 대 선배로서 같은 직장의 동료였다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조병용씨를 처음 만난 것은 갑과 을의 관계였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공사의 발주처 입장에서 진행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파견나간 입장이었고, 조병용씨는 조경을 담당하는 회사의 관리자로 공사를 수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조병용씨는 연세가 있으신 데도 객지생활을 하고 계셨다. 공사를 하다보면 전국적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으니, 그때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루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숙소로 귀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식사를 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돌아가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보면 반주로 약주를 기울이게 되셨고 때로는 좀 과하다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병용씨의 숙소는 물론 시내에 속했지만 외곽으로 나가는 가장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 식사 후에 돌아가는 길은 항상 멀게만 느껴졌던 길이다. 게다가 약주라도 과하신 날이면 으레 내가 그 뒷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누가 시켰던 것도 아니건만 본인이 해달라고 하신 것도 아니건만, 당신의 주위에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자처하고 나섰던 일이었다.

사람은 기댈 곳이 있으면 무능해지지만, 비빌 언덕이 없으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참고 참으며 끝까지 지게를 내려놓지 않는 특성이 있다. 어떤 일을 닥쳤을 때 다른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면 둘이서 그 일을 나누어 부담을 덜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나 외에 아무도 없다면 그때는 내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좋으나 싫으나 하게 되어 있다.

조병용씨는 연배가 한참 위인대도 나에게 잘 대해주셨던 분이시다. 지금 당신이 처한 환경이 그러하니 나 아니면 다른 곳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 역시 내가 없었다면 혼자서 뒷감당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행하셨을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렇게 하셨는데, 정작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지 않게 하려면 내가 잘 해드리는 수밖에 없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해석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시작된 이후 첫째로 중시한 과목이 바로 농업이었다. 당시는 산업의 대부분이 농업이었으니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조병용씨도 농업고등학교를 다니셨다. 물론 그때도 대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해외로 유학하는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연배에서 대부분은 지방에 남아 있는 것이 상례였다. 그 후 공무원생활을 하셨고 중간 관리자까지 승진도 하셨다. 그리하여 제법 나가는 축에 들었었다.

그러나 인생의 앞날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우여곡절 끝에 공직을 내려놓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사회는 개발 붐이 한창이어서 중기사업이 아주 인기를 끌고 있었던 시절이다. 조병용씨 역시 중기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법 성과도 내고 있었다. 호사다마라는 말은 언제 생겨났을까, 조병용씨는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하였다. 그 뒤로 자신이 전공했던 농업분야에 편승하여 조경업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조경업은 한 곳에서의 공사기간이 길지 않아서 좋은 면도 있지만, 그러기에 전국을 자주 돌아다녀야 하는 반대급부도 안고 있었다.


그분은 약주가 과하시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지경에 처하곤 했었다. 나는 그분이 오랜 객지 생활에서 건강을 해친 탓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셔드렸으며, 반드시 방에 들어가시는 것을 본 뒤에 돌아오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정신력은 남달리 뚜렷하여 대부분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약주가 과해도 정신이 너무나 또렷하면 오히려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도 실감하였다. 만약 내가 당신을 홀대했을 때, 다음날 대면하여 어제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성화를 듣지 않으려면 싫어도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 역시 그런 나에게 언제 어디서든 고마운 감정을 표하고 계셨다. 그러니 나는 그보다 더 잘못 해드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글을 쓴 후 세상에 첫 선을 보이고자 했을 때 조병용씨는 양규태씨를 소개해 주셨다. 양규태씨는 부안읍장을 지낸 분이신데 조병용씨가 공무원으로 근무할 적에 알았던 오랜 지기다. 또 오래전부터 글을 써서 제법 이름깨나 알려진 수필가였다. 이런 연유로 소개받은 양규태씨는 나의 글을 첨삭하는 대신 출판사를 소개하시면서 곧바로 출판할 것을 권하셨다. 그때는 내가 대단해서 그랬나보다 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남의 글을 첨삭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말을 꺼내기조차 힘든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결론이 선다.  

이때 조병용씨는 나에게 참암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원래 호를 짓는 경우는 스승이 제자에게 혹은 유명인이 축하하는 의미로 지어주는 것이 상례이며, 특별한 경우에는 본인을 포함한 친지가 짓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책을 내면서, 내가 책을 내는 것 혹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름을 필명으로 고쳐 적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창암 한호철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내가 유명한 작가도 아니며 작품성이 뛰어난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첫 번째 작품집의 출판에 앞서 먼저 조병용씨와 상의를 하였다.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면 좋겠느냐는 의미였었지만, 조병용씨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셨다. 그 대신 남과 원수지고 살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하셨다. 그분 역시 글에 대한 가감이나 첨삭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나, 글의 주제로 보아 남과 척지고 살지는 말자는 얘기였다. 더구나 눈만 뜨면 매일같이 보고 생활해야 할 직원이라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주제로 썼던 글을 완전히 삭제하였다. 어설프게 손을 본다고 하여도 어차피 내용은 전달될 것이며, 그렇게 미약하게 전달할 내용 같았으면 처음부터 거론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일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내가 감히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만이 할 영역이 아니던가. 짧은 순간이었지만 깊이 있는 반성을 하였다. 그리고 쑥스러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조병용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의 첫 번 째 작품집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보는 흥미를 주는 책은 아니더라도, 줄거리가 있어 기다려지는 내용은 아니더라도, 욕구를 건드리는 자극적인 내용은 아니더라도, 잘 써서 남들이 좋은 글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책을 냈던 것이다.


회사의 전 직원이 단체로 여름휴가를 갔던 어느 여름날, 나는 변산 해수욕장에서 거창한 출판기념식을 치르고 있었다. 회사 직원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으면서까지 일부러 축하객을 모을 필요가 없는 자리를 고르고 골라 선택한 날이었다. 그대신 부부를 동반한 1박2일 동창회의 첫날이었으니 각양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친구들이 축하해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나는 동창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즐거운 동창모임에 왔다가 엉겁결에 원치 않는 축하객이 되었을 것이니 말이다.

축사 역시 조병용씨가 소개한 분이 오셨다. 물론 나도 전부터 알고 있던 분이지만 익산지방의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분이셨다. 결과적으로 나는 광고하나 없이 전혀 힘들이지 않고 200여 명이나 모이는 성대한 출판기념식을 할 수 있었다. 덧붙이고 싶지 않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날은 축하객에 대한 답례 기념품이나 다과회도 없었다. 염치없게도 내가 지출해야 할 몫까지 동창회에서 대신 지출한 상황이었다. 동창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을 정도의 번외 행사인 출판기념식에 상관없이, 동창들이 모이면 베풀어야 할 자축파티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부부동반 모임이니 어느 정도의 성의를 가지고 그럴 듯하게 마련한 자리였다.


조병용씨는 이처럼 나에게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셨던 분이다. 나 또한 그런 측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조병용씨는 행여 내가 잘못 한 일이 있더라도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그 대신 그런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저렇게 협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분의 성격은 예의가 없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과격하게라도 가르칠 정도로 선이 살아있었다. 그 와중에 꾸지람을 듣지 않고 지냈다면 그것도 작지만 행운은 행운일 것이다.

조병용씨는 작고하신 후 부안에 있는 선산에 산소를 두었다. 나는 그 후로 몇 차례 찾아가 보았다. 혹시 인근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하는 곳이었고, 어떤 때는 일부러 찾아나서는 곳이기도 했다. 거리로 따지면 50km도 넘는 먼 길이지만 추석이나 설과 같은 때에 가끔은 찾아가곤 하였다. 내가 술은 안마시지만 그분은 살아생전에 술을 좋아하셨으니 소주도 기울이고 묘소도 둘러보았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올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왔으니 행여 잘못하여 마음 상한 적이 있었다면 잊어버리시라고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돌아설 때에는 옆에 있는 그분의 작은 아버지 산소에도 들렀다. 조병용씨처럼 그 분의 작은 아버지 역시 살아생전 말년에는 나하고 비교적 가까이 지냈던 분이시기 때문에 거부감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번 책이 나왔을 적에도 산소에 들렀다. 내가 비록 유명한 작가는 못 되었어도 첫 걸음을 걷는데 도움을 주신 분이셨고, 덕분에 글을 쓴다는 명분을 내세울 정도는 되었으니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다.

내가 만약 첫 번째 책을 낼 적에, 남과 원수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꼬집어 비판하고 흉을 보는 내용을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뭐 그래보았자 달리 유명해질 것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말을 듣지 못할 것도 명확한 일이다. 원래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개성이 강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성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때 당시 내가 그분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남에게 지면서 사는 것도 인생살이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의 한 쪽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