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받긴 받았는데 답장을 못 드린
요즘은 편리성과 신속성을 추구하는 시대라서 대체로 전화를 이용하며, 그것도 불편하다고 생각되면 아예 문자메시지 하나로 대체하기도 한다. 내가 조금 신경을 쓴다고 하여도 이메일로 긴 문장을 쓰는 것이 고작이며 연말에 연하엽서 한 장 보내는 정도였다. 그런 것에 비하면 예전처럼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고 받는 것은 아주 오래 전 낭만에 비유될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몇 해 전 12월에 편지를 받았다. 우표도 붙이고 봉투도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인데 또박또박 써낸 글씨가 적혀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글씨체야 활자로 인쇄한 것에 비해 삐뚤빼뚤하여 고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받는 순간 고향의 정취를 느끼는 듯하여 반가운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나와 동년배이거나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 대략 20살이나 많은 지인이었다. 그분은 시골에서 지내시는 분인데, 한 때는 나처럼 수필도 썼고, 생업으로는 신문기자와 한때 유행하던 다방도 하셨던 사람이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농촌에 아담한 집을 짓고 구름을 모아 이야기꺼리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그분이 사시는 동네는 운회리이며 이름은 이훈으로 외자이시다.
이분이 한참 때는 시골촌로 답지 않게 꽤나 유명한 인사에 속했었다고 한다. 그분과 함께 데뷔한 사람들 중에 지금도 말만하면 잘 아는 분으로 오랫동안 수사반장 역을 맡았던 왕고참 연예인도 있고 그 방송을 주관하였던 피디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 분을 가까이서 만나 뵐 수 있다면 나 같은 새내기로서는 아주 영광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다리 걸러 아는 사람에게 조르고 졸라 그 분의 거처를 알아냈고, 드디어 날을 고르고 골라 방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묻고 물어 방문한 그곳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내부적으로도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마당의 집기나 모습으로 보아서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사람의 인기척이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인근에서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 어디 물어볼 곳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리다가 우연찮게 구세주와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바로 우편배달부였다. 이러저러한 사정이야기를 하면서 거처를 물으니 내가 찾는 그분은 지금 그곳에 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사는 도시에서 그 분이 계시는 시골까지 어떻게 날을 잡아 간 것인데 그냥 물러설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방으로 연락을 해본 결과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 분은 오히려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몇 차례 이야기는 들었는데 자기가 먼저 연락을 해 본다고 하면서도 미처 그러지 못했다며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 대하는 분한테서 생각지도 않은 환대를 받으니 마음이 편안하기는 하면서도 내가 더 미안스러워졌다.
그분이 사시는 마을은 아늑한 마을로, 높지는 않아도 양쪽에서 산맥이 둘러싸 작은 들판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운회리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선조들의 작명이 그저 허투루 지어 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운회리가 있는 대야는 넓은 들이라는 뜻이며, 인근의 개정은 물이 나는 샘이 마을을 적셔 낸다는 뜻이 담겨있다. 내가 사는 익산을 보아도 왕궁은 옛 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곳이며, 금마는 조선시대에 고을마다 역참을 두어 말을 바꿔 타고 달리던 정거장이었다.
머릿속에 그려 준 약도를 더듬으며 찾아간 곳은 정말 한적하기 짝이 없었다. 불현듯 옛날 모내기하던 날 이고 지고 새참을 내 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큼 조용하면서 사람 구경하기가 구름 만지기나 하는 것처럼 힘든 마을이었다. 그래도 인근에서 가장 최근에 지은 집을 골라 들어서니 이훈선생님은 초면의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양 거리감을 두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하긴 그분의 연세가 나보다 한참 위이니 무슨 격이 필요하였겠는가.
그분은 강경포구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셨다. 강경은 조선 3대 항구 중의 하나였으며, 산물이 많고 유동인구가 많아 명성을 날렸다고 하였다. 사실 그 정도야 역사책을 통해 눈에서 신물이 날 정도로 보아온 우리니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분은 그런 나의 형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가셨다. 얼마 후에 이제 그만 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번쩍 귀를 띄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강경 포구 개펄에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짐을 지고 가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뒤에는 한 아이가 행여 넓은 공간에서 길이라도 잃을까봐 마음 졸이며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때의 아이가 바로 자기이며, 당시 강경은 생활의 터전이었고 장사꾼들의 집결지였다고 하셨다. 발밑에서 꼬물대는 게가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행여 그것으로 인하여 엄마로부터 멀어질까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고 하셨다.
그 분의 이야기는 그러고도 한참을 이어갔다. 그러자 ‘아~ 그래서 이분이 영락없는 작가시로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도 아는 이야기,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라도 그 분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사라져가는 옛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작가의 소명이자 일이었던 것이다. 이훈씨는 그렇게 아름다운 글을 쓰는 수필가이시다.
나 또한 수필을 쓴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어떻게 쓰는 글이 잘 된 글인지,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글인지 알지 못했다. 그냥 붓 가는 대로 혀 돌아가는 대로 쓰면 그것이 글인 줄 알았다. 하긴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해보면 수필이란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그것이 곧 수필이라던 말도 생각이 나기는 한다. 시간이 되면 서울에 있는 자기 동창이나 연예계 동기들에게 소개시킬 기회를 잡자고도 하셨다. 정말 나는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로 짓는 집 앞마당에는 낡은 장독대 몇 개가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며 생김세도 제각각인 항아리들이었다. 나의 눈길이 항아리에 닿는 것을 보셨는지 화두는 이내 항아리로 바뀌었다. 마당의 항아리들은 예전에 살던 집에서부터 가져온 것으로 그 속에는 아주 귀한 보배들이 들어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딴에는 그럴듯한 생각을 해보았다. 원래 귀한 것을 너무나 잘 간직하다보면 어디에 놓았는지 알 수가 없어 정작 쓰고 싶은 때에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저 평범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저 항아리 속에는 필시 이사를 하면서 어디에도 보관하기 힘든 그 무엇들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었다.
그러는 사이 성큼성큼 다가선 그분은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고 또 다시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의 하나인데 이름 하여 감식초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옆의 것은 사과식초, 그리고 당귀 등 한약재를 넣어 만든 약식초라 하였다. 원래 식초는 우리 몸에 좋은 것이라는 것쯤은 나도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분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든 식초로서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한 보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직 식초가 완성되지 못해 권할 수는 없지만 집 사람이 식초를 좋아하면 완성된 감식초 정도는 좀 따라 주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당사자인 나는 우리 식구가 식초를 좋아하였는지 싫어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이런 때는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지도 어정쩡하였다. 할 말을 잃은 나는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우리는 그냥 마트에서 사다 먹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 말을 해석해보면 식초를 좋아하기는 한다는 얘기이고, 먹기는 먹기도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조금은 나누어 주어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으며, 냄새가 고약한 식초를 들고 집에까지 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순간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러자 이훈선생님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보통 사람들은 식초를 그것도 집에서 담근 천연식초를 준다고 하면 더 못 가져가서 한이던데 왜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는 말도 이으셨다.
나는 귀한 편지를 받았는데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면 게을러서 그랬을 것이 확실하다. 내가 챙기고 연말연시 인사도 드렸더라면 그분과의 관계가 더 지속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편지 한 장을 연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것도 내가 취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송구하기까지 하다.
우선 편지 겉봉을 보면 크기는 조금 작으면서 누런색이다. 예전의 얇고 누런 판매용 봉투가 아니라 두꺼운 종이로 직접 만드신 봉투라서 더욱 정감이 간다. 봉투는 이번에 접어서 붙인 것은 아니고 예전에 많이 만들어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차이를 두고 있다.
또 봉투의 겉에는 도장을 파서 찍은 문양이 있다. 그것은 한참 유행했었던 스마일 운동의 표식이다. 이정도 성의면 가히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다가 우표를 보면 지난 2006년도에 발행된 우표가 아니라 1993년도 발행 우표다. 우체국에서 이 우표를 지금 팔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많이 사 두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것은 예전에는 수도 없이 많은 편지를 써 보냈었던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금이야 연세가 있으시니 예전만 못함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안의 내지를 보면 이보다 더하다. 종이는 봉황이 인쇄된 편지지를 사용하였는데 대나무 잎과 소나무 잎을 아우른 문양을 파 찍었다. 봉황의 얼굴부분에도 앞의 스마일 문양이 있다. 아마도 내가 잘 웃지 않는다고 이렇게 항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이 편지를 받았던 순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웃어른께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답변을 하여야 할지 망설였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하였으면 했지만, 그 외에 내가 할 적당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장문의 답변이 되지 않을까 고민되었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벌써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버렸다. 이제는 장문의 편지로도 해결 될 수가 없을 듯하다. 지금의 방법은 직접 찾아 가서 인사드리고 정담을 나누는 것이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꽃샘추위도 물러간 어느 봄날에 따뜻한 기운과 함께 꽃 소식을 한 아름 안고 찾아 뵈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바로 대답할 기회를 놓치면 이렇게 어렵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내내 건강하시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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