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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 시작에서 진정한 끝을 찾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29

의도적 시작에서 진정한 끝을 찾는


어떤 사람이 정치를 한다고 하여도, 그런 모두가 대통령을 했거나 장관 혹은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들은 아니다. 변변한 시장이나 군수를 지낸 적이 없어도 본인이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정치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 이리남중교회에 신입자로 등록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재혁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왜 남중교회에 왔는지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정재혁은 총선에서 국회의원예비후보로 나왔다가 추천을 받지 못했다. 말하자면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정당정치에서 정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장손 즉 정통한 자리를 이어받을 적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되며, 반대로 공천을 받은 자가 곧 정당의 강령에 적합하고 당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정재혁이 지난 총선에서 당선되었다면 나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무고 혹은 인신공격에 해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낙선하였기에, 그리고 연배가 나보다 적으면서 나를 잘 이해해주기 때문에 이처럼 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다. 그런 교회에 와서 나그네의 명예와 부귀를 구걸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실제 내막적으로는 표를 의식하여 얼굴을 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종교계에 와서 세상의 부귀와 명예를 구하는 것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내세가 어떻고 하늘나라가 어떻고 하면서 자신은 정작 허무한 현실의 안주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재혁이 국회의원의 예비후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세간에 얼굴을 알리고 홍보하는데 등한시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반대로 해석하여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고도 할 수도 있다.

선거철이 되면 시장 후보나 국회의원 후보들은 시내 대형교회에 앞다퉈가면서 등록을 하는 게 현실이다. 이리남중교회만 하더라도 전직 시장이 다시 출마를 하면서, 국회의원에 도전을 하면서, 교육위원 후보로 등록을 하면서, 그리고 시의원에 출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왔었던가. 이미 다른 교회에 등록을 한 경우에는 신년 예배나 어린이 주일 혹은 부활절처럼 많은 교인이 참석하는 특정한 날을 골라, 딱 한 번 예배를 보고 가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정재혁 역시 얼굴을 팔고 표를 얻기 위하여 교회에 등록하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잘 되었다고 그래서 예비후보에서 잘 떨어졌다고 말할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사실 까집고 보면 정재혁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의중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보통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그랬다. 서울이 주 활동 지역인 정재혁에게는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더라도 표를 의식하였던 사람으로밖에 볼 수 없는 조건이다.

훗날 정재혁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정치에 대한 수단으로 교회에 의도적으로 접근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처음 교회에 등록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표를 의식하였던 것이다. 빠른 시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방법으로 교회를 택하였고, 거기에서 자신을 피력하면 좀 더 확실하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마음먹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교인들 마음에서 정재혁은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미 선거철이 지났으며, 더군다나 낙선한 후보자는 유권자의 안중에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재혁은 성실하게 교회에 나왔다. 그래보았자 1주일에 한 번 그것도 낮 예배만 참석하는 것이니 크게 자랑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정치꾼하고는 다른 면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흔히 선데이집사 혹은 선데이권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일요일만 집사이며 일요일만 권사라는 뜻이다. 다른 날은 일반 비신앙인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가 회개하고 진정한 신앙인인양 행세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이다. 정재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정재혁을 다른 사람들과 달리 높게 평가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성실함이었다.


내가 교회와 관계없이 정재혁을 알게 된 것은 지방지에 칼럼을 쓰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나는 이미 90회분의 칼럼이 모두 준비되어 있는 상황에서 시리즈로 연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신문의 옆 장에 작은 칼럼을 쓰는 사람이 등장하였으니 바로 정재혁이었다.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더라도 지면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얼굴이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내가 정재혁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 이유는 정재혁의 칼럼 때문이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실리는 칼럼에서 글의 무게감이 느껴졌고, 그런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막연한 동경이 갔던 것이다.

그는 주로 정치적인 글을 많이 썼다. 어떤 때는 사회적 현상과 경제적 방법들을 논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이 정치인이라서 그런지 모든 내용은 정치와 관련하여 매듭을 짓고 있었다. 내 딴에는 나도 글깨나 쓴다는 사람으로 그리고 글깨나 읽는다는 사람으로 자만하고 있었는데 막상 정재혁의 글을 보니 내가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한두 번이야 마음먹고 다듬으면 그렇게 쓸 수 있다고 무시도 해보았다. 그러나 매번 그리고 거르지 않고 그런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내가 신문 연재를 해보니 지면의 반쪽을, 그것도 계속하여 채우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상상하기도 힘든 중노농의 연속이었다. 내가 느낀 정재혁이 그랬었다. 이후로 나는 정재혁에게 나쁜 감정보다는 좋은 감정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정재혁이 선데이집사의 대열에 들어 있다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정재혁은 집이 서울이고 교회는 이곳 익산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매주 서울과 익산을 오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선데이집사라도 개근상을 주면서 간증이라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하였다. 바꾸어 정재혁 입장에서는 ‘그 시작은 의도적이었으나 그 끝은 진정이어라’일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면서 교회에 나온 지도 벌써 6년이 지났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며 처음 시작이 의도적인 경우 선거 후 특히 낙선 후 바로 그만두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길어도 한 달 이내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6년이라는 세월을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선데이집사라 하더라도 그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하여 그것조차도 선거용 홍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을 한결 같이 그랬다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의 진심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진심으로 교회에 출석하기로 하였다면, 그것은 정치인 이전에 그리고 정치 목적 이전에 이미 진정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도 충분하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인이 그 정도 했다면 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도 좋을 만큼은 했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면에서 정치인 정재혁을 좋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재혁의 좋은 점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일이 있었다. 최근 새로 창당하려는 곳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기존의 정당에서 25년 이상을 몸담아 온 사람인데, 다른 정당에서 초빙을 하였으니 그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실 어느 정당의 정책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다. 물론 정당의 정책이란 혼자의 생각으로 결단한다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가 정당의 의중을 읽고 초안을 잡아 제출하면 당원이 모여 의견을 낸 후 결정하게 된다. 이런 일은 항상 지도부와 공유해야만 가능한 일이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실무자들에게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정재혁이 항상 아쉬워하는 점이 있다. 원래는 정당정치가 정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어떤 정당이라는 명칭으로 모인 사람들이 정책보다는 인기몰이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국민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지는 안다. 좋게 포장하면 이런 것을 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당에서 그런 내용을 정책으로 채택해줄 지는 의문이다. 혹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음 선거를 위한 인기에 급하여 뜨거운 감자를 거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정책분야에 근무하다보니 정책에 관한한 일가견이 있다는 것과, 좋은 정책도 발등의 불과 같이는 느껴지지 않는 다는 뜻이 담겨있다. 내가 본 정재혁은 정책으로 국가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 미래를 예측하고 대안을 세우는 정책을 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런 정책을 펼쳐 보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늘 아침 고속열차를 타고 익산에 왔다가 저녁에 다시 고속열차로 서울에 갔다. 나 같았으면 오고 가는 차비로 사람의 마음을 사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몸으로 때우는 육체의 피로라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재혁은 그런 쉬운 길을 마다하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그런 와중에도 정치와 사회변화에 대한 책을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읽는다. 그 이유를 물으니, 기존의 정책이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비추어 고리타분하게 쳐져 있지 않으려면 단 한 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그가 교회를 정치적 목적으로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리다. 그의 고향이 익산이어서 익산에 오는 것이 억지는 아니더라도, 가정을 이룬 가장이 그것도 직장이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서 매주 고향을 찾는 다는 것을 보통으로 볼일은 아니다. 그가 다시 정치의 꿈을 펼치기 위하여 선거에 출마를 한다면 그때쯤이면 그를 한 번은 더 믿어도 될 것 같다. 매번 무게 있는 칼럼을 선거에 관계없이 썼던 사람으로서, 선거철이 아닌 데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으로서, 정치인은 인기보다 정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재혁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종교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정치분야에 있어서만은 말이다. 나는 그런 정재혁에게 오히려 좀 더 적극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