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산문, 수필, 칼럼

끝까지 진정성을 추구하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8. 9. 13:30

끝까지 진정성을 추구하는


조현숙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 아주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아는 조현숙은 딱 한 사람, 익산목발노래보존회의 회장이다. 보존회장 조현숙씨는 여자이신데 1948년 1월생으로 나보다는 7살이나 위다. 나는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보존회의 회장님이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대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었다. 그때는 함라문화예술공동체라는 조직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조현숙씨는 익산 함라의 시골출신이다. 조현숙씨는 학교를 마치고 남들이 그러듯이 서울로 갔다. 그때만 해도 잘 나가는 남편을 두어 풍족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편은 청와대와 연관 있는 집안에서 근무하였다. 그때의 정치계를 상기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의 보호아래 있었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경제적인 요건도 충족하여 보통사람으로서는 부러울 것이 없는 생활을 하고 지냈다.

그런데 권불십년이라고 하였던가. 정권이 바뀌고 나니 일각에 무직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간 모아두었던 자금이 충분하여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사업장을 마련할 수 있는 여건은 되었다. 그리고 사업은 호황을 맞았다.

우리가 어렸을 적의 운수업은 그야말로 돈을 모으는 사업이었다. 학교에 가려면 10리를 걸어서 신작로에 나간 후 버스를 타던 기억도 있다. 그처럼 귀하고 귀한 것이 운수업이었다. 더구나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의 사업이라면 더 물어서 무엇 할 것인가.


이때 조현숙씨는 적어도 조현숙씨의 남편은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이 이곳에도 찾아왔다. 잘 나가던 사업장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내가 알 수 없으나, 그토록 성황을 이루던 사업장이 문을 닫는 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해석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더니 조현숙씨 역시 당장 쪼들리지는 않았다. 그간 번 돈을 사치와 허영에 낭비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하였다는 후문이다. 워낙 잘 벌던 시절이 있었기에 엉뚱한 데 탕진하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때 조현숙씨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사업을 벌이고자 하여도 경영수업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저지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조현숙씨는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후 생각해낸 것이 보험업이었다. 당시는 보험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상태라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업은 그야말로 바위에 계란치던 시절이었다.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결국 그는 보험업계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전국 보험왕을 여러 번 차지한 사람이니 그 분야의 최고라는 수식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사람이다. 그때는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몰고 다녔다. 그만큼 바쁘고 여기저기 들를 곳이 많았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있으니 그렇지만 서울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이 고향으로 온 것이다. 자식들도 하나같이 잘 되었다. 어느 것이 잘 되었는지 따지기는 그렇지만, 카이스트에서 근무를 하는가 하면 미국에서 생활하는 정도로 글로벌화된 가족으로 변하였다.


그가 보험업을 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신뢰라고 하였다. 따지고 보면 신뢰라는 것은 보험업뿐만 아니라 여타 사업 그리고 모든 대인관계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라고 알고 있다. 정말 그렇게 중요하고 기초적인 한 가지만으로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니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현재 하고 있는 조현숙씨의 행동을 보면 역시 신뢰가 가장 큰 무기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조현숙회장은 그간 벌지 않고 쓰기만 하면서 재산이 많이 줄어든 것을 알았다. 이때가 마지막 남은 돈마저 그냥 먹고 마시는 데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이나 하고 죽을 것인지 선택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때이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는 현재 익산목발노래보존회장을 맡고 있지만, 그러기까지에는 많은 시련도 있었다. 아는 바와 같이 익산목발노래라는 문화재는 1973년 6월 30일에 처음 지정된 무형문화재이다.

무형문화재란 어떤 일정한 형태가 없지만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것으로, 후손에게 물려주어 길이길이 보존하여야 한다고 판단된 예능을 일컫는다. 이런 무형문화재에는 강릉단오제를 비롯하여 진도아리랑, 판소리, 해남강강술래, 안동차전놀이, 칠석고싸움 등이 있다.

이런 유와 같이 익산목발노래 역시 귀중한 선조들의 숨결인 것이다. 익산목발노래는 지게를 지고 노래와 율동을 겸하는 놀이로써는 전국에서 익산만 전해지는 종합예술에 속한다. 다른 지방에서는 지게를 지고 율동을 하거나 놀이를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지역에서는 지게에 관한 노래만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가 성행하였던 익산에서 농부의 고단함과 한을 품어내는 노래로,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율동으로 시름을 달랬던 선조들의 유산이 어우러진 것이다.

이 노래는 금강을 끼고 있는 익산에서 어로와 농업에 기반을 두었던 시절 즉 백제의 산유화가가 불려지던 시절부터 이어져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강변이었던 성당, 용안, 웅포를 비롯하여 내륙이었던 삼기, 함라, 함열 등지에서 성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노래를 삼기의 박갑근옹이 채집하여 부르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던 중 2005년 박옹이 별세하면서 문화재지정에서 해지되는 비운도 맞았다. 그 후 이 문화재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백방으로 진행되었다. 시청 관계자를 비롯하여 문화계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힘을 모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관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서의 위상을 되찾는 것은 멀고도 멀었다. 이러다가 영영 복원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탄식도 들려왔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현 회장인 조현숙씨다.

조현숙씨는 보험왕에 오를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그간 모아 놓은 돈도 제법 있어 어렵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지막 사업으로 고향의 후배들에게 장학금이나 만들어주자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찾은 고향은 50년도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고향이었다. 아직도 가까운 친지들이 살고 있으며, 개발이라는 변화의 바람을 타지 않은 순수한 마을로 남아있었다.

이때 무형문화재인 익산목발노래의 명예회복을 결심하게 된다. 거기에는 예전에 들었던 농요와 한때 즐겼던 풍물이 그런 결심을 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색이 문화재를 살리는 일이 그것도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 등장한 백기사가 있었으니 당시 기획을 맡았던 최준이다. 이 사람은 조현숙 회장과는 가까운 친척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물론 동년배에서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더구나 최준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음악을 배웠으며, 각종 공연이나 영화 등을 기획하고 연출한 경험이 풍부한 능력자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최준씨가 기획을 맡고 조현숙씨가 지원하는 함라문화예술공동체는 여러 가지 일들을 벌여나갔다. 우선 단체를 꾸려 대외적인 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여러 기관을 방문하여 익산목발노래의 정당성을 외친 결과 아름다운 공연들을 이끌어냈다. 척박한 환경에서 우군이 하나도 없는 격전장에서 판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불문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와 함께하는 익산목발노래, 옛 포구로 향하던 장사꾼의 행렬을 재현하는 보부상들의 노래, 지평선축제나 소리문화의 전당에서의 시범공연, 코엑스에서의 익산홍보공연,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 하는 공연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행사를 가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익산목발노래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2012년 4월 27일 드디어 문화재 재지정이라는 성과가 만들어졌다. 이후로, 익산목발노래보존회의 정기발표회는 물론 송파놀이마당의 공연을 비롯하여 방송에 여러 차례 출연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익산목발노래보존회는 여러 공연을 통한 홍보나 문화재 재지정으로서의 기쁨에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예전에 겪었던 것처럼 다시는 아픈 상처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문화재 지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받은 냉대와 무관심을 바탕으로 심기일전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관이나 문화계에서조차 여자 혼자 무슨 힘으로 그걸 어떻게 이루겠느냐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제 일 좀 그만 벌이고 조용히 살자는 얘기도 들었다. 또 그런 일이 성사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조현숙씨는 이런 설움을 모두 딛고 넘어섰기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익산목발노래가 문화재로 재지정 되던 날 밤에 조현숙씨는 목 놓아 울었다. 밤새도록 그렇게 울었다. 기쁨의 눈물인지 고마움의 눈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울지 않으면 안 되는 무슨 필연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울었다. 

처음에 함라문화예술공동체를 조직한 후, 예전의 목발노래 회원들이 각지로 흩어진 것을 안 조회장은 낙심도 많았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을 모을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있었다. 한편 어떤 사람이 정통을 이을 것인가 하는 애로사항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으니 그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는 일이었다.

 

아직 문화재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이니 정부의 지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따라서 연습장이나 회원들이 쉬며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 공연 연습날에 제공되는 식사와 비용, 공연을 섭외하러 가는 비용, 공연장에 가고 오는 경비와 출연료, 각종 소품들,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서운한 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다. 그가 문화재를 살린다고 하였을 때 방해하거나 방조한 것은 그렇다 쳐도, 회원으로 와서 돕겠다고 한 사람마저 배신을 하는 경우는 정말 참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어떤 재능이 있으니 단체에 도움이 될 거라는 핑계를 대고 합류하였지만, 이내 본색을 드러내어 운영에 관한 지위를 요구하거나 조직의 장에 대한 대표성마저 요구하는 것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조현숙씨는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함께 했던 회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였다. 조현숙씨의 간청을 들은 회원들 중에서도 1922년생 남궁전 어르신과 1926년생 이수만 어르신은 매우 적극적이셨다. 마침 자신들이 해온 일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자기 대에서 끊어졌다는 것이 한으로 남아있었는데, 비록 나이 어린 여자라 하더라도 그런 큰일을 해주겠다는 것에 대해 감격을 한 것이다. 그 뒤로 많은 회원들이 복귀하였다. 여기에는 예전에 보험업을 하던 당시의 조현숙다운 진정성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회장은 자신이 대표이지만 어르신들에 대한 예우는 깍듯이 모시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조직의 질서가 잡히고 옛 명성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파악한 사람이었다. 그 후 드디어 문화재 재지정이라는 숙제가 풀렸을 때 모두는 기뻐하였다. 그리고 익산목발노래의 효시였던 고 박갑근옹의 묘소에 참배하며 앞으로의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이제는 조현숙회장이 어렵게 일궈온 것에 하나의 고민이 더 생겼다. 그간 가지고 있던 사재를 모두 털어 넣은 그렇다 쳐도, 어렵게 일군 결과를 또 다시 한 순간에 날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문제였다. 자칫하면 잘못 된 길로 돌아서서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새로운 원칙이 생겨났다. 처음부터 자신은 문화재의 복원에 목적을 두었으니 죽는 날까지 개인의 이름을 앞세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넘겨주어 소중한 문화가 사유화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인지 그의 측근에는 예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여러 명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조현숙 회장이 사람을 이용 한 후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조현숙 회장이 그들을 내친 것이 아니라 소중한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빚어졌던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오죽하면 개인 돈 1억5천만 원이 넘게 들어간 일에 대하여, 적당한 후계자가 나타나면 기꺼이 물러서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겠는가.  

그 뒤로 조현숙 회장의 측근에는 수고비를 받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는 언론을 포함하여 작가와 기자출신도 들어있다. 또한 문화계의 유명인사와 현역 기자들도 있다. 그리고 문화계 특정 단체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그간 익산목발노래라는 문화재와 그의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조현숙씨의 행적을 보아 진정성과 신뢰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성! 그리고 신뢰! 문화계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여기까지의 내용을 접하고 나서 뒤늦게 합류한 사람에 속한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하여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도 열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의 일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전국학생농촌사랑농요부르기대회! 이것은 익산목발노래보존회가 주최하는 전국대회다. 작년에 이어 2013년 올해에 2회째를 맞고 있다.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치르는 전국행사가 성대할리 없지만, 그래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는 옆에서 도와주는 특정 언론사가 있어 많은 힘이 되었다. 또 최준씨와 같이 한 푼의 수고비도 받지 않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준씨는 익산목발노래가 문화재로 재지정되기까지의 기획과 실무에 대한 보상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피를 나눈 친척으로서, 보상보다는 진정성으로 일관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회원들의 성의였다.

올해는 전국학생농요대회에 익산시청소년수련관의 방과후 아카데미학생들도 출전하였다. 그래보아야 농요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니 감히 실력으로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가락을 배우고 우리 문화를 지켜나가겠다는 생각이 가상하다 하겠다. 여기에서 아낌없이 지도를 한 것 역시 익산목발노래보존회다. 학생들의 전공과목도 아니고 동아리활동도 아닌 데 잘하면 얼마나 잘할 것인가. 그러나 모두는 열성을 가지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익산목발노래보존회 조현숙회장이 바라던 진정성이었다. 어떠한 사심도 버리고 오직 문화만을 생각하는 자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였다. 이들의 농요에 대한 기억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언제 다시 농요를 부를지 알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존해가는 것이 문화인의 사명이라는 것도 아는 회원들이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따뜻한 털옷 대신 한 겹 무명옷을 걸치며, 한 여름 무더운 날에도 민소매 반바지 대신 지게를 지고 흰 옷을 입는 회원들이다.

이제는 사설이 아닌 번듯한 연습장이 생겨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조회장님이 바라는 대로 그렇게 된다면 농요를 배우고저 전국에서 모여든 꿈나무들이 그냥 돌아서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조현숙회장의 고민이 깊어진다. 이제 힘들어서 그만 하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개인의 노력은 이제 그만 끝을 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장치적으로, 우리 고유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계승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