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익산! 3000년 세월의 흔적

종교의 순례지! 익산을 순례해 보셨나요?

꿈꾸는 세상살이 2013. 11. 13. 21:03

종교의 순례지! 익산을 순례해 보셨나요?

 

익산이 백제시대 혹은 그 전 마한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역사의 도시라는 점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러니 세월 속에 담겨진 사연이 많은 것은 물론이며 그에 영향을 끼친 여러 사상이 있었음도 짐작할 만하다. 한편 우리 주변에 밀착하여 부대끼며 어울려 생사화복에 대한 일체를 주장하는 종교를 불교와 천주교, 기독교, 유교, 원불교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처럼 각자가 서로 배척하는 듯하면서도, 유독 익산이라는 도시에서는 서로의 위치를 지키면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 특이한 경우에 속할 것이다. 그것도 그냥 소소한 일상이 아니라 국가에서 선정하여 종교적·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지정한 곳이라면 말이다. 혹자는 이런 익산을 두고 종교의 천국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사람이 사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주 커다란 축복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런 일들이, 남에게는 네 잎 클로버와 같은 행운이지만 우리에게는 늘 우리 곁에 있는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행운과 행복을 그냥 글자 한 자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나아가 어쩌면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가까운 곳에 있는 성지(聖地)를 찾아 나서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종교의 복합순례지 익산에서 연로하신 분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륵사지이며, 젊은 층에서 먼저 떠올리는 것은 원불교다. 미륵사지는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웠던 미륵사지석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며, 신진세대는 한의대와 의대 그리고 치대가 있어 대학진학의 통로가 되는 원광대학교와 함께 원불교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미륵사지(彌勒寺址)는 글자 그대로 미륵사가 있었다는 절터를 말하는데, 신라가 국립으로 세운 황룡사(黃龍寺)와 백제가 국립으로 세운 미륵사가 쌍벽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절터의 넓이는 황룡사가 조금 더 넓으나 금당이나 당간 등 모든 면에서 미륵사가 더 웅장하였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절의 상대적 규모나 형태, 혹은 사찰의 기강을 잡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둘은 국내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사찰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2개의 당간을 세워 모든 사찰의 총 본산임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당시 미륵사는 백제의 서동왕자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을 한 후, 사자사의 도승을 만나러 가던 중 불력(佛力)의 도움을 받아 세운 절이라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사자사는 금마면 기양리 일대의 미륵산 중턱에 있는 현재의 사자사(師子寺)를 의미한다. 그러나 신용리에 있는 사자사는 무왕(武王) 당시의 건물이 소실된 후 수 차례 거듭하여 고쳐 지은 절이며, 사자사지는 무왕 때의 사자사가 있었던 절터만을 의미한다. 실제로 방문하여 보면 사찰에 오르는 산길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범접하기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사자사 방문기에서 이 절에 가는 것만으로도 벌써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았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참에 미륵산 아래 넓은 터에 미륵사를 지은 것은 사자사의 정기를 그대로 내려 받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서기 639년 기해년에 세워진 국보 11호 동양최대 석탑이 있는 절, 전국 472개 돌탑 문화재를 포함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석탑이 있는 절, 보물 236호의 석당간지주가 있는 절, 국립을 상징하는 2개의 당간이 있는 절, 노아의 방주라고 추정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듯이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지질학적으로 확인 된 절, 그리고 한 사찰에 세 개의 금당과 세 개의 탑을 가지고 있어 동양에서 유일한 1가람3당 형식을 띠는 절, 탑을 세운 기록이 남아있는 절 등 아주 절대지존의 사찰이 바로 미륵사인 것이다.

현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원래 미륵사의 1/50로 축소하여 만든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어느 불교학자라도 미륵사를 연구하지 않고 사찰을 논한다면 제대로 된 연구일까 할 정도로 심오한 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미륵사지는 국가 사적지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사찰의 종파와 족보에 따라 엄연한 질서가 성립하겠지만, 그와 관계없이 옛 사찰을 둘러보고 불교의 참 도를 이해한다면 그 또한 성지순례에서 얻는 행복 중 하나일 것이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 사리봉안기는 미륵사가 국내 최고의 문화재적 가치를 담은 사찰이라고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신라의 문화에 비해 백제는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모든 면을 갖추고 있어 뛰어난 예술성에 다시 한 번 놀랐던 것이다. 현재까지 미륵사지 한 군데에서 발견된 유물이 총 20,000여점에 달하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사찰로 지은 국립사찰에 버금하여, 왕과 왕족 등 최고의 권력층이 다니던 전용사찰이 있었으니 바로 왕립 제석사(帝釋寺)이다. 제석사는 국가 사적 제408호인 왕궁리유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왕궁면 왕궁리에 절터만 남아있어 사적 제405호 제석사지로 지정되어 있다. 비록 건물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의 글자나 사찰의 형태·축조 과정을 살펴보면 무왕의 익산천도설(益山遷都說)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느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4대 고도지역 중에서 익산만이 유일하게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타 도시는 왕의 무덤이 거의 전부이지만 익산은 기본인 왕릉을 비롯하여 왕궁과 성벽, 그리고 호국사찰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익산에 까마득하게 멀었던 1,500년 전의 사찰이 복원된다면, 불교인으로서 어느 누가 익산을 홀대할 것인가. 물론 과거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 없는 현재는 생각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니겠는가...

 

조금 규모가 작지만 함라산에 있는 천년고찰 숭림사(崇林寺)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지어진 절로 여러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보물 제825호 보광전을 비롯하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와 189호가 있는 숭림사는 사자사와 견주는 익산 현존 사찰 중의 하나이며, 여름 더위를 피해 즐겨 찾는 사찰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웅포면 송천리의 ‘숭림사’라는 명칭은 남천축의 달마대사가 중국의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서 벽을 향한 채 9년의 좌선을 행했다는 뜻을 받드는 숭산의 숭(崇)과 소림사의 림(林)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중국을 모방하였다는 것은 존심이 좀 상하는 대목이다.

 

 

다음에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신용동에 있는 원불교(圓佛敎)의 총 본산이다. 이곳은 서울을 향하여 강진에서 천안까지 연결되는 국도 23호선으로, 시가지를 막 벗어나는 곳에서 원광대학교와 길 건너로 마주하고 있다. 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 소태산 박중빈에 의해 전남 영광에서 발원되어 세계적으로 뻗어가고 있는 종교이다. 이후 1924년 4월 익산시 신용동에 본부를 두고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는 원(圓)이라는 점과, 부처(佛)의 가르침, 그리고 가르쳐서 깨우치자는 교(敎)가 모여 만든 이념이다. 이 해에 불법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주경야독으로 개척과 정신훈련을 병행하여 현실에 다가섰다. 자력갱생으로 마련한 자금으로 원광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창시자인 박중빈 이후에 송 규, 김대거, 이광정, 장응철종법사를 거치는 동안 제13대 종법사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 역시 불교와 같은 형식으로 창설 첫 해인 1916년을 원기 1년으로 계산하고 있다.

 

원불교는 자체적으로 총 본부가 있는 익산시 신용동 원불교역 일대를 원불교 성지로 지정하고 있으며, 창시자의 탄생지이며 처음 구도지였던 영광군 백수읍에, 그리고 2대 종법사 정산종사의 탄생지인 성주군 조정면과, 원불교 최초의 도덕 훈련장이었던 진안군 성수면의 만덕산에 성지를 가지고 있다. 만덕산은 만 가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의미인지, 만 가지 덕을 쌓은 사람이 찾아가는 곳인지 해석하기 나름이다.

기관에서는 원불교 총 본부 내부의 일부 시설물에 대하여 등록문화재 제179호 원불교 익산성지로 지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원불교에서 자체적으로 정한 익산성지는 원불교 교역 전부를 일컫는 말이며, 기관에서 정한 원불교 익산성지는 여러 시설물 중 초기의 특정 시설물 일부에 국한된 것임을 구별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교당을 보면 익산시의 모든 읍면동에 하나씩의 교당이 있으며, 타 지역에서는 시군별로 각각 몇 개의 교당을 두고 있다. 군(軍)에서도 원불교 교당을 세우고 군종장교와 군종사병을 둘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세계적으로 보아도 주요 도시에 한두 개의 교당을 가질 정도로 보급되고 있다.

이러한 원불교 역시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빈농의 아들에서 태어나 대각에 이르는 과정과, 1924년 5월 교안의 초안을 만든 후 이념을 완성하기까지는 끝없는 구도의 길이었다. 이 외에도 1917년 저축조합 결성, 1918년 고향 앞바다 간척사업, 1926년 가정의례준칙 발표, 1935년 보화당 개업, 1940년 삼례농장 개설 등 근검절약과 계발 등이 주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원불교 총 본부에 들어가면 시내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조용하며, 아담한 정원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눈을 감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름지기 종교적인 냄새가 풍기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 세워진 동남쪽의 높은 돌담은 바깥세상과 분리되는 또 다른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부에는 원불교 주요 시설인 대각전, 청하원, 구정원, 정신원, 본원실, 금강원, 종법실, 공회당, 대종사성탑, 대종사성비 등 문화재지정 관련시설물이 있다.

종교적 가치를 지니는 원불교 성지순례코스 중 대표적인 원불교 총 본부가 익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념할만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개화기에 끼친 영향도 자못 대단하다. 국가의 동량을 키우는 학교법인과 원불교 교리를 가르치는 원불교 대학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에 속한다. 강점기 시대에는 교화의 산실이었던 원불교를 직접 감시하기 위하여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를 원내의 청하원에 두었을 정도로 구심점 역할도 하였었다.

청하원은 구정원, 정신원과 함께 원불교 관련 개인사택으로 지어졌다가 원불교 총부에 희사된 건물이며, 정신원은 이리보육원의 전신인 익산보화원이 있었던 곳이다. 건축 당시 호화롭지는 않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건물이었음을 감안할 때, 종교에 대한 개인 재산의 희사도 불사할 만큼의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밖에도 지명에서 유래된 도치원은 불법연구회의 건물로, 금강원은 소태산 거처 사택으로, 공회당은 대강당으로, 종법실은 다목적 사무실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1953년 1월 29일에 개설된 원광대학교는 1951년 9월 5일 원광초급대학으로 발족하였으며, 그 유래는 1946년 5월 1일 유일학림에서부터 시작된다. 1965년 1월 30일에는 원광학원을 설립하여 대학교, 원광중고등학교와 원광여자중고등학교, 그리고 원광정보예술고등학교를 갖췄으나,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는 1990년 8월 22일 설립된 원창학원에 소속시켰다.

원광대학교는 국내 몇 안 되는 치과대학이나 한의과대학, 의과대학, 약학대학, 로스쿨 등을 갖추고 있으며, 3차 진료기관인 대학병원과 특수병원인 한방병원 및 치과병원까지 운영하여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더불어 원불교 재단은 원광의원과 원광 보화당, 익산약국 등을 운영하고, 요양시설인 원광효도마을과 사회복지시설 삼정원, 기관에서 위탁받은 익산유스호스텔 등 여러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익산사람으로서 원불교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신도 수는 전체인구의 0.3%라는 수치가 말해주듯 아직까지는 미미한 수준이다. 구체적인 자료에 의하면 2008년 말 기준으로 10%인 5백만 명이 종교인이며, 그중 13만 명이 원불교인으로 종교인 대비에서도 2.6%에 그친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아직은 신흥종교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종교를 말하면서 기독교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전 세계 인구의 약 1/3인 21억 명이 기독교인이라는 통계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수치는 지난 100년간 크게 변함이 없지만 예전의 유럽 중심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의 확대가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기간 역시 100여년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국내 최다 신도 보유로 급부상하고 있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익산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00년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구츨라프가 금강 입구의 안면도에 정박하여 선교한 1832년으로 훨씬 앞서 있다. 이어 1884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의 인천상륙, 1894년 2월의 전주선교부 개설과 3월의 이눌서 및 유대모 선교사의 군산상륙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1896년 2월에는 군산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익산지방에도 그의 영향력이 파급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익산시 최초로 함라면 함열리의 예수교장로회 함라교회가 설립되었으니 그 때가 1900년이었다.

예전의 함라는 산이 좋아 물이 좋았던 곳으로, 넓은 농토를 중심으로 소출이 많았으므로 더불어 인심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이런 곳에 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민중을 파고드는 기독교 문화가 전파된 것 또한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0년대의 익산시 기독교인 비율은 약 30%로 전국에서 가장 높게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함라교회에 대한 기록이나 증빙 자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관련 자료는 6․25를 겪으면서 모두 소실되었고, 그 이후에는 농촌의 쇠락으로 교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김갑수 목사를 비롯하여 신도 80여 명이 예배를 보는 농촌교회로 변하였다.

 

기독교는 도입 당시 상황으로 보아, 쇄국정책에 의한 폐쇄적인 국가 운영과 부정부패를 타파하는 동학혁명의 발발로 호기를 맞는 듯하였다. 또한 일본의 침략주의가 작용하여 실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암울할 현실에서 벗어날 돌파구를 제시하는 구세주의 교리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적 영향인지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함라교회에 이어 1901년의 황등 동련교회와 오산 남전교회, 1903년의 삼기 서두교회, 1904년의 망성 무형교회, 1906년의 웅포 웅포교회와 고현교회(설립당시 : 익산면 고현리), 웅포 제석교회(설립당시 : 대붕암교회), 용안 송산교회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오산면의 남전교회는 몇 사람이 모여 집에서 예배를 보던 1897년을 교회 설립 초기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남전교회가 익산에서는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로 기록된다.

특별히 초기 교회에서는 일본 강점기 정책에 맞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립학교를 설립하는가 하면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가입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익산 4․4만세운동 역시 기독교가 주축이 된 거사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경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수많은 고초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항거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났다. 그런가하면 1922년에 등장하는 두동교회에서는 6․25동란 때 마루 밑에 숨어 목숨을 건진 이가 여럿 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교회가 목숨을 살리는 곳이라고 해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성당면 두동리의 두동교회는 부곡리의 부곡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는데, 이 부곡교회는 위의 함라교회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분립된 교회였다. 두동교회는 전통적인 한옥형태를 띠며, 사각으로 다듬은 목재기둥에 발을 엮어 흙을 바른 바름벽을 하고 있다. 지붕 역시 서까래를 깔고 대들보를 얹었는데, 네 면에서 모두 지붕이 올라간 함석 우진각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구조가 ㄱ자 형태를 하는 고패집이라는 것과, 내부에서는 좌우측을 빤히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패집으로 낯이 익은 집은 여산의 가람 이병기생가를 들 수 있다.

이런 형식은 교회 설립당시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상으로 남녀석을 분리․배치하는 방식에 속했으며, 현재는 김제시 금산면의 금산교회와 익산 성당면의 두동교회만 남아있는 구조다. 그렇게 보면 1908년의 금산교회와 1922년의 두동교회는 초기 건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금산교회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이며, 두동교회 구 본당은 문화재자료 제179호이다. 유독 전북에만 이런 기독교 성지가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설립당시부터 그렇게 많지 않은 숫자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주업이었던 농업을 통하여 경제적인 부가 형성되었기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행동이 관대했던 까닭은 아닐지 추측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서운한 점은 ㄱ자 교회를 얘기하면 어찌하여 김제시 금산면의 금산교회를 유일한 자료라고 우기는 가 이다.

여기서 굳이 그 이유를 캐자면 같은 우진각이면서도 금산교회는 기와지붕이라는 점, 조금 일찍 지어졌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재 지정일자가 1997년 7월 18일로 두동교회 2002년 4월 6일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 짧은 5년의 공백 동안 전국의 ㄱ자 예배당은 오로지 금산교회에 가야 볼 수 있다는 성지로 자리메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두동교회가 있는 두동마을은 편백나무 숲으로도 유명하다. 요즘 전국적으로 불고 있는 편백 숲의 피톤치드효과 덕분에 두동마을 역시 유명해지고 있다. 훌륭한 문화재가 있는 곳이면서도 정작 편백으로 더 유명해진 마을이라면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설픈 해석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두동교회에서 마음의 치유를 얻는 다고 가정할 때, 두동의 편백나무 숲에서는 육체의 치유를 얻는 다는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요사이는 많이 약화되었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위세를 떨쳤던 유교도 잠깐 짚어보기로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충효와 삼강오륜은 인간이 서야 할 자리를 알려주는 좋은 단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내용의 어원은 논어와 소학, 사서삼경 등 유학의 주된 내용에 포함되어 있으며, 유학을 비롯하여 창시자와 수제자들을 받들어 모시게 되면서 유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유학에 대한 교육기관을 들자면 기원전 5세기 경 멀리 중국의 곡부(曲阜)에 세계 최초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372년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 국립 태학(太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어서 백제 초기의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와 782년의 신라 국학(國學)도 설립되었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992년의 국자감(國子監)이 등장하며, 1119년 예종 14년에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국자감은 국학 또는 성균감(成均監) 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1356년 공민왕 11년에 ‘성균관(成均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 당시는 주로 공자(孔子)의 사상을 교육하였지만, 조선에 와서는 제향(祭享)을 덧붙여 유교의 유물로 자리 잡게 된다.

교궁 또는 재궁으로 불리기도 하는 향교(鄕校)는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균관과 유사하게 유교문화의 이념을 수용하였으며, 억불숭유의 정신을 무장시키는 교육기관으로도 활용되었다. 향교는 설치되어 있는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고 운용하였으며, 유교 선인들에 대한 제향과 유학을 비롯한 특정 사항에 대하여 교육을 담당하였다.

성균관은 대성전(大成殿)에 공자 즉 대성지성선문왕(大成至聖文宣王)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4성인과, 공자 집안의 10철현, 송조의 6현이 모셔져 있으며, 왼쪽 사랑채인 동무(東廡)와 오른쪽 사랑채인 서무(西廡)는 우리나라의 18현이 있어 모두 39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각 지방에 설치된 향교는 위와 같은 39현을 기준으로 하여 조금 줄여 모신 것이 일반적이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성인(聖人)을 모신 신전의 의미로 대성전이라 부르며, 대성전을 갖추고 있는 향교와 성균관은 유교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향교 앞에 가면 먼저 하마비(下馬碑)를 만나는데, 이는 교육상 조용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신단에 계신 위령에 대한 복종의 예절도 한몫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향교는 각 지방마다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우리 익산지방에만 존재하던 특별한 기관은 아니었다. 따라서 향교가 익산만의 자산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명칭만이라도 알고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 생각되어 거명해본다. 익산권역에는 1398년 조선 태조 7년에 세워진 익산향교, 1403년 조선 태종 3년에 옮겨 지은 여산향교, 1406년 조선 태종 6년에 세워진 함열향교, 고려가 패망하기 직전 해인 1391년 공양왕 3년에 세워진 용안향교가 있다. 이들은 각각의 대성전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혹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보존하고 있다. 위 연대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용안은 예전부터 포구를 활용하여 안정된 생활권이 잘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수적이면서 전통적인 색채를 띠는 천주교는 기독교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천주교는 13세기 경 유럽에서 중국 원나라에 전파되었으며, 이후 1534년에는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국(異國) 종교에 대한 인심은 폐쇄적이어서 일본 역시 17세기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금교정책으로 천주교가 숨어들게 되었다. 이 무렵 강력한 유교의 영향권에 있던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보급의 시도가 있었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종교적인 목적 외에도 서양문물에 대한 인식으로 적지 않은 접촉이 시도되고 있었으며, 17세기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천주교서적도 도입되었다. 이어 1784년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라는 의미의 베드로가 되었으며, 1791년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중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은 후, 10월 12일 밤 8시 경 라파엘호를 타고 강경포구 황산나루터로 귀국하였다. 당시까지도 천주교에 대하여 허용이 되지 않았기에 비밀스러운 상륙이었으며, 다음 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 후 경인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 5일 체포 된 후 9월 6일에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1925년에는 복자(福者)로 인정받았으며 1985년 5월 5일에는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

천주교계에서는 이런 김대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최초로 발을 디딘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1906년 천주교회를 착공하여 1907년 12월 준공을 하니 화산천주교회가 되었다. 화산(華山)은 산이 아름답다 하여 우암 송시열 선생이 붙인 것이라고 전한다.

이때의 건물은 제3교구장이면서 화산교회의 초대신부인 베르모레르가 총감독을, 설계는 명동성당과 전동성당의 설계를 담당했던 프와넬신부가, 시공은 중국인 기술자를 동원하여 정면 5칸에 측면 13칸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1916년에 종각을 세우면서 본당의 일부분을 벽돌로 바꾸게 되니 한식과 양식이 혼합된 특이한 건축물이 된 것이다. 현재도 동양사상에 따른 팔괘형식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 사제가 신도들에게 등을 보이며 같은 방향으로 서서 제를 드리는 제단이 남아있는 귀한 역사(歷史)가 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87년 7월 10일 국가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내부에 있는 많은 기둥들은 당시 칸막이를 하여 남녀석을 구분하던 흔적으로 성당면의 두동교회와 같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유교에 반하는 서학이 도입되면서 일시에 모든 관례를 깨뜨리면서는 좀처럼 다가설 수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결과였다. 교회에 대한 명칭은 예전의 ‘화산천주교회’에서 1989년부터 ‘나바위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나바위는 너른바위로 화산 끝자락의 넓은 바위에서 유래하였다. 성당 뒤편에는 옥외 제대와 성모 동상, 십자가의 길, 김대건신부 순교기념비, 망금정 등이 있다. 또 멀지 않은 인근에는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지은 피정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산까지 물이 들어왔으나 1925년 강점기시절 간척공사를 통하여 농지로 바뀌었다.

화산천주교회는 1908년 계명학교를 세워 주민들을 깨우쳐나갔으나, 1925년 10월 15일 학생들의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이를 거부하다가 1926년 자진폐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1929년 다시 문을 열었지만 1947년 4월 14일 재정난과 함께 사회적 분위기상으로 자진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천주교의 사립학교가 개화기 우리나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은 확실하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병원에 이르기까지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와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화산천주교회 인근에서는 여산 백지사지와 여산 숲정이성지도 만날 수 있다. 백지사지는 일반 절터와 달리 백지(白紙)를 얼굴에 붙인 후 물을 뿌려 호흡이 곤란하게 하여 죽이던(死) 곳(址)이다. 이곳은 여산 동헌마루 뜰아래에 있어 관헌들이 천주교 신자를 벌주고 처형하던 곳이었으며, 지금은 얼굴에 한지(韓紙)를 붙인 모형을 만들어 신앙의 굳건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한편 여산 숲정이성지는 천주교가 지정한 성지로 전주의 숲정이성지와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인근에 비하여 숲이 많이 우거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완주나 무주를 포함하여 익산 외지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 화산천주교회 본당 소속 신자가 1929년 당시 3,2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컸었다는 기록에 수긍이 간다.

이들은 처형당시 입었던 솜옷이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뜯겨져있었는데, 갇혀있는 동안 너무나 배가 고파 섬유질인 옷을 씹어 먹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당시 종교에 대한 제약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고초와 수난을 당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혹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종교문제로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중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위에 거론한 내용 외에도 우리가 기념할만한 종교적인 건물이나 유적지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 또한 절대자의 사명에 의하여 각기 다른 소중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니 특정 종교나 어떤 사상을 따지지 않고 바라보면 좋을 듯하다. 객관자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종교에 관하여서는 전국을 통틀어 오로지 익산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원에 대하여, 종교적 판단 이전에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 이라도 인정하는 상호존중의 자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