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독후감, 독서

태극기를 휘날리다

꿈꾸는 세상살이 2014. 6. 3. 18:08

 

 

태극기 휘날리다

김이경/ 아이앤 북/ 2014.02.20/ 167쪽

저자

김이경 :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아동문학부문에 당선, 인문학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일하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글을 쓰며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성자가 된 옥탑방 의사』,『정선』,『제인 구달』등을 썼으며,『마법학』,『산호초』,『내 꿈은 엄청 커』,『너는 우주야』,『만델라』,『갈릴레오』,『그리스인 조르바』등 30여 권의 책을 번역하였다. 경기도 산속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주인공

서경덕 :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정과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대학생 때 서울 저도 600년을 맞아 타임캡슐에 들어갈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의 홍보전문가로 거듭났다. 이후 월드컵을 홍보하기 위하여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등 세계 유수의 언론과 뉴욕타임스스퀘어와 같은 유명 관광지에 정부의 지원 없이 자비와 국민들의 성금으로 홍보를 하고 있으며, 독도학교 초대교장, UN 새천년목표개발지원 특별자문위원, 세종학당재단이사,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자문위원, 성신여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등으로 일하며 일본과 중국의 대 한국역사왜곡에 맞서 외국을 설득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

다.

줄거리

주인공 서경덕은 고등학생 시절만 하더라도 말썽꾸러기에 사고뭉치인 흔한 말로 문제아에 지나지 않았으나, 공부도 잘하고 의지도 매우 강한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 대학입시에서 두 번을 실패하였으나, 첫 번째 시험에서 후기로 합격한 성균관대학의 조경학과에 부모님이 몰래 등록을 하고 휴학 처리해 놓았던 사실을 알고 그 대학에 다니기로 하였다.

막상 대학에 왔으나 마음에 드는 의미 있는 일거리를 차지 못하던 때에 마침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정도 1000년에 공개할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를 공개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23,940명의 대학생 설문조사를 통해 미래 사회의 예측에 관한 기획안을 만들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여기서의 23,940명은 서울 정도 1000년이 2394년이며 그의 10배수였던 것이다.

갑자기 유명해진 동아리 '생존경쟁'은 초심을 잃지 말자는 각오로 앞다퉈 후원하겠다는 단체의 제안을 뿌리치며 일을 벌여나갔다. 두 번째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가로150m*세로120m의 초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세계 기네스에 올리자는 것이었는데, 막상 만들었을 때 태극기를 펼칠 장소를 찾지 못해 중단하고 말았다. 이 기획은 비록 최종단계에서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 도정 정신은 성공한 바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스스로 만족하는 정도에 그쳐야했다.

세 번째 프로젝트는 1996년에 입안된 것으로 2002년 한국월드컵개최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아주 오래 전부터 국제축구연맹을 설득하고 필요한 인원을 포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후였다. 늦게 유치전에 뛰어든 한국은 그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서경덕은 이를 동아리에 알리고 거들고 나선 것이다. 전국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외국인에게 한국월드컵유치 염원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국대학생아마추어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얼마 전까지 후원하겠다고 나서던 기업을 찾아갔으나 일방적인 3시간의 기다림 끝에 기획안을 건넸으나 잠시 뒤 자신의 기획안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일로 인하여 기업이나 기관은 말로만 후원을 할 뿐 정작 필요한 때에는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돈을 벌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쓰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물론 그 사용처는 대한민국을 알리고 위하는 일이었다.

2002년의 월드컵은 한일양국 공동개최로 치르게 되었지만, 처음 일본 안에 비하면 대성공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 배낭여행애 나선 동아리 일행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아리랑, 애국가, 고향의 봄, 아리랑목동, 독도는 우리 땅 등의 노래도 부르면서 이색 홍보전에 들어갔다. 두 달 동안의 여행에서 느낀 점은 한국은 아직 세계 속의 한 점일 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후 한일월드컵으로 다소 가까워진 듯 한 양국은 2005년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2월 22일 다케시마의 날을 정한 시네마현의 의회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접한 서경덕은 7월 27일 세계 최대 부수를 발행하며 가장 신뢰받는 신문인 뉴욕타임스의A섹션에 1/6크기로 'DOHDO IS KOTRA TRRRITOLY'라는 광고를 냈다. 당시 루비통, 샤넬, 벤츠, 페라리 등과 같은 명품의 선전장이었던 곳에 광고를 내는 것은 아주 신선한 도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대 돌풍이 불었다. 이런 광고를 정부가 아닌 개인이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그것도 자비로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개인의 애국심과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말없는 지원자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뒤에는 많은 국민과 네티즌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대한민국의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중 2007년 3월 1일 제88주년 삼일절을 즈음하여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발언은 우리를 격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정부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당사자들의 잘못이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서경덕은 워싱턴포스트를 찾아가 위안부는 일본 정부의 강제 동원이었다는 광고시안을 제출하였다. 평소대로라면 광고 게재의 여부를 가리는 심의가 1주일 걸렸으나 제출 하루 만에 통과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는 증거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광고 하나의 게재가 아니라 미국 국민과 미국 언론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당시 국제 분위기는 미국을 비롯하여 독일과 유럽연합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등 주요 국가가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고 나서는 참이어서 우리에게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서경덕이 이런 일을 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결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용을 알리는 편지를 1,100통이나 보냈고 그 비용으로 1천만 원이 넘게 들어가는 사전 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명인사에게 보내는 이메일은 무려 20여 명이 2주일이나 걸리는 작업 끝에 이루어지는 대 역사가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또 150여 국가 정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내용을 전파하는 것은 젊음과 열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맞서는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며 각종 로비스트를 동원하여 상황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리도 뉴욕 한인회에서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일본은 국회의원만 45명이 동원되었고 교수와 언론인 그리고 정치가와 평론가 등 전방위적인 지원을 받아 일본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는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성경에 나오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처럼 비쳐지는 대목이었고, 결국은 작은 다윗의 일방적인 승리였던 것처럼 끝이 나고 말았다. 미국 하원의 외교위원회에서 6월 15일 '위안부 강제 동원'이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때문이었다.

2007년 7월 9일은 뉴욕타임스에 김장후의 지원을 받아 독도홍보용 광고를 냈다. 이로써 서경덕은 김장훈과 의형제를 맺었고, 2008년 12월 23일'미안하다 독도야!'라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를 제작∙상영하였다. 내용은 어린 학생부터 80이 넘은 노인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을 주인공으로 하였으며, 이 영화를 통하여 서경덕과 김장훈이 국민과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호응한 네티즌들이 성금을 모아 보탰고, 그 성금으로 2008년8월 25일 워싱턴포스트지에 독도광고를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국가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더 많이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이에 고무된 해외 동포들은 광고 문안을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언론에 광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2009년 8월 12일에는 워싱턴포스트지의 독도 홍보용 광고는, 기존의 일본해로 표기된 것은 잘못이라는 내용을 실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로 잡는 일에 나선 것이다. 당시 언론의 위상으로 보면 자칫 비위를 거스릴까봐 조심해야 했지만 일대 가르침이라는 사건을 만들었으니 가히 도발적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에 호응이라고 하는 듯이 미 한인사회의 참여센터는 2010년 10월 23일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강제 동원된 일본군위안부 추모비를 세웠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서경덕과 김장훈은 2011년 12월 29일 월드스트리트저널 아시아판과 2012년 3월 28일 뉴욕타임스에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광고와 함께 위안부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1,000회 달성 내용을 실었다. 일본은 이에 격분하였고, 팰리세이즈시에 추모비를 철거하면 재정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시로부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2012년 5월 30일 뉴욕타임스 A섹션 15면은 전면광고를 실었는데, 내용은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간결하지만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었다. 독일의 총리 빌리브란트는 나치라는 이름을 떠 올리며 분노하는 폴란드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0년 12월 7일 대표적인 기념지를 방문하고 초겨울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묵념하는 모습이었다. 일본 역시 독일처럼 과오를 반성하고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염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에게서는 그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일본은 계속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을 감추기에 급급하였으며, 위안부는 동원된 것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한국인들이 강제로 납치하여 보냈다는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러나 서경덕과 김장훈은 계속하여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담담하고 그리고 냉정하게 대처하였다. 신문에 한글과 한식, 한복과 막걸리, 아리랑 등 한국적 이미지를 알리기 시작하였고, 일부는 옥외광고판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 제2의 기부천사로 알려진 송혜교가 동참하게 된다.

서경덕의 활동이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펼쳐질 즈음 정부주도로 독립기념관에 연 3,000명이 참여하는 독도학교가 개설되었고, 그 초대 학교장에 서경덕이 임명되었다. 일본은 아직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교과서에 그런 내용을 적고 있는데 반해, 우리 정부로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최초의 행동이었다.

감상

서경덕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 대하여 정열을 불태우는 신념의 사나이였다. 설령 잘못 판단한 것일지라도 당시에는 심사숙고하여 옳다고 판단한 것이므로 그대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확실한 국가관과 올바른 사고가 있었기에 많은 국민들이 원하는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가족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넉넉함도 커다란 지원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경덕이 어렸을 적부터 각종 신문이나 서적을 통하여 확고한 국가관을 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를 지원하는 주변 인물들이 없었다면 결코 혼자서는 이루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냥 주변의 도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경덕의 하는 일이 바람직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이므로 원래의 씨앗은 자신이 뿌렸다고 할 수 있다.

서경덕과 김장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은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세월호의 참사를 비롯하여 전방위적인 무능과 부패의 고리를 보면 썩어빠진 시정잡배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서경덕은 국가의 도움이 필요한 때에 나서서 무엇을 해주었는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말임과 동시에 아예 그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다는 증거이다. 수수방관만 하다가 그냥 말로만 '힘내!' 아니면 '일본은 책임져라!'하는 립서비스만 하니 얼마나 편한 정부였을까. 애국자들의 마음속으로는 한심한 정부라는 생각과 함께, 그런 일을 벌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슬픔이 앞섰을까.

나는 일본의 총리가 독일의 빌리브란트를 본받기 전에 우리 정부의 지도자들이 본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러운 친일파를 청산하기는커녕 그런 자리를 아직도 꿰차고 앉아서 군림하는 그 버릇은 죽어서도 뉘우치지 못할 말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은 우리의 독립군 후예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법과 사회가 감싸주기는커녕 있던 직장마저 빼앗기고, 누구나 누려야 할 정당한 생존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아직도 강점기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국가에서 어떻게 일본을 탓하고, 일본을 성토하고, 일본을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반성해보아야 한다.

2014.05.14

'내 것들 > 독후감,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만 페이지의 독서력  (0) 2014.06.03
그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0) 2014.06.03
책과 노니는 집  (0) 2014.06.03
삶으로 말하는 독서  (0) 2014.05.01
한반도를 내 품에   (0) 201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