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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전라도

꿈꾸는 세상살이 2014. 7. 20. 14:25

 

역사로 보는 전라도

이희권/ 신아출판사/ 2001.08.30/ 220쪽

저자

이희권 : 전북 완주출생, 전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전북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조선후기 지방통치 행정연구』,『조선 전기의 공관연구』,『조선 후기의 공관, 권당 연구』,『고려 군현제와 지방 통치 정책』,『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 연구』등이 있다.

줄거리 및 감상

전라도는 고려 훈요10조에서부터 차별받는 고장으로 통했다. 차별을 받더라도 좋게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나쁜 감정을 주면서 멀리하는 정책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저자는 사학과를 나온 사람답게 여러 각도에서 역사를 조명하면서, 전라도가 훈요 10조에 나오는 정도로 나쁜 지역이며 그곳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답은 한 마디로 그렇지 않다 이며, 오히려 그런 내용들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날조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나중에 왕들의 정치를 돕고자 하여 만든 훈요 10조라는 것이 사실은 훨씬 후대에 인위적으로 날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로는 고려 태조당시의 지리적 역할과 개국공신들의 분포를 보면 전라도가 결코 고려에 반항을 하거나 역모를 할 지역적 혹은 인적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태봉을 싫어했던 후백제의 인물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공주를 근방으로 하는 금강 지역에 대한 해석을 차령산맥이라는 단어로 끌어 맞추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훈요 10조에 나오는 금강은 공주를 말하며, 공주를 둘러싼 금강은 개경에서 보는 역방향이라는 것과 후백제 유민의 준거지였다는 것이 그런 증거이다.

특히, 금강 이남의 차령산맥 이남의 전라도는 등용하지 말고 차별하라는 말은 강점기에 만들어낸 것으로, 그 이전에는 산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았었다. 그러면 일제는 전라도를 왜 싫어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없다. 그러나 임진란이나 정유란에 비추어 보면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저지한 방어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해양제국 일본에게 역사에 유래 없는 참패를 안겨준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왜군은 임진란에서 마지막 보루를 남겨두었다가 되돌아서는 미련이 있었던 곳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제는 사사건건 의병을 일으키고 항거하던 전라도를 좋게 볼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후에 친일에 쪄들은 앞잡이들은 해방 후에도 계속하여 일본을 두둔하였고, 일제의 답습과 훈요 10조의 오해를 계속 활용하면서 전라도 핍박의 빌미로 삼았던 것이다.

전라도 전주에서 일어난 조선의 정여립사건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정여립은 동인으로 유림의 학자였으나 서인에 의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며 그의 언변이 좋았고, 학문 또한 뛰어나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이이와 교류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정여립을 서인이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들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여 정여립을 역모에 엮을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얼마 전부터 먼 곳의 패거리를 꾀어 정여립과 일부러 알고 지내게 하면서, 이를 거국적인 역모 준비라고 선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훗날 치국에 의하여 거짓이었고 모두가 날조된 것이라는 자백을 하였던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의 주동에 조헌과 정철이 앞장섰으며, 졸개들은 정철이 꾸며낸 계략이었음을 자백하였다. 또한 정여립은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평등하며 사람 위에 사람이 없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역모를 통해 세상을 엎어보자는 정도의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었다면 전국에서 장수들을 모아 거사를 꾸미기 전에 발각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거사 직전에 밀고로 발각되었으며, 정여립이 땅바닥에 칼을 꽂아놓고 자기 목을 내어 자결하였다는 말도 역모를 통한 거사를 꾸민 사람의 행동이라고는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린다.

이런 역사적 근거들을 모아 해석해보면 정여립의 역모는 날조된 것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사상범을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누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된다. 당시 동인과 서인은 크게 다퉜으며 정여립으로 하여금 동인의 지지 세력을 끊어내자는 서인의 시대적 배경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임진란의 내륙 전투에서도 전라도는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왜군의 이름만 듣고도 도망치는 장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은 극명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한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전라도가 가지는 지리적 혹은 경제적인 조선의 입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조선은 이미 없어지는 아주 다급한 상황이었으니, 이순신은 개인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자신을 들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전라도 주민들과 의병들은 이순신장군을 도와 사생결단으로 싸웠으며 조선을 지켜냈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전라도는 반역의 땅이 아니라 충신의 고장이요 국가의 근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 훈요 10조가 있었지만, 고려의 조정에 오른 전라도출신의 관료들 숫자를 보면 크게 차별받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해마다 혹은 일정 기간 동안 등용한 인재의 수가 약간의 진폭은 있지만 그래도 고르게 분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훈요 10조에 나타난 왕건의 부탁을 후대 왕들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며, 반대로 해석하면 훈요 10조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으로 나중에 역사를 왜곡한 일부 선비들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심을 품게 하는 것은 고려사에서 전쟁 중에 잃어버렸다고 기록된 훈요 10조를 어느 날 갑자기 경주 최씨 관료 최항의 집에서 발견하였다고 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것이다. 이런 것을 최초로 문제 삼은 사람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금서룡이었다. 그는 제1조, 2조, 4조, 6조, 8조가 서로 상충되거나 왕건이 취한 행적과 어울리지 않는 다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왕건이 행동은 이렇게 하면서 훈요 10조에는 이렇게 하라고 적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 그것도 개국을 한 왕이 자신의 행동과 다르게 후세에게 지침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또한 조선에 와서는 정여립 사건 이후 전라도 출신의 인재 등용은 크게 줄었으며 한참 지난 후에야 그 수가 어느 정도 회복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것은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 사람의 인재 등용을 의도적으로 꺼려하고 반대하였다는 증거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의 인재 등용은 그 만큼 비례하여 증가하였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일은 성호사설, 정감록, 택리지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3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지형을 살피고 민심을 꿰뚤어 본 다음 택리지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중환의 외가가 전라도인데 유독 전라도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전라도에 대한 평가를 하고 전라도사람에 대한 인심을 잘 읽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순전히 날조한 것으로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글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을 아주 중요한 교과서처럼 받들고 인용하고 있는 것은 무슨 때문일까. 그것은 역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적혀있는 부분을 활용하기 위한 이유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 전반기 세종 시절에는 나라가 안정되고 먹고 살기에 주력할때였으므로, 전국에서 전라도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세종 14년인 1432년 이후 150년간 충청도의 경작지는 16,000여결이 증가하였고, 경상도는 14,000여결이 증가하였으며, 전라도는 165,000여결이 증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그만큼 농토가 증가하였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구의 유입과 식량 생산지의 주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전라도에서만 많은 농토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세종 5년 1423년 10월의 전라 감사의 장계에 의하면 세종 4년 윤12월 이후 10개월 사이에 전라도로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이들을 숫자로 보면 서울에서 온 사람이 190명, 개성유후사에서 621명, 충청도에서 2,394명, 강원도에서 1,042명, 경상도에서 1,455명 등 전국적으로 5,848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조선 태조 6년 1396년의 전라도 인구는 39,167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1년 사이에 약 15%나 되는 인구가 유입된 것이다. 이 후에 전국은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여 식량의 분배가 다시 이루어졌으며, 훗날 일제의 쌀 수탈의 원초가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세종 이후에는 전라도 사람이라 하여도 오리지널 전라도 사람들은 없어졌고 전국에서 모여든 각 지방 사람들이 섞여 주인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그냥 하기 좋은 말로 그렇다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좋은 것을 권장하는 자세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분열과 이간질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세력에 부응하여 자신의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은 매국노보다 더 나쁜 짓이라 단언한다.

20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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