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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의 평화로움

꿈꾸는 세상살이 2014. 8. 5. 10:08

 

틱낫한의 평화로움

틱낫한/ 류시화 역/ 2002.09.05/ 열림원/ 213쪽

저자

탁닛한 :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세계 종교계의 두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 불리운다. 시인이며 선승 그리고 명상가이다. 미국의 버몬트와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즉 자두마을을 오가며 강연과 수행, 그리고 시를 쓰고 공동체의 채소밭을 가꾼다. 저서 약 10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이틱낫한의 평화로움이다. 자주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매년 1,000여명에 이른다. 불교인들이 많지만 기독교 및 이슬람인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철에는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파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종이가 아닌 다른 숱한 생명체 즉 다른 물질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임으로, 종이라고 하여 단순한 하나의 종이가 아니라고 한다. 반대로 종이에서 각자의 생명체 즉 물질을 빼어내면 종이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틱낫한의 주장이다.

류시화 : 외누박이 물고기의 사랑으로 유명한 시인이다. 그 외에 산문집과 인도 여행기가 있고, 여러 권의 번역서가 있다. 특색있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줄거리 및 감상

 

이 책은 벌써 오래 전부터 책꽂이에 있던 책이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던 차에 도서관 회원증을 가져가지 않아 그냥 돌아온 후, 집에 있는 책을 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골라들었던 것이다. 벌써 10년도 넘게 나를 기다려온 책이라 이제사 펴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든다.

처음에 틱낫한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에 인도 사람인줄 알았다. 그렇게 지난 지 벌써 10년도 넘었다. 그런데 베트남 출신이며 현재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불교계 공동체운영자이며 시인임을 알고는 나의 무지를 느끼게 되었다.

역자 류시화의 말처럼 세계 종교지도자 가운데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는 말을 빌자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일 것으로 보인다. 자주마을 공동체에서 농약을 치지 않아 생긴 벌레를 잡아 멀리 다른 곳으로 보내주는 모습처럼 말이다. 불교에서의 살생금지이며, 나중에 나올 한 대목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 소개에서 나왔듯이 다른 어떤 것들의 모임 즉 상대의 도움없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불상 앞에 음식을 쌓아 놓았을 때 부처는 언제 그 음식을 먹을지 궁금해하는 것이 불교 신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만약 먹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음식을 쌓아 놓는 것일까. 싯다르타가 수행을 하던 중 너무 배고픈 고행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해주기 위해서? 아니면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귀신이 와서 먹고 가라고 하는 것처럼 부처의 혼이 와서 먹으라는 뜻으로?

 

어느 수행자가 고승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는 무엇인가? 그 때 고승은 대답 대신 말똥을 가리켰다. 당시 진리는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로 표현되는 고상한 것이라는 평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결하고 불경스러운 똥을 가리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모독에 속했다. 이때 고승이 말하는 뜻은 위의 예처럼, 똥과 진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즉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어서 굳이 아름다운 이름의 진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눈에 보이는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우리도 파랑새를 쫓아 행운을 찾지 말고 내 앞에 있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다섯 가지의 집합체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진 것들의 집합 즉 오장육부와 신경계통 등의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느낌, 지각, 정신,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에 의식이 있다.

우리는 어디가 아프면 그곳이 빨리 낫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으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 아픈 곳이 나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모든 것을 망각하고 산다.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느낌과 의식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어느 날 안개가 짙게 낀 새벽, 배를 저어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상류에서 거침없이 내려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사공은 위험을 감지하고 어서 빨리 뱃머리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그런 상대방은 들은 체도 아니 하고 쏜살같이 내려와서 부딪치고 말았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수월하므로 내려오는 배가 피해주는 것이 상책이지만, 이른 새벽 배를 빠르게 몰고 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무식하고 상스러운 것이 뻔해 사공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바탕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밧줄이 풀려 혼자 떠내려오던 배였던 것이다. 사공은 화가 가라앉았고 웃음이 나왔다. 누가 이 사실을 알까 창피하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던 것이다.

 

틱낫한의 명상은 문을 걸어 잠그고 타인과 격리된 채로 혼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한다. 전화를 받는 순간에도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면서 명상을 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깨어있는 명상을 하며, 지나가는 행인들 마주치면 미소로 명상을 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사람은 많고 많은 세포로 되어 있고, 많고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언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세포를 움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조절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 그 중에서 내가 어떤 세포를 깨우고 어떤 감정을 가지는 가에 따라 나의 상태가 결정되어 진다. 그리고 상대방의 상태도 따라서 결정되어 진다. 그러기에 항상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행동과 좋은 가르침이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나와 좋지 않았던 사람과의 일도 잘 풀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웃는 낯에 침 뱉지 못하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 다는 말도 있다. 항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위하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즉 내가 한 그 말이 돌고 돌아서 모두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그런 말이 있다. 상대방을 칭찬하고 공경하면 그 말에 그 사람이 공경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그 말을 듣지 못하였거나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그 말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욕하고 나쁘게 말했을 때에도 그 사람이 그 말을 듣지 못하였거나 들을 형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가르침인가.

우리는 순간 순간 그리고 항상 명상을 하며 부처에 대하여 주문을 왼다. 하루는 뉴겐여사가 명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그를 불러대는 남자가 있었다. 이제 막 명상을 시작한터라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도 뭐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명상을 시작했으니 모든 유혹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참고 참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불러대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을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런 분노까지 참아가며 명상을 해야 하는지 망설임도 잠시뿐, 이내 뉴겐여사는 방문을 열며 화를 내고 말았다. 명상을 하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수백 번이나 불러서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화를 나게 해야 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웃으면 맞받아쳤다. 당신은 겨우 10분 동안에 그 정도도로 불러댄 것도 참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부처는 당신이 그렇게 수 없이 많고 많은 날 동안 아미타불 하며 불러댔으니 얼마나 화가 나 있겠느냐고 물었다. 정말 뉴겐여사가 화난 것처럼 부처도 화가 나있었을까? 물론 대답은 아니다 이다.

명상과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다를 뿐 아니라, 이름을 부른 것에도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해 부르느냐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은 자기 수양이므로 자신을 불렀다는 이유로 화를 내서는 명상다운 명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차의 시동을 걸기 전에/ 나는 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차와 나는 하나다./ 차가 빨리 달리면 나도 빨리 간다.

 

이 시는 자전거를 타는 승려 틱낫한이 암송하는 자작 싯구다. 여기서 말하는 가는 곳 즉 차와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저 멀리 산너머 일까, 아니면 도시의 편의점일까. 틱낫한이 말하는 목적지는 인간의 파멸이다. 자동차라는 것이 원래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여러 물질의 집합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리고 자동차가 내뿜는 연기는 이미 여러 생물들을 희생시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이렇게 자연이 파괴되다 보면 인간이 가야 할 곳도 바로 파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가 짧은 순간이나마 자전거를 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은 자연도 사랑하고 타인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마당에 있는 나무를 키울 때, 잘 크지 않으면 왜 그런지를 따져 주의를 기울인다. 거름이 부족하면 거름을 주고, 물이 부족하면 물도 준다. 햇볕이 부족하면 햇볕이 잘 들도록 주변 정리도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것이며 나무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국내의 어떤 시인 역시 화단에 꽃 한 그로 가꾸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사람이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세상의 어린이 역시 혼자서는 크지 못하는 나무와 같아 누군가가 돌보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의 몫이지만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아이에게 혼자 크라고 말하는 부모가 너무나 많다. 그것은 잘못 하였을 때에 나무라는 것이며, 아이와 더불어 논쟁을 하여 윽박지르는 것이다. 환경이 맞지 않으면 나무가 잘 크지 못하는 것처럼 아이 역시 환경에 따라 크고 못 크고가 결정되어 진다. 그것이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 즉 어른들의 선택에 의해 그냥 주어지는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잘못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똑 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하여야 한다.

 

12살 된 어느 보트피플 소녀가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가 성폭행 당한 후에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런 사실을 소녀의 입장에서 말하면 듣는 모든 사람들이 분개하며 그 해적을 욕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 그 해적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해적의 입장에서 보면,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것이 그것이며 그가 자란 환경에서는 그런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기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해적의 입장에서 말하다보면 소녀의 죽음에 대하여는 동정심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넘어가게 된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열강시대에 문명을 퍼트린 다는 미명으로 신대륙을 개척하여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복하는 탐험가들의 행동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되어 권장하였던 것이 바로 그런 예이다. 중세 종교적 부패된 종교의 탄압을 피하여 찾아 나선 곳이 신대륙이며 그곳에서 자기들의 종교를 퍼트린 것이 종교 개척이다. 모두가 행하는 자 즉 가진자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예화들이다.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지난 역사가 그렇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하여야 했다. 신이 주신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것을 만들어준 자연에 대해 감사하며, 음식을 가져다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먹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의무는 무엇일까. 사실아무도 그런 의무를 지워준 적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루에 4만 명이라는 이이들이 매일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하루하루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형제와 부모가 있다는 것에도 감사해야 한다. 전쟁을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아이에게 지금 행복한가 물어보라. 부모가 있었을 때와 없는 지금 중 어느 때가 더 행복한지 물어보라. 형제가 있었던 때와 없는 지금 중 어느 때가 더 행복한지 물어보라.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큰 죄에 속할 것도 알아야 한다.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지 않으면 아 저 사람은 있어도 감사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언제 그 행복을 빼앗아 갈지도 모를 일이다. 있을 때 감사해야 한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2014.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