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그에게로 가는 길
김은미, 김영우/ 도서출판 동녘/ 2014.03.25/ 255쪽
저자
김은미
김영우
줄거리 및 감상
다산은 원 이름이 정약용이며, 많은 시간을 사암(俟菴)이라는 호로 불렸다. 그리고 다른 호로는 열수 (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등도 있다. 다산이란 호는 강진에 유배 중인 때 약 10년간 사용하였다. 그것도 사암이 잘 머무르면서 학문을 연구하라고 지어준 초당에 다산이라는 당호를 먼저 붙여 놓고 사암을 초청하여 거처를 마련해준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할 당시에 저술한 책들이 유명해지면서 그의 명성이 다산으로 통하게 되었다.
다산은 1762년 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인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에 천연두를 앓았고, 4살 때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6세가 되어 부친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아버지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9살 되던 해에 어머니 해남 윤씨가 4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15살인 1776년 결혼을 하고 서울의 명례방에서 거주하였고, 1783년 정조 7년 4월에 진사합격하였다. 이어서 1789년 정조 13년에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1795년 정월에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2월에 병조참의를 거쳐 7월에 주문모 입국사건ㅇ로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전략적 좌천되었다. 금정은 지금의 홍성에 해당한다. 1797년 6월에 다시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고사하는 상소를 올리자 6월에 황해도 곡산 부사로 제수되었다. 이때『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지었는데, 이 책에서 천연두에 관한 종두법을 소개하였다. 이는 1879년 지석영의 종두법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정약용이 천주학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이 책 역시 널리 읽혀지지 않았었다.
39세인 1800년 정조 24년에 고향으로 와서 당호를 여유당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801년 2월에 책롱사건으로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으며, 10월에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투옥 및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인근 흑산도로 유배되었던 형 정약전은 흑산도 앞바다의 물고기에 관한 연구를 하여 자산어보를 지었다. 원래는 흑산도의 검을 흑(黑)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검을 현(玄)자로 바꿔지었다가, 흑에 비해 현이 너무 약한 듯하여 이 자(玆) 즉 검다는 말로 바꿔 자산어보가 되었다.
다산의 나이 47세인 1808년 순조 8년 봄에 윤단이 지어 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57세인 1818년 순조 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짓고 8월에 유배가 풀려 9월에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75세인 1836년 헌종 2년에 음력 2월 22일인 양력 4월 7일 회혼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1910년 7월 18일 정부는 정약용을 정2품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문도공이라 하였다. 대표적 저술로는 1표2서인『경제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가 있다.『상서고훈(尙書古訓)』,『마과회통(麻科會通)』,『여유당기(與猶堂記)』등도 유명하다. 흠흠신서는 재판을 할 때에 억울한 죄인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권면하는 내용이다. 재판관은 매일 실시하는 한 사건에 불과하여 어쩌다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재판을 받는 사람은 일생일대에 단 한 번뿐인 오판으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것을 주의하라는 말이다. 당시 양반들의 세상에서 자신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산 정약용의 다른 호는 열수(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아명(兒名)은 귀농(歸農), 자(子)는 미용(美庸) 혹은 용보(頌甫)로 불렸다. 정약용은 새로운 학문에 흥미를 느끼고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나 전통적인 천주교보다는 실제적인 유학 즉 동학을 넘는 실사구시의 서학을 동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정조에게 자신은 부모의 음덕을 져버리는 천주교보다는 유학에 심취되어 있다는 소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들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다산은 곡산부사로 부임하자마자 제 발로 찾아온 체포 수배령이 내려진 죄인 이계심이 자진하여 걸어 나왔다. 전임 부사 시절에 온갖 횡포에 시달리다못해 반항을 한 것이 죄로 묶였던 것인데, 신임부사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다산은 죄인 이계심의 말을 다 들어본 후, 전임 부사가 잘못 한 일이었으며 백성된 도리로서 관리의 잘못을 나무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여 오히려 그에게 1000냥을 주고서라도 사와야 할 사람이라고 칭찬하면서 소를 올린 적도 있다. 이때 잘못을 알고 동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모른 체한 것만 하여도 죄라고 하였다. 이를 비판적 사유가 없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하는 한나 아렌트와 통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천민들이나 즐겼던 퉁소를 잘 부는 장천용을 강제로 잡아들여 퉁소를 불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예술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정중하게 초청하여 술을 먹인 후 푹 쉬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산의 인품에 감복하여 자신은 퉁소를 잘 부는 것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더 장점이라고 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상민이나 중인이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목민의 근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산은 목민관 때의 일을 회상하여 목민심서를 지었다.
우리는 한 사람을 고루 그리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를 잘 그리고 공정하게 평가하여 적어두면 좋을 것이다. 자신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평가를 하게 되면 좋은 것을 부각시키면서 나쁜 점은 덮어버릴 수가 있으나, 제 3자가 평을 한다면 비교적 바르게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다산을 다시 보게 하는 책이었다.
2014.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