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25. 제야(除夜) - 풍속, 궁에서의 풍속, 시절음식, 현실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15:30

25. 제야(除夜)

음력으로 섣달을 납월(臘月)이라 하고, 그믐날 저녁을 제석(除夕)이라 부르는데 세제(歲除), 세진(歲盡), 제야(際夜)라고도 한다. 이는 지나가는 해의 마지막 밤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며, 한 해를 종결(終結)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 구랍(舊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데 이는 지난 12월 즉 지난해의 12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납월은 음력을 기준한 것이므로, 양력으로 작년 12월을 구랍이라고 하여야 하는 데 어쩌다가 납월이라고 말했다면 양력과 음력이 혼용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섣달그믐을 내일 다가올 설날에 비하여 작은설이라고 하였으며, 성묘와 일가친척에 대한 인사를 올리는데 이것이 바로 묵은세배다. 혹시 잘못된 일이 있거든 모두 잊고 용서해달라는 의미가 있으며, 만약 어르신께 무슨 일이 있었으면 그것을 다 털고 새롭게 거듭나시라는 인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지난해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마음도 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일에 끊고 맺음이 확실해야 하듯이 묵은세배역시 꼭 필요한 절차의 하나였다.

25.1 제야의 풍속

마지막 보내는 날의 밤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부정(不淨)을 털어낸다는 의미에서, 낮에는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며 밤에는 집 안의 구석구석에 불을 밝히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제야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음 날이 설날인 관계로 아침 일찍 용알이 담긴 물 즉 용란수(龍卵水)를 떠와야 하므로 늦게 일어나서는 안 되어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음식을 준비하고 설빔을 마련하느라 바쁜 나머지 잠잘 여유조차 없었음을 위로하였다고 해석된다.

물론 지금처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설계하고 각오를 다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에 속한다.

그믐제사

섣달그믐이 되면 민가에서는 고사를 지낸다. 충청도에서는 가구(家口)를 대표하여 가장(家長)이 혼자서 조용히 사당을 찾아 사당제(祠堂祭)를 지냈는데, 촛불을 켜고 음식을 차려 예를 갖춘다. 전라도에서는 꽹매기 즉 꽹과리를 치면서 마당밟기를 할 때 귀신이 장난치지 말라고 땡중이나 쟁인을 불러 농악을 치고 염을 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거나 밥을 짓고 음식을 차려 조상께 제를 지내고 성주신과 보릿독에 고사를 하였다. 또 일부는 주부가 떡국과 다른 음식을 장만하여 산신각에 차려 놓은 후, 가족의 관향과 성명을 쓴 창호지 앞에 놓고 명복을 빌었다.

어부들은 주 생계수단인 배에 가서 그믐 뱃고사를 지냈다.

묵은세배(舊歲拜)

내일 맞을 설날에 비하여 조금 아쉽다는 의미의 묵은세배 즉 구세배(舊歲拜)는 그믐날 사당(祀堂)에 절을 하고 난 다음, 가까운 친척을 찾아 그동안의 감사와 새로 맞을 해에 대하여 축원을 드리는 풍속이다. 저녁부터 밤늦도록 초롱불을 든 구세배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한 해를 마감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정성은 어떻게 해석해도 좋은 미덕(美德)에 속한다. 요즘은 바쁜 일상에다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다는 편리성으로 인하여 묵은세배는 없어지고 전하지 않는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사라져 가는 것 중에 아름다운 우리의 풍속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제야(除夜)의 종

섣달그믐에 치는 종을 제야의 종(鐘)이라 하며, 본래는 각 절에서 108번을 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說)이 있다. 그러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궁에서 제야의 대포를 쏘고 불화살(火箭)을 쏘면서 바라와 북을 쳤는데, 이것은 대나(大儺)로 역질귀신을 쫓는 중요행사에 속했다고 적고 있다. 대나는 고려시대 궁중에서 실시된 축귀의례(逐鬼儀禮) 즉 나례(儺禮)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다른 말로 구나(軀儺), 나희(儺戱)라고도 한다.

이런 풍속이 현재까지 이어져 양력 12월 31일 밤에 종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은 원래 음력으로 그믐날에 치던 것이었으니 전통보전(傳統保全)의 차원에서 본다면 양력 그믐날에 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행여 일본의 강점기에 전통을 무시하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국민이 원하는 전통을 살린다는 명분에서 양력으로 전환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바로 잡아야 할 과제다.

그러나 옛 전통은 이미 사라졌고 다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다행은 다행히라 할 것이다. 문제는 알고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모르고 그렇게 하였는지가 쟁점이 되는 것이다.

지금 치는 33번의 보신각 종소리는 조선 시대의 파루(罷漏) 즉 4대문통제가 해제되는 시각인 오경(五更)에 보신각 종을 33번 쳐 시간을 알려준 데서 유래되었다. 이런 사실은 옛날사람들의 통행금지가 밤 10시 즉 2경(人定, 人更, 二更)에 시작하였다가 5경 즉 새벽 4시에 해제되었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수세(守歲)

수세(守歲)는 해를 지킨다는 의미이며, 해를 떠나보낸다는 의미의 별세(別歲)의 뜻도 있다. 그믐날 밤이 되면 다락, 마루, 방, 부엌, 곳간 등 집 안의 구석구석에 등불을 밤새도록 밝혀놓고 지키는 것이다. 이는 잡귀(雜鬼)가 어둠을 좋아하여 몰려들까 걱정하여 이를 막고 새날을 잡귀로부터 지켜야 하는 뜻의 수세(守歲)다. 혹시 찾아올 귀신을 막기 위하여 밤을 지새는데, 윷놀이나 옛날이야기를 하여 시간을 보냈다. 이것 또한 세주(歲酒)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세찬(歲饌)을 마련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거들어주려고 만들어낸 요인도 있다. 이때는 곳곳마다 촛불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도교(道敎)에서 경신일(庚申日)에 잠을 자지 않고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소동파(蘇東坡)의 기록에 중국 촉(蜀)나라의 풍속에서 연유하였다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납향(臘享)

납향은 한 해 동안 지은 농사의 형편과 그 밖의 일들을 모아 납일(臘日)에 백신(百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납제(臘祭)라 하고, 12월은 납달(臘月)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납일은 동지로부터 세 번째로 맞이하는 미일(未日)로 양력 1월 13일부터 1월 22일 사이에 든다. 원래의 납(臘)은 섣달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마지막이라는 뜻이었지만, 위와 같은 규칙에 따라 납일(臘日)을 따로 정하였으니 납일이 반드시 섣달그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2010년도의 납일은 동지 후 세 번째 맞는 미일(未日)이 양력 1월 21일 신미(辛未)로, 설날이 2월 14일이었던 것에 비하면 무려 23일이나 차이가 난다. 이로 보아 납향을 반드시 섣달그믐날에 지냈던 것은 아니며, 제야(除夜)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납일을 동지 이후 세 번째 술일(戌日)로 정했던 것으로 보아 이는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지내왔던 것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세 번째 즉 3이라는 양(陽)의 수(數)가 적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청제(靑帝)는 미일(未日), 적제(赤帝)는 술일(戌日), 백제(白帝)는 축일(丑日), 흑제(黑帝)는 진일(辰日)로 정했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따르면 ‘오색(五色)으로 풀어보면 청제(靑帝)는 미랍(未臘)에 해당하니 오행(五行)으로 목(木)에 해당하고, 목(木)은 방위로 동(東)에 해당하기에 동방(東方)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미일(未日)로 정해졌다.’는 말처럼 납일은 원래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납일에는 국가에서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쓰인 제물 중에 멧돼지와 토끼가 있었다. 조선의 정조는 이 동물들을 잡아 진상(進上)하기 위하여 산골 현지에 사는 백성들이 일손을 놓고 동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에서 파견된 포수가 가까운 용문산(龍門山)이나 축령산(祝靈山)에서 직접 잡도록 명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의 정조가 성군(聖君)이었다는 것은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도 백성들을 위하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법(曆法)에 따르면 성덕(盛德)이 오행 중 목(木)에 있기 때문에 미일이 선정된 것이며, 1월 1일, 4월 1일, 7월 1일, 10월 1일의 사맹삭(四孟朔)에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 납일 즉 동지 후 세 번째 맞는 양(洋)의 날을 더하면 5대 제향일(祭享日)이 된다. 이때의 삭일은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를 의미한다. 그리고 맹삭은 맹월(孟月)의 초하루라는 뜻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시작하는 첫 달의 첫날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맹삭은 각 계절이 시작되는 달의 초하루인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가을의 중앙에 위치한 달 즉 8월에서도 보름날을 택하여 명절로 삼으면 그의 이름은 자연스레 가을의 한가운데라는 중추절이 되는 것이다.

25.2 궁에서의 풍속(宮闕風俗)

제야에는 궁궐에서 행하던 풍속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제석(除夕)이 되면 궁궐에서 연종포(年終砲) 혹은 연종방포(年終放砲)라 하여 대포를 쏘면서 지는 해를 마감하였다. 또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벽온단(辟瘟丹)이라는 향(香)을 만들어 진상을 하였으며, 이를 받은 임금은 설날 아침 일찍 향불 한 가닥 심지를 피운다. 그러나 민가에서는 방포를 쏠 형편이 안 되므로 청죽(靑竹)을 태웠다. 이는 대나무의 마디가 팽창하여 터질 때 나는 소리로 악귀가 놀라 달아난다는 의미다. 이는 중국의 춘절이 온통 폭죽 세상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풍속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 기록된 바와 같이 돌림병인 염병(瘟病)을 물리친다는 벽온단(辟瘟丹)이 있다. 염병이 후미지고 어두운 데서 산다는 벽(僻)으로 통용되는데, 염병과 사람을 떼어 놓는 의미로 ‘사람인 변(人)’을 빼어 염병을 허물어뜨린 허물 벽(辟)자로 만든 일종의 주술적(呪術的) 처방이었던 것이다.

연종제(年終祭)

궁에서는 제석에 한 해를 마감하는 행사로 연종제를 하였다. 이는 각종 악귀를 쫓기 위하여 여러 가면을 쓰고, 현악기의 일종으로 놋쇠로 만든 제금(提琴)과 북을 치면서 궁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풍속이다. 이렇게 하면 구석에 숨어있던 악귀(惡鬼)들은 가면을 쓴 새로운 주인에게 쫓기고, 또 시끄러워 살 수가 없으니 모두 달아나게 된다는 것이다.

무장(무醬)

겨울에 만들었던 메주에 곰팡이가 뜨고 잘 익으면 몇 개의 덩어리로 부수고 여기에 물을 부었다. 그런 후 2, 3일이 지나 메주 물이 우러나게 되면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3, 4일간을 더 익힌 것을 무장이라 한다. 궁에서는 지난해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고 새로운 해를 맞는 풍속으로 이 무장을 마셨다.

납약(臘藥)

납약은 납제(臘劑)라고 불리기도 하며, 조선 시대 궁궐(宮闕)의 내의원(內醫院)에서 여러 종류의 환약(丸藥)을 지어 임금에게 올리던 것을 말한다. 임금은 이를 다시 신하들에게 하사(下賜)하였는데, 납약은 심경(心經)의 열을 푸는 청심환(淸心丸)과 열을 내리는 안신환(安神丸), 토사곽란(吐瀉癨亂)을 다스리는 소합환(蘇合丸) 등이 있었다.

훗날 조선 정조(正祖)대에 이르러서는 소합환(蘇合丸)보다 더욱 효과가 있다는 제중단(濟衆丹)과 광제환(廣濟丸)을 만들어 궁내의 구급약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세초(歲抄)

섣달 초하룻날, 조정 관리 중에서 품직이 강등(降等)되었거나 파직된 사람의 명단을 적어 올리면 임금이 다시 기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 아래에 방점(傍點)을 찍는 제도가 있었다. 이때 명단을 적어 올리는 것을 세초(歲抄)라고 하며, 왕이 방점을 찍는 일은 대정(大政)이라 하였다. 이런 일은 대체로 6월 1일과 섣달 1일에 실시하였으며, 국가에 경사가 있거나 특별한 경우에도 실시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특별사면(特別赦免)이나 복권(復權)에 해당한다.

25.3 민간풍속(民間風俗)

섣달이 되면 민간에서도 여러 풍속이 행해졌다. 이런 풍속들은 모두 지는 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는 것과 연관이 많다. 또한 추운 한농기(閑農期)에 심신을 단련하는 내용들도 많이 있었다.

여도판희(女跳板戱)

섣달그믐 무렵부터 정월 초(初)까지 행해지던 널뛰기는, 대보름을 포함하여 단오(端午)나 한가위 때에도 행하던 민속놀이다. 이는 부녀자들이 판자 위를 뛰며 논다고 하여 여도판희(女跳板戱)라 하는 데, 그네뛰기와 함께 아주 중요한 여자들의 대표 민속놀이에 속한다.

고려 시대부터 전승(傳承)되어 오는 놀이로, 긴 널조각을 짚단 위에 걸쳐놓고 그 널빤지의 양끝에 마주 서서 번갈아가며 뛴다. 이 놀이는 대단한 체력을 요구하였지만,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았으며 수시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의 놀이 종류가 그만큼 적었다는 뜻이다.

새잡이

납일에 잡는 짐승의 고기는 사람에게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참새를 긴 그물을 쳐서 잡아 어린아이에게 먹이면 마마(紅疫)를 곱게 한다고 하였으며, 병약(病弱)한 사람들에게도 좋다고 하였다. 이는 겨울을 나기 위해 영양분을 비축한 참새는 좋은 보양제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은 활을 쏘고 총을 쏘는 것까지 허락하였으니 수렵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납설수(雪水)

납일에 내린 눈을 녹여 물로 만들면 납설수(臘雪水)가 된다. 이 물로 눈을 씻으면 안질(眼疾)을 막고 눈이 좋아진다고 하여 약용(藥用)으로 사용하였다. 또 납설수를 적셔두면 의류와 서적의 좀을 막을 수 있고, 수건에 묻혀두면 방안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납설수를 김장독에 넣으면 맛이 변하지 않고 오랫동안 싱싱한 김치를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엿 고기

충청과 호남지방에서는 납일에 엿을 고는 풍속이 있다. 섬유질과 전분 위주의 식단에서 당분(糖分)의 섭취를 위한 엿 고기는 주로 납일날 밤에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에 완성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여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날에 행하던 작업에 속했다.

이 밖에도 납일에 돼지고기 즉 저육(豬肉)을 먹는 풍습이 있으며, 새해에는 과실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섣달그믐날에 지난해의 나무를 도끼로 찍는 시늉도 하였다. 아주까리를 태우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믿었으며, 자면서 이를 가는 아이는 이를 갈지 않도록 아이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나뭇가지에 돌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아주까리는 피마자(蓖麻子)의 다른 말이며, 씨앗으로 짠 기름은 유성(油性)이 강하여 적은 양으로도 민간설사제로 즉효가 있다.

그런가 하면 12월 25일 하늘로 가서 천제(天帝)에게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일러바친 후 섣달그믐날이 되면 부엌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조왕신(寵王神)을 맞이하기 위하여 부뚜막의 솥에 불을 밝히고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기도 하였다.

잿간에서는 거름을 치우고 가축우리를 깨끗하게 한 후 새로운 짚을 넣어주었다. 이는 집 안에서 기르는 가축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새해를 맞는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잿간은 재를 모아 둔 창고로, 예전의 짚을 때고 남는 부산물이 좋은 거름이 되었다.

한편 한 해 동안 모아놓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섣달그믐날 대문간에서 태웠다. 이렇게 하면 새해에는 빠진 머리카락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액운이 소멸된다고 믿었다. 섣달그믐에 먹는 무는 산삼과 같다고 하여 바람 들지 않은 좋은 무를 골라 먹었다. 또 달걀을 오줌에 담갔다가 물에 넣어 삶거나 처음부터 오줌에 넣어 삶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오줌에 담근 달걀은 전염병으로부터 예방할 수 있는 방편의 하나로 여겼다.

25.4 섣달그믐의 시절 음식

특별히 음력 12월 말일에만 먹을 만한 음식은 없다. 그러나 그믐이 되면 설날에 사용할 제수 음식을 장만하므로, 그믐에 먹는 음식은 설날에 먹는 음식과 똑 같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흰 가래떡을 필두로 꿩고기와 각종 나물 등으로 차린 세찬(歲饌)이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차례를 지내기 전이므로, 제수용에 조심하여 함부로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담고 남은 여러 가지 반찬을 넣고 비벼 먹는 풍속이 생겼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보면 지난해에 남겨둔 모든 음식들을 모아 한꺼번에 먹어치우고, 새해에는 새로운 음식으로 대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믐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하던 바느질도 해를 넘기지 않는 등 모든 일에 있어 끝을 맺는 풍속도 생겨났다.

골동반(骨董飯)은 올해에 만들어 먹고 남은 음식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쌀밥에 쇠고기와 육회, 튀각, 각종 나물 등을 넣고 비벼 먹던 음식이다. 이 외에도 인절미, 족편, 돼지고기찜, 수정과, 식혜, 만두, 떡국, 완자탕, 전골, 설렁탕, 그리고 찹쌀가루에 대추를 이겨 섞은 후 꿀에 반죽한 주악 등 설날에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들이 그믐에 먹는 음식이 되기도 한다.

설렁탕은 예전에 선농단(先農壇)에서 끓여 먹은 국이라 하여 선농탕(先農湯)이 생겨났고, 다시 설농탕(雪膿湯)으로, 그리고 설롱탕으로 변했다. 눈처럼 하얗고 뽀얀 국물이라는 의미도 들어있는 설롱탕은 현재의 설렁탕으로 발음이 변했다. 가난했던 시절에 쇠고기의 여러 부위를 넣고 고았던 설렁탕은 서민들을 즐겁게 하는 음식의 하나였다.

25.5 제야와 현실

예전의 어린이들이 제야(除夜)를 지키면서 늦게 자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제야의 밤새기는, 아이들로서는 눈썹이 희어질지언정 잠이 쏟아져서 감기는 눈을 어쩌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장난삼아 밀가루를 묻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자는 동안에 떨어져나가고 일부만 남기 일쑤였다.

제야가 바쁘기는 아이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집 안팎을 청소하는 날이었으며 마당과 마루 등을 쓸고 닦아야 했다. 또 귀신이 오다가 걸릴지도 모르는 빨랫줄을 걷고, 개도 뒷마당으로 옮겨 놓는 등 여러 몫을 한다.

이때의 귀신은 다음 날인 설날에 와서 차례를 지낼 조상신을 의미한다. 일부는 차례상에 올릴 밤을 깐다든지 제기(祭器)를 닦는 일을 도왔고, 짚을 다듬는 일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제수 음식 장만을 거들기도 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그 나름대로는 심부름이나 잔손 일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과 시절이 다르기는 하지만, 예전의 아이들이 집안의 생활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가정사(家庭事)보다는 개인사(個人事)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 사회생활적(社會生活的) 인성(人性)에서 차이가 있음이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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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 행사 사진 500여 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