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들/1년 24절기와 세시풍속

24. 시월상달(十月上月) - 상달제사, 먹을거리, 현실

꿈꾸는 세상살이 2014. 9. 7. 15:28

24. 시월상달(十月上月)

 

24.5 상달제사(上月祭祀)

상달은 글자 그대로 가장 으뜸 되는 달로 오곡백과가 익으니 풍성함에 감사하는 달이다. 따라서 조상신(祖上神)과 집 안의 여러 신(神)에게 고(告)하고 축원(祝願)하여 복을 구하는 행사를 하였다.

유만공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상달고사는 집안의 안녕을 위해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儀禮)로 주로 음력 10월 상달에 지낸다. 한자로 ‘고사(告祀)’라고 표기하나 한자어에서 유래한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또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고시레와 고사, 그리고 굿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고시레’는 아주 작은 의례를 말하며, ‘고사’는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의례로 보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의례로는 ‘굿’을 들었는데, 이때 장구를 울리며 북을 치고 무당이 춤을 추며 일정한 격식을 갖춘 행사로 보았다. 그러고 보면 등산을 할 때 밥을 먹기 전에 한 숟가락을 떠서 ‘고시레’하며 산에 던지는 것이 아주 작은 의례에서 시작되었다면 이해가 된다.

또 일부에서는 탁발승이나 걸립패를 초청하여 고사(告祀)를 지내며 가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 이때 부르는 염불을 고사염불 혹은 고사반, 고사소리, 비나리, 고사덕담이라고 한다. 요즘 사용되는 단어에 ‘비나리’가 있는데, 이는 비는 것 혹은 바라는 것을 적어 놓은 종이를 의미하며, 그것을 읽는 사람 혹은 그런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말이기도 하다. 옛 비나리와 일맥상통하는 단어다.

고사를 원하는 집에 영기(令旗)를 꽂아두면 먼저 밖에서 평염불을 하고, 집 안에 들어가서 선염불(先念佛)과 후염불(後念佛)을 하며, 오조염불(俉調念佛)과 성주풀이 축원(祝願)으로 끝을 맺는다.

상달고사(上月告祀)

고사를 지낼 때에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지냈다. 그러기에 행사 전부터 대문 앞에 금줄을 치는가 하면, 집 주변에는 황토를 깔아 부정(不淨)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였다. 이때의 제물(祭物)로는 시루떡과 백설기, 술, 과일, 고기 등 각종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하였다.

주인을 관장하는 안방의 제석신(帝釋神) 즉 조상신, 주부를 관장하는 삼신(三神, 産神), 집터를 관장하는 터주신(地神), 음식을 담당하는 조왕신, 일상사를 담당하는 성주신, 제물(祭物)을 관장하는 잡신 등에 따라 각기 놓는 장소가 달랐다. 고기는 쇠머리를 삶아 통째로 놓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는 쇠머리 대신 말린 명태를 놓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사를 지내고 나면 이웃들과 골고루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다. 지금도 고사를 지낼 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명태를 선택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아이를 점지해주고 길러주는 신은 삼신할매라고 한다. 이는 세 성받이의 신령인 3명의 신 즉 삼신의 변화이며, 산신(産神)이 사람의 생식과 성장을 관장한다고 믿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제주시 이도1동에 있는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지방의 성받이 고씨, 양씨, 부씨에 대한 시조가 용출(湧出)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삼신과 위의 삼신이 일치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달고사를 지내는 경우 날짜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여러 집이 같은 날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모든 집에서 제한된 무당을 초청할 수도 없었으니 보통 서민의 경우 별도로 무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주부가 직접 제를 올리는 것이 고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야 할 곳이 많은 집 혹은 부유한 집 등에서는 날을 잡아 무당의 힘을 빌리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칠성신이나 측간신, 문신 등은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여겨 제물만 쌓아놓고 축원(祝願)은 하지 않았다.

말날제사

그런가 하면 무오일(戊午日) 즉 말날에는 마구간의 신에게도 제사를 드리며 가축을 건강하게 길러 달라고 기원하였다. 고사에 쓰이는 떡을 마일병(馬日餠)이라 하며, 행사가 끝나면 서로 나눠 먹었다. 말은 농사를 짓는 데 요긴하게 이용될 뿐 아니라, 짐을 나르거나 멀리 출타를 할 때에도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따라서 이런 말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에 속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유독 새 차를 샀을 때에는 빼놓지 않고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은, 예전의 말과 현재의 차(車)가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여기서 말하는 말날(午日)은 10월을 마감하는 말일(末日)과는 다른 의미다. 그러나 말날 중에서도 병오(丙午)일 때에는 고사를 지내지 않는 풍습이 있는 데, 이는 병오년의 병(丙)이 아프다는 병(病)과 같은 발음인 데서 금기(禁忌)하였던 것이다. 살펴보면 무오일(戊午日)은 10간 12지 즉 60갑자에서 10월에 들 수도 있지만, 들지 않는 해도 있게 마련이었다.

조선 시대 저자 미상의 가곡집『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는 마제(馬祭) 즉 말날제사 때에 부르던 ‘군마대왕(軍馬大王)’이라는 노래가 전하고 있다. 시월의 말날 중에서도 무오(戊午)일을 상마일(上馬日)로 치는데, 이는 무오일(戊午日)이 가진 무(戊)의 발음이 무성하다는 뜻의 무와 같아서 풍성함을 기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일(午日) 다음으로는 임일(壬日)이나 경일(庚日)을 중요하게 여겼다.

동제(洞祭)

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지켜주는 마을신(洞神)에게 지내는 제사로 이를 동신제(洞神祭)라 부르기도 한다. 호남지방에서는 당산제(堂山祭)나 당제(堂祭)라고 부르는 반면, 중부지방에서는 도당굿, 제주지방에서는 당굿이라고도 한다. 당은 대체로 높은 언덕 위에 지은 제사용 집이며, 해안가에서는 빠지지 않고 성행하였다. 동제도 행하는 용도에 따라 산신제, 서낭제, 용신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산신제는 대체로 단오를 제외한 삼짇날, 칠석날, 중구절에 지냈다.

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고, 풍년과 풍어가 되기를 바라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런 별도의 신을 달래는 굿도 풍어별신굿과 풍농별신굿으로 나눈다. 날짜는 시월상달 또는 음력 정초를 택하였으며, 정월 초이틀이나 초사흘 혹은 대보름에 행하는 마을도 있었다.

제사의 제관(祭官)도 일반 사람이 행하는 경우와 무당이 행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특별히 제주도의 당굿이나 풍어제와 같은 경우는 무당(巫堂)이 주관하였다. 따라서 제를 지내는 시간과 장소도 제주(祭主)가 정하며, 성스럽지 못한 행동을 제한하였다. 한편, 마을 사람들 전체가 부정(不淨)을 금하면 더 많은 효험이 있다고 믿어 금줄을 치기도 하였으며, 마을 전체의 소속감을 고취하는 규약(規約)으로 발전한 경우도 있다.

동제 혹은 당산제, 마을굿이 시월상달에만 열리는 것은 아니었으며, 이러한 제사를 집례하는 사람을 모두 제관이라 불렀다. 이 제관이 지켜야 할 금기사항은 부정한 장소의 출입을 막고, 부정한 행동을 보는 것이나 언행을 삼가고, 피를 보는 일을 삼가고, 죽은 시체를 보는 것도 안 되었다. 한편 동물을 죽이는 것은 물론 피를 보면서 얻은 고기를 먹는 것 또는 바다의 물고기를 죽여야 하는 생선도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부딪쳐 말을 묻혀 내거나 다투는 일을 막기 위해 아예 사람 만나는 것을 금했으며, 인근의 애경사에 참석하는 것도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부부성생활도 못하게 하였으며, 소변을 볼 때 직접 성기를 만지지 말고 막대기를 사용하는 정도로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며, 목욕재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여야 했다.

제관을 선발할 당시에도 집 안에 노약자나 어린이가 있으면 제외되었으며, 가족이 병중에 있거나 상중인 사람도 안 되며, 가족 중에 임신 중이거나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경우도 제외되었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 새끼를 낳은 경우에도 같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임신한 여성이 있으면 해산막으로 보내 격리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여를 멀리 떨어진 곳에 보관하던 상여막처럼,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해산(解産)을 전문으로 하는 집을 지어 활용하였던 것을 말한다.

한편 이런 제관에 비해 마을 사람 역시 살생을 금하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으며, 날것과 비린 것을 먹지 않고, 부정 탄 사람일 수도 있는 외부인은 아예 만나지 않도록 하였다.

상여는 상사(喪事)가 발생한 경우 시신을 장지로 옮기는 도구로, 산 사람이 가마를 타고 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죽은 사람은 관 속에서 누워 상여를 타고 가는 형식이다. 상여는 부유한 집에서는 꽃상여를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은 막상여를 만들었다. 상여를 만드는 곳은 드물게나마 1995년도까지는 명맥을 이어 왔으며, 강재운 씨가 충남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에서 2008년도까지 꽃상여를 만들어 판매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는 상두계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상여에 관한 소리를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에서는 상여 나가는 의식과 망자의 가족을 위로하는 모습을 재현하여 관리하고 있다. 상여는 매장지에 도착하면 시신이 든 관은 땅에 묻고, 종이로 만든 꽃과 장식물을 태운다. 그러나 관을 싣고 운반하는 상여 즉 틀은 외딴 상여막에 보관하였다가 다음번 장례 시에 활용한다.

시제(時祭)

시월상달의 풍속 중 우리의 생활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시제(時祭)다. 시제란 묘사(墓祀) 혹은 시사(時祀), 시향(時享)이라고도 일컫는 우리의 전통 제례(祭禮)다.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일일이 제사를 모시려면 수고와 정성이 모자라서 다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4대조까지는 그 망일(亡日)에 사당에서 기제(忌祭)를 지냈으며,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차례와 성묘를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5대조 이상의 조상에게는 10월 상달에 조상님의 산소를 직접 찾아서 묘제(墓祭)를 지내게 되었다. 이때 조상님의 묘는 주로 문중(門中)의 선산(先山)에 모여 있었기에 한곳에서 한꺼번에 지냈다는 말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매월 초와 보름, 그리고 특별한 날에 드리는 제사가 너무 잦아 없는 집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반이라 하여도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경우는 없는 집 제사가 대추나무 연 걸리듯 하였다고 빗대는 말이 생겨났다. 이것은 유교의 좋은 풍습에 비해 가장 지적받는 악습(惡習)으로 꼽힌다.

시제(時祭)는 봄에 지내는 춘향제(春享祭)와 가을에 지내는 추향제(秋享祭)로 나뉘는데, 추향제가 일반적이며 상달 보름 이전에 마무리하도록 일정을 잡는다. 원래의 시제는 사계절에 한 번씩 지냈다고 하여 시제라 부른다.

이때는 10월 초하루 시조묘의 시제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조상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데, 요일에 관계없이 정해진 날에 지내왔다. 그러나 요즘 현대사회에서의 편리성을 감안하여 휴일에 지내는 경향이 많아졌다. 요즘에는 분묘를 만드는 대신 가족 간 납골묘를 만들기도 하며 자연장(自然葬), 수목장(樹木葬)을 하기도 한다. 이는 국토의 효율성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좀 더 근접하여 유대감을 찾는 입장에서는 소홀해지기 쉬운 면도 있다.

제사는 조상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고마움의 표시로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이며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제사를 모심으로써 공동체 의식을 가지며, 멀리 떨어져 있던 일가친지들이 함께 모여 친족의 화합과 친목을 나누는 자리도 된다.

이런 시제에 앞서 문중의 의견을 나누는 행사로 종계(宗契)를 연다. 종계는 종친회원들의 계를 말하며, 이때에 안부를 묻는 것은 물론이며 시제에 관한 비용과 절차 등 모든 사항을 협의하는 것이다. 시제에 쓰일 제물은 제전(祭田)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족하면 약간의 추렴으로 보충하기도 한다.

성주받이 굿(城主祭)

10월 상달에는 모든 가정에서 성주께 제사를 지냈는데, 말날(午日) 혹은 길일(吉日)을 택하여 지냈다. 성주신은 상량신(上樑神)을 의미하는 데, 집 안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 지켜보며 모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담당한다고 믿었기에 햇곡식으로 술을 빚고 시루떡을 하며 오곡백과를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

성주받이굿은 일반적으로 무녀를 불러 굿을 하는 데 이를 성주굿, 성주받이굿 또는 안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때 어느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는데 오로지 성주(星主)를 위하는 마음으로 빌었다. 또 모든 가정에서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특별한 날의 제사마다 무당을 부를 수는 없었으니, 일부는 간단하게나마 주부(主婦)가 직접 제(祭)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산신제

산신제는 길일을 택해서 지내는데, 대개는 마을의 뒷산을 진산으로 삼았으며 더불어 산신당, 산신각을 두었다. 자정이 지나 첫닭이 울어 비로소 제일(祭日)이 되면 산신제를 지냈다. 화주집에서 제물을 올려 진설하고, 독축(讀祝)을 하며 소지(燒紙)를 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이때는 동제로서 마을의 태평과 마을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풍농을 기원하는 행사다.

산신제가 끝나고 날이 밝아오면 마을 사람들은 제물(祭物)로 음복을 하고 농악을 치며 한바탕 신명나게 논다. 산신제도 마을의 협동과 공동체 의식을 이끌어내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던 것이다. 보은지방에서는 속리산 꼭대기의 사당에 사는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이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法住寺)에 내려온다고 하였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률을 연주하면서 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 내려온 신은 45일간 머물다가 다시 속리산으로 올라갔다.

24.6 상달의 먹을거리

시월상달은 한 해 농사를 추수하여 햇곡식이 풍부한 시기다. 이런 날에 말날(午日)이나 길일(吉日)을 택해서 푸짐한 음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이때는 양력으로 11월에 해당하여 모든 농사는 끝이 났으며, 일로만 보아서는 그저 놀고먹는 시절이라 하여 공달(空月)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때의 공달은 윤달을 의미하는 공달과는 다른 뜻이다.

온갖 음식이 풍부하니 자연 미각을 주는 음식을 찾게 되지만, 다가올 추위에 대비하여 구워 먹거나 끓여 먹는 음식이 시절 음식이 되었다.

고사떡

상달에는 집집마다 시루떡을 쪄서 고사를 지냈는데, 각 집마다 여러 개의 시루를 가지고 있어 각기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가장 큰 시루는 성주상에 올리는 떡시루, 중간 시루는 터줏대감에게 올리는 떡시루, 가장 작은 시루는 기타 용도의 백설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시루였다. 예전에 제법 격식을 차렸던 가정의 장독대에는 계란만 한 크기의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가 여러 개 엎어져 있었다. 떡을 찔 때에는 이 구멍에 모기장처럼 가는 체를 얹었으며, 작은 구멍에는 솔잎이나 짚을 놓기도 하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떡은 아주 훌륭한 먹을거리가 되었다. 또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찰떡, 메떡, 수수떡이 있고, 거기에 콩이나 호박오가리, 무, 곶감, 대추 등을 섞어 그 종류도 다양하였다. 고사떡에는 으레 팥이 들어가는데, 이는 팥이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효능이 있다고 믿었던 동지팥죽과 같은 이치다. 그중에서도 호박고지떡은 가장 흔하게 먹었던 떡 중의 하나였다.

전골냄비

일명 난로회(暖爐會)라고도 하는 전골은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시절 음식(時節時食)이다. 화로(火爐)에 숯불을 피운 후 요즘의 프라이팬에 해당하는 전철(煎鐵)을 올려놓고, 간장과 후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설탕, 파, 마늘 등의 양념으로 재워둔 쇠고기와 생선, 송이 등을 얇게 썰어 넣는다. 그리고 미나리, 숙주, 무채 등을 썰어서 살짝 데친 후 전철에 같이 넣고 지지다가 계란을 풀어 만드는 것이다.

이 전골냄비는 따뜻한 불가에 둘러앉아 여러 사람이 같이 먹는 음식이라 하여 난로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리하는 동안 불을 꺼트리지 않음으로써 10월의 차가운 기운을 막아주는 어한 음식(禦寒飮食)으로 적합하였다. 또는 입을 즐겁게 한다는 뜻으로 열구자신선로(悅口子神仙爐)라고도 한다.

『세시잡기(歲時雜記)』에 ‘서울 사람들은 10월 초하룻날에 술을 준비해놓고 저민 고깃점을 화로에 구우면서 둘러 앉아 마시며 먹는데 이것을 난로(煖爐)라 한다.’고 하였다. 맹원로가 지은 북송(北宋)의 생활풍속기『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도 ‘10월 초하루에 유사(有司)들이 난로회를 갖는다.’고 하였다.

신선로(神仙爐)

신선로는 요즘에도 자주 등장하는 세련된 요리로, 신선(神仙)들이 사용하였던 화로(火爐) 음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불이 있는 화로 위에 전골틀을 오려 놓은 후,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무와 오이, 마늘, 파, 계란 등을 넣어 장국으로 끓이는 것이다. 이 장탕(醬湯)은 맛도 좋지만 보기에도 좋아 여러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음식이라 하여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도 부른다.

연포탕(軟泡湯)

두부를 잘게 썰어서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부치는 음식이며, 닭고기에 섞어 국으로 끓인 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 한다. 여기에서 거품이라는 듯의 포(泡)는 두부를 의미하며, 이는 서민(庶民)들의 기본 영양식으로 각광받는 음식이다.

강정

강정은 시월부터 겨울에 만들어 먹는 시절 음식에 속한다.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오색강정, 잣강정, 매화강정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특히 홍색과 백색의 강정은 제철 과실이 없는 설날과 봄철 민가(民家)의 제수(祭需) 음식으로 여겨왔다. 정초(正初)의 세찬(歲饌)으로 손님을 접대할 때에도 많이 사용된 음식이다.

강정은 찹쌀가루를 물과 술로 반죽하여 둥글거나 모나게 만든 후,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그다음에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기면 속은 비었으나 형태는 마치 누에고치처럼 부풀어 오르게 된다. 이 한과에 볶은 흰 참깨나 들깨, 흰 콩가루, 파란 콩가루 등을 엿에 버무려 붙이면 맛있는 강정으로 태어난다.

만두(饅頭)와 만둣국

메밀가루나 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두를 만드는 데, 소(巢)는 채소, 파,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두부 등을 다져 넣는다. 또는 이 만두를 넣고 장국을 끓이면 만둣국이 된다.

만두는 중국의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제갈공명이 위(魏)의 맹획(孟獲)을 공격할 때 신(神)에게 제사를 지냈던 음식에서 유래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만(南蠻)의 오랑캐들은 사람을 죽인 후 그 머리를 제물(祭物)로 삼는 제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신(神)이 비밀의 병사 즉 음병(陰兵)을 보내 준다고 믿었다. 이 내용에 따라 공명에게도 이런 제안(提案)을 하였지만, 공명은 사람고기 대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소(巢)를 만들고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 모양만을 흉내 내어 제사를 지냈다. 이후로 남만(南蠻)의 머리를 의미하는 만두(灣頭)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만두는 소쿠리에 넣어 쪘다고 하여 농병(籠餠) 혹은 증기로 쪄냈다고 하여 증병(蒸餠)이라고도 한다.

그 후 밀가루를 원료로 하여 세모 모양을 한 만두가 생겨났는데, 변씨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여 변씨만두(卞氏饅頭)라고 부른다.

김장하기

옛말에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 수확(收穫)하여 겨울에 저장(貯藏)한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에서 이에 해당하는 내용은 김장김치와 땔감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메주나 곶감, 무시래기, 호박고지, 장류(醬類) 등도 해당하겠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김장김치만은 못하다.

지금처럼 사시사철 필요한 채소를 얻을 수 없었던 시절에 오래 보관하는 방법으로서의 김장김치는 요구르트 혹은 치즈 등과 함께 현대과학으로도 입증되는 으뜸 발효식품(醱酵食品)으로, 자랑스러운 전통 음식(傳統飮食)에 속한다. 요즘은 일부 국가에서 김치에 대한 전문 연구가 이루어질 정도로 현대인의 웰빙식품이라고 알려졌다.

기타

이 밖에도 무오병, 감국전, 만둣국, 열구자탕, 연포탕, 강정, 시루떡, 무시루떡, 생실과, 유자화채, 백설기, 물호박떡, 연한겨울쑥으로 끓이는 애탕, 애단자, 밀단고 등 아주 많은 음식들이 존재한다.

24.7 상달과 현실

시월상달이 되면 이제 1년이 저물어가는 시기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각자의 처지에 맞게 겨우살이 준비를 한다. 당시의 초가집들은 농사일이 끝났어도 김장과 함께 이엉잇기를 해야만 모든 일이 끝을 맺게 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이엉엮기는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지만 용마름은 부피도 클 뿐더러 무게도 상당하여 힘에 버거운 노동에 속했다. 또 용마름은 지붕의 중앙에 있어 요즘말로는 분수령이 되며, 내리는 빗물을 갈라주는 역할을 하니 아주 숙련된 기술자가 엮어야 비가 새지 않았다. 이런 초가지붕은 방풍과 방한을 잘해주는 아늑한 집이었다. 그러나 매년 이엉을 갈아주어야 하는 것이나, 화재에 취약하다는 단점도 있어 매우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요즘도 가끔씩 무슨 일을 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다. 이 고사는 10월 상달의 고사에서 유래하였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상달고사는 감사와 기원을 동시에 가졌으니 아주 겸손하고 보기 좋은 풍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섬기지 않는 신(神)에 대한 경배(敬拜)에 해당하여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하와 기원을 동시에 행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헛제사밥을 나누어 먹는 것처럼 감사와 배려를 아는 좋은 풍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제사나 고사를 지내면서 ‘유세차, 00년, 00월, 00일에…’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유세차는 세차(歲次) 즉 60갑자(甲子) 중 어느 해라는 관용구(慣用句)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정확히 꼬집어 말해야 하므로 2012년이라고 하든지 혹은 단기 4345년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 00월은 그 달을 의미하며 60갑자에 의한 월력을 지칭해도 좋으며 00일도 마찬가지다. 이를 합하면 ‘유세차(維歲次) 2012 임진년(壬辰年) 12월 24일…’ 이라고 쓰면 된다. 여기서의 유세차는 이제 축문이 시작된다는 암시에 속하므로 모두들 긴장하라는 의미에서는 그냥 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러나 옛 어른들의 요구가 있으면 위의 양력을 음력으로 환산하여 ‘유세차 2012 임진년(壬辰年) 갑자월(甲子月) 기미일(己未日)…’ 로 고쳐 쓰면 된다. 이때 임진년은 60년마다 돌아오는 여러 해 중 하나이므로 앞에 2012년이라는 단어를 붙여주어야 확실한 연도가 되고, 갑자월은 음력으로 2012년 11월의 월진(月辰)이며, 기미일은 음력으로 2012년 11월 13일의 일진(日辰)이다. 한글로 쓸 것인지 한자로 쓸 것인지는 그때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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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국 행사 사진 500여장을 첨부하여 '선조들의 삶, 세시풍속이야기'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