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시죠!
왼손바닥이 부르르 떨려왔다. 깜짝 놀라 손을 펴보니 핸드폰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마치 여름날 평상 위에서, 머리 비틀려진 풍뎅이가 뒤집어진 채로 날개 짓을 하는 듯 요란하였다. 어쩌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 줄때까지 그렇게 돌고 또 돌았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에 마음이 내키지 않아 선뜻 손이 가지 않은 때문이었다. 아직도 낯선 전화번호를 보면서 나를 밝히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음은, 세상을 닫고 높은 담을 쌓는 것 같아 쑥스럽기마저 하다.
“여보세요?”
“000 선생님 되시죠? 축하합니다.”
“그런데요?”
“저는 한국 00신문에 근무하는 000 인데요. 이번에 새로 책을 내신 것 축하드리고요. ...”
요즘에 책 한두 권 내는 것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으니, 생각 같아서는 누구한테서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라 하더라도 결국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 불우 청소년들에게 신문 보내는 사업을 릴레이식으로 펼치고... 혹시 선생님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보내신다면 ...”
요즘같이 각박한 환경에서도 소외된 학생들에게 보내 준다는 데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배움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작은 정성이나마 도움을 준다는 데 양심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다니던 학교에 보내줘도 된다는 말을 듣고서는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를 회상하니 ‘소년신문이 그렇게 보고 싶었었는데’ 하는 추억이 떠올랐다. 어쩌다 얻어 읽은 신문에 실린 동시나 산문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글을 싣고 싶은데... 하는 생각을 수 도 없이 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많은 금액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후배들을 지원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켠에서는 꼭 그렇게 하여야만 선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면소재지의 시골학교였다. 그런대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특산물이 있어 형편이 나은 편이었고, 23번 국도와 호남선 철로가 지척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였다. 덕분에 학생 수도 2,400명에 달해 각 교실을 채우고 넘쳐났었다. 그러던 중 많은 이견 속에 분교를 만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만 골라서 보낸다느니, 자주 결석하고 말 안 듣는 아이들만 보낸다느니 하는 소문이 무성하였지만, 순전히 지역별 구분에 의한 분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때의 아이들이 학부모가 되었을 때는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 있었고, 그 많던 건물들도 대부분 헐어 내게 되었다. 그럴 즈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장학금을 모아 전달하고 있었다. 학교가 사라질까봐 걱정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먹고 살만하니 도움을 줄만 해서가 아니라,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별도의 기금을 모으는 것은 아니었으며, 주어진 범위에서 비용을 절약하고 남은 금액을 전달하는 글자 그대로 마음의 표시였었다.
그런 내게 후배들을 위해 ‘소년신문’을 후원하라는 제안은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초면에 이런 일로 부탁받은 것도 부지기수이며, 그때마다 그러마고 한 것들이 벌써 여러 차례였다. 한편 그들의 진정한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그냥 상업적으로만 치부한 것에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나의 후배를 위하는 심정보다는 자신의 신문을 판매하기 위한 심정이었음을 지우고 싶지 않다.
이를 계기로 고향사랑 후배사랑으로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먼저 주춤해진 장학금 전달식을 챙겨야 할까보다. 아니면 당시 은사님을 찾아뵙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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