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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김치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0:59

일그러진 김치

올 겨울에 장만하는 김장김치가 도착하였다. 마침 토요일이라서 별다른 준비 없이 택배를 받을 수 있었다. 일반 택배 같았으면 언제쯤 방문한다고 상의해오면 시간에 맞추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보내는 사람으로부터 사전연락이 있었던 덕에 그런 불편함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이웃들은 여러 가지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김장 김치는 플라스틱 통이나 양동이처럼 튼튼한 그릇에 담아서 고이 모셔가는 것이 원칙인데, 우리처럼 비닐에 담은 후 종이상자에 포장하여 보내면 맛이 없다고들 하였다. 아무리 튼튼한 비닐로 쌌다한들 비닐이고, 제 아무리 튼튼한 상자로 여맸다한들 종이상자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오며 가며 나르는 동안에 포기 사이에 들어간 양념이 흐트러지고 배추통이 일그러져서 김치 맛이 달아난다고 하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한다더니 듣고 보니 그럴듯도 한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그러진 김치를 고맙게 받았다. 비록 눌리고 찌그러진 배추통이라 하여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내가 집에서 직접 담그는 김치도 통에 넣을 때는 정작 꾹꾹 눌러서 담지 않았던가. 폼나게 버무려 넣는 김치보다 행여나 공기가 들어가면 제 맛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 빼곡히 담는 것이 김장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있어 김장 김치는 겨울에 담아 다음해 여름까지 먹는 요긴한 음식이다. 어쩌면 부식이라기보다 주식이라 하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일모작 한해살이 식물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는 생산주기를 고려한 저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수분이 많은 채소나 생선의 경우에는 수많은 연구와 실패 끝에 그에 부합되는 대가를 치른 후 찾아낸 방법일 것이다. 한 번의 수고로 일 년 동안을 먹는 김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식량으로서 약용으로서 그 효용성만큼이나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넓은 밭에서 배추를 뽑는 것부터 시작하여 나르고 손질한 후 소금물에 절이는 것과, 적당히 순을 죽이는 것은 오랜 경험에 의한 기술의 영역이다. 또한 부재료로 들어가는 마늘과 고추, 파와 젓갈 등 20여 가지는 것들은 미리 준비하여야하는 선행 공정이다. 거기다가 정성과 손맛은 우리 식탁을 독특하면서도 품위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집집마다 모두 다른 맛을 내는 것이 김장김치이고 보면 가히 예술에 가깝다.

이러한 김장 김치를 집에서 받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몸이 아파서 김장을 담그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추를 사고 양념도 사서 김장할 정도는 된다. 작년에는 김장하는 날에 찾아가서 버무리는 일만 하고 왔었는데, 올해는 완성된 김치를 앉아서 받게 되었다. 고맙게도 오고가는 수고를 덜라고 담아서까지 보내 온 것이었다. 하긴 올해 연료 값이 워낙 비싸니 비용을 감안하면 그럴만도 하였다. 거기다가 풍년이 든 배추는 밭에서 겨울을 나게 생겼고, 각종 양념류도 예년 같지 않았다. 어쩌면 사상 최악의 경제 사정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듯 했다.

택배가 도착한 날 이웃집에서 전화가 왔다. 마침 김장 때문에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자기네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생네 것도 해주기로 했다는데 걱정이 태산이란다. 벌써 며칠 전부터 손이 부르트도록 마늘을 깠고, 생강을 찧어놓았단다. 양파도 다듬고 파도 손질해 놓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정작 가장 무겁고 부피가 큰 배추 몇 십 포기를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말만 잘해도 배달이 가능했고, 값으로 따져도 양념보다 비싸지 않았다. 아직 준비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손에서 마늘 냄새가 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손가락이 아려서 어찌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하소연을 해댄다. 한참을 듣고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편하게 받은 김치를 두고 저렇게 고생했을 사람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때문이다.

찌그러진 김장김치는 맛이 없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갔다. 겉절이를 죽죽 찢어서 걸쳐 먹은 밥이 정말 맛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김장하는 날 동생들이 와서 직접 가져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하려고 동생네 것까지 해주느냐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나에게도 이렇게 김장을 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은공에 배신할 수는 없었다. 김장을 하는 것은 일년지 농사라 하는 데에 다른 변명도 달지 않았다. 일그러진 김치에는 설탕을 넣지 말라고 특별히 주문하였었다. 더불어 조미료도 넣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 김장김치는 작년 것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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