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으로 물려줄 우리 미래
얼마 전에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9만원 상당의 쇠고기를 훔친 주부가 있었다. 이 주부는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의 수입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매우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의 수입이 계속하여 줄어들고 있으며,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학비마련도 부족한 상황이라서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다 생긴 일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람도 자신보다 자식을 먼저 생각한 행동이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오늘 뉴스에서는 노모에게 쇠고기를 드리고 싶은 가장이 5만원 상당의 고기를 훔쳤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에는 산모가 아이에게 줄 분유를 훔친 일도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생계형 절도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새로 이름 지은 생계형 절도라는 것은, 자신보다도 자신과 연관된 주위의 사람들을 먼저 생각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살기위한 노력을 했지만 한결같이 여유가 없었고, 가족의 끼니를 고민하다가 그만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죄는 밉지만 상황은 이해가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빵 한 조각을 훔치고 감옥에 간 소설의 누구처럼 그 행위가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비교하여 그릇되게 계획된 절도가 있으니 가슴이 아프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살기위한 절대적인 상황이 아니라, 어느 특정인의 만족을 위하여 남을 이용하는 것이 그렇다. 이런 일은 자신이 행한 일로 그 상대방이 받을 고통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에 의하여 발생하는 자신의 고통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꼭 사람을 해치고 금전을 빼앗아 가는 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목숨을 노리고 계획을 짠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계획적으로 어느 특정인을 지적하거나 불특정인에게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하여 반대급부가 빚어져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언어는 어떠한가.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표현을 한다든지, 상대의 기를 꺾기 위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어거지를 쓴다면 이 또한 그릇된 행동일 것이다. 상대방의 공을 가로 채거나,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조건을 조작 한다면 이것도 문제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가 꼭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항상 공동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나라, 가장 친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색한 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선진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첫 번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마라는 것이라고 한다. 선진국들에서 맞는 새해의 가장 많은 덕담 또한 이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새해 덕담은 어떤가. ‘건강하여라.’ ‘부자 되어라.’ ‘공부 잘해라.’ 어디 그뿐인가. ‘일등 하거라’. ‘반드시 이기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고 말거라.’ ‘반드시 합격하거라.’ 어릴 때부터 이렇게 배운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나라를 경영하는 날, 우리나라는 타인과 경쟁하며 나만을 위한 행동이 판을 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기는 선의의 경쟁은 할수록 좋다고 하지만, 이 선의의 경쟁은 나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더불어 같이 잘되는 상생의 경쟁일 때 적용되는 말이다. 이런 경쟁을 하다가 잘못되어 내가 지게 되더라도 상대방이 이룩해 놓은 것으로 인하여, 나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상생의 경쟁에서는 나 혼자만 손해나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같이 손해 보는 경우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생의 경쟁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 혼자 이득을 보는 것에 목표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어느 경기에서 이런 문제를 낸 적이 있다. 상생의 이익을 위하는 문제를 맞히면 2점을 주고, 개인의 이익을 위하는 문제를 맞히면 1점을 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현실적인 일인가. 상생의 이익을 위하면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좋아지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하는 것보다 점수를 많이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 말로 평등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평등해지고 같이 좋아지려면 상생의 경쟁을 하여야 한다. 상생의 경쟁을 하려면, 어려서부터 나만을 위하는 것보다, 우리가 같이 잘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나면 우리나라는 결국 상생의 길을 가는 나라가 될 것이다. 상생의 길을 가는데 어찌 후퇴하는 불행한 국민이 될 것인가. 나와 내 자식들이 살아갈 나라가 헐벗고 굶주리며, 문화에 뒤진 후진국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우리 모두 생각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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