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공고
아버지께서 돌아 가셨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여자가 있었다. 먹을 게 궁하던 시절의 초상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고, 다들 분주하게 시끌벅적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야말로 잔치 그대로였다. 뿌연 막걸리는 동이 째 오가며, 연신 불을 때는 가마솥 안에 국수가 그득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공기 밥은 보기만 하여도 먹음직스러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상위에 차려져 있는 여러 가지 반찬들도 새롭고,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돼지고기며 떡들도 뭔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던 때도 있었다. 그때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다시 이런 말을 들었다. 이제는 철부지 어린 아이가 아닌 아주 연로하신 분이다. 당시의 나 어릴 적 소녀가 늙었으나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아 예전과 같은, 그때와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상대방의 태도로 보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대 놓고 물어보고 거들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요? 그러셨군요. 고생 많이 하셨지요?”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이지만, 그 길을 자랑스럽게 가는 방법은 아주 없는 것일까. 가시는 분도 행복하게, 보내는 사람도 즐겁게 보낼 수는 없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 쪽이 즐거우면 다른 쪽은 고통을 받는 것이 예사인 것 같다.
“이리와. 이리와 봐.”
“예? 왜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어!”
뭔가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면서 빠져나가는 듯한 홀가분한 느낌이다.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맷돌이 하나 치워진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내 기분이 이럴진대 아마도 저분의 마음은 더욱 더 편할 것이다. 속마음 깊은 곳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소용돌이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는 외면하고 나선다. 세상에 다시없는 불효자라고 자책하면서도 감당해내지 못하는 내 몸을 원망할 뿐이다.
그 분의 시아버지께서는 중풍으로 쓰러지신지 이미 오래였다. 거동을 전혀 못하시니 모든 것에서 남의 손발을 빌렸다. 다행이 살림은 풍족하여 입원환자 간호 도우미를 활용하였다. 그래도 며느리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께서 치매에 걸리신 것도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남들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으니 사람이 꼭 붙어 있어야 한다. 갈수록 그 도가 심해져 이제는 주야로 지켜야 되겠기에 시어머니를 위한 도우미도 두 사람이나 두었다. 이렇게 한 집안에 도우미가 세 사람이 있어도 며느리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철없던 여아든 철든 부인이든 가릴 것 없이 크게 소리쳐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신문에 공고라도 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속 있는 말을 다 할 수도 없었겠지만, 듣는 사람도 그 속마음이 뭐냐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미묘한 관계다.
나도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인데, 좀 더 편하게 가면서 남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걱정된다. 나를 보내고 나서 자랑하고 싶은 말을 맘껏 자랑해도 될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에서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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