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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서울 나들이

꿈꾸는 세상살이 2014. 12. 4. 21:22

문화재 서울 나들이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다. 작은 시골에 살다보니 서울에 가면 뭔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데, 시골출신이 서울 나들이를 하니 반갑기도 하였다. 대형버스를 빌려 타고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목적지에는 겨우 빠듯하게 도착하였다. 수요일인데도 차들이 많아 서울 가는 길은 역시 복잡하다는 인식을 확인시켜 주는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가 정차하기가 무섭게 짐을 챙겼다. 각자가 준비한 복장은 물론이며 단체를 알리는 깃발과, 북과 징 그리고 꽹과리 등 공연 도구도 빠트리지 말아야 할 주요 준비물이다. 게다가 사람 키보다도 더 큰 꿩은 여러 사람이 맞잡아 들어야 하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귀중품이다.

오늘은 우리 익산목발노래가 서울 노원구에서 열리는 민속공연장에 찬조출연을 하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 놀란 것은 아무리 서울이 크다고는 하지만 민속공연장마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수치로 계산하면 그저 그만그만이겠지만 한 무리의 공연패가 휘돌아도 남을 공간에, 초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하여 관람석을 가진 연습장이 있다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논에 벼를 심고 수확하며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22호 마들농요의 공연장이 그러했다. 내가 속해 있는 익산목발노래는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호인데, 변변한 전수관도 없이 그저 자체에서 임차한 사무실이 고작인 것에 비하면 서울은 가히 천국이라 할 수 있었다. 해마다 반복하여 열리는 마늘농요 공연 및 농촌체험 학습이었지만 국회의원이 직접 참석하였고, 단체장 역시 참석하여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학생들은 인솔교사의 이끌림에 따라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들 재미있어 하고 볼 것이 많은 시간이었음은 인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것이 바로 체험학습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른 봄 입춘에 논을 갈고 물을 대는 것은 못 보았겠지만, 그래도 논에서 자란 벼가 고개를 내밀고 벼메뚜기가 날아다니는 것은 먹을거리의 대명사인 쌀이 생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무형문화재‘마들농요’는 원래 소리를 하는 것이 문화재인데,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별도의 시골 체험학습을 떠나지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아 의미 있는 일이었다. 마들농요에 이어 체험학습으로는 홀태로 나락훑기, 도리깨질하기, 키질하기, 지개지기, 새끼꼬기, 두레질 등이 있었으며, 여름에는 애벌매기와 두벌매기 그리고 피사리가 포함되고, 가을에는 벼베기를 비롯하여 겨울의 눈썰매 미끄럼타기, 팽이치기, 연날리기, 제기차기도 등장한다.

서울 한 복판에서 1,200㎡의 전용면적을 가지고 상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가 선보이는‘익산목발노래’는 원래 노래가 주 내용이지만 옛 농부들이 졌던 지게를 지고 하는 율동이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고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고 자평하였다. 거기에 사람보다도 더 큰 꿩이 등장하는 것은 또 다른 웃음을 선사하였다. 원래 꿩이 농부들이 땀 흘려 지은 곡식을 몰려 훔쳐 먹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그런 내용일 뿐이며 하나의 소품으로도 충분한 놀이가 되었다. 익산목발노래는 이처럼 농부와 농사 그리고 등짐에 얽힌 애환을 지게 목발로 풀어내는 노래와 율동으로 이루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같은 시도무형문화재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까 하는 생각이었다. 지방자치가 차지하는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으면 재정자립도가 높아서 그런가보다는 위안은 해본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멈추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문화는 한 나라 혹은 어느 지방의 오랜 관습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습을 무시하거나 홀대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며, 미래에 대한 거부라는 생각을 해본다. 미래의 후손들이 선조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뿌리를 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부모를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문화재 공연에 국회의원이나 시장이 참석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다른 문화재 공연에서라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행정가는 물론 일반 시민에게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항상 뒤로 밀리는 것이 문화이다. 그것은 문화를 하는 곳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지만 상대적으로 표가 없는 것 때문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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