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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꿈꾸는 세상살이 2015. 2. 19. 12:25

 

서당 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

한재훈/ 갈라파고스/ 2014.03.12/ 224쪽

저자

한재훈 : 서울 태생으로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를 받은 후 시골의 서당으로 한학을 배우러 갔다. 15년 동안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서 현대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대학에 진학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한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하였고, 현재는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고려대와 성공회대 등에도 강의하고 있다. 저서에『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공저)』,『조선서원을 움직인 사람들(공저)』가 있다.

줄거리 및 감상

저자가 시골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서울로 돌아와 대학에 진학한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잘한 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말하지 않고 있다. 나름대로 둘 다 좋은 것이라는 대변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일반 학교의 공부보다는 서당 공부가 더 좋았다는 것으로 귀결 지을 수 있다.

서당 공부 15년 후 대학 진학을 위하여 5년을 소비하였지만, 그때 공부가 부진한 이유보다는 시골 생활에 젖어 있던 몸이 도시의 공해에 견디지 못하고 아파서 실패하였던 것을 풀이된다. 말하자면 서당 공부에 대한 후회가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일반 과목에 대한 진도를 따라가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인문학은 그런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임으로 어느 기간만 투자하면 바로 따라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저자가 그런 경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가 살다보면 투자에 대한 효과를 따지게 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효용성이다. 혹은 현실성 아니면 유용성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잃는 하나의 물리적 손실보다 더 큰 이익 즉 인간의 근본 도리나 인간이 추구해야 할 행복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게 수치적으로만 풀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배움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자가 말하길, 애례존양(愛禮存洋)이라 하였다.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별 효과가 없다고 하여 아까운 양을 잡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말이다. 즉 양을 잡는 것은 물질적인 아까움이 따를지 몰라도 그 이면에 담긴 제사의 예절은 양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커다란 이유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허례허식이라는 이유로 물질을 아깝게 생각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으나, 허례허식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만든 원인을 따져보면 진정한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굳이 양을 잡는 것만 계산하여 아깝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다. 공자다운 말이다.

배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배우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효과가 없다고 하여 지불하는 돈만 아깝다고 말하면 안 된다. 투자한 만큼 공부를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므로, 돈 주고 공부해도 별 볼일 없으니 아예 돈 주고 배우는 것 모두가 잘못 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서당에서의 공부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는 것부터 시작하여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두가 공부의 연속이다. 한자 하나를 더 외우고 못 외우고는 둘째 문제이며, 학동들과 혹은 훈장님과의 관계 모두가 연속된 공부에 속한다. 그래서 단지 글자 하나를 더 깨우치고 한시 하나를 더 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는 방식부터 시작하여 다시 반복하고 그로 인하여 더 많은 것을 읽힐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도제자로 들어가면 먹을 가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먹을 갈면서 글자 쓰는 것을 지켜보고, 어떤 자세로 어떤 준비를 한 후에 쓰는 지를 배우게 된다. 비록 붓을 들고 글자를 쓰지는 않더라도 그런 과정을 지켜본 후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글자를 배우게 되면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당 공부의 기본 방향이다. 책을 필사하고 책을 매면서 책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수련 과정이다.

우리가 서점에서 돈을 주고 바로 사서 보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서도 서당 공부가 바로 인문학의 길이라 하였다.

인문학이란 수학 공식 하나 혹은 과학 상식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더불어 사는 의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의 참 모습을 알고 사람다운 도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을 표현하는 학문이며, 일상에 나타나는 사람의 삶인 것이다.

비록 글자 네 개로 된 사자성어일지라도 그 속에 바로 우주의 원리가 담겨있고, 인생의 삶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읽고 또 읽어 몸에 배도록 유도하는 것이 서당공부다. 그러면 일상생활 중에서 자신도 모르게 바로 접목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필자도 그래서 서당 공부가 바로 인문학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퇴계 이황은 죽기 사흘 전에 제자들과 동료를 모아놓고 유언을 하였다. 지금까지 부족한 자기가 강론한 것에 대하여 미안하다고 한 것이다. 당대 국내 최고의 학자인 퇴계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학자에 속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 교통과 학문의 체계로 보아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한학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퇴계가 굳이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부족한 자신이 강론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정수가 아닐까 한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학문이다. 그래서 한 시도 같을 수가 없으며, 날로 변하는 학문의 발전에 따라 어제 내가 강론한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증명한 학자가 바로 퇴계라 여겨진다. 그것은 퇴계 자신이 생각해도 매일 매일 새롭게 해석되는 학문에 대하여 딱 정해진 고정 불변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당대 최고라는 자리를 물려주면서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 하는 것은 학자의 길이요 인문학의 시초라고 역설하였는지도 모른다.

서당에서 여러 학파가 나왔다. 그것이 발전하여 조선 시대의 당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좋은 측면에서는 서로 경쟁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여 더욱 발전된 학파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렇듯 좋게 경쟁을 하면 더욱 발전할 것이요 흠집을 잡고자 노력하면 같이 퇴보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다. 그러나 서당이든 학교든 올바른 인문학의 길에 서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래 인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사람을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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