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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꿈꾸는 세상살이 2015. 8. 26. 20:46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 한겨레신문사/ 1999.07.09/ 319쪽

홍세화 : 1947년 서울 태생, 서울대학교에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가 다음해에 그만 두고 2년 뒤에 외교학과에 재입학하였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으로 제적되고 1977년에 졸업하였으며, 소위‘민주투위’,‘남민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79년 3월에 무역회사의 유럽출장을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였으며, 파리에 정착하고 말았다.『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해졌으며, 예민한 감수성과 문제의식으로 우리 사회를 향한 비판적 글쓰기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다.

학교 후배이며 미술평론가인 유홍준은 이 책을 통하여 파리에서 체득한 프랑스 문화와 한국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혹은 그렇기에 프랑스인들은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 하고 알려준다고 했다.

우선 프랑스는 넓은 영토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랑스를 아주 강력한 나라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군사력이 강하고 문화의 수준이 높으며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높다고 믿는다. 게다가 축구도 잘 한다고 믿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나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서양 혹은 유럽에 대한 동경심일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 우리에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선진국으로 알려졌던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가 우리에게 어떻게 하여 선진국으로 각인되어 있을까. 아마도 신미양요에서부터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당시 중무장한 프랑스는 아주 신식 나라였다. 물론 그 전부터 유럽을 지배한 나라였으니까 믿어 의심할 여지조자 없다.

이런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하여 마치 일본이 한국을 비하하듯 하는 발언을 즐겨한다.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하여 자극한다. 그러나 그 말은 알제리를 격하시키는 목적이 아니라 위트와 유머에 가까운 구절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프랑스의 문화 수준일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한국 사람들이 유행의 본산지인 파리에 그리고 디자인의 근본인 파리에 많이 모이는 것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알아본 결과 파리는 유행의 도시가 아니라 다만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일 뿐이다. 정작 파리 시민들은 유행에 둔감하고 오히려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유행을 몰라서가 아니라 남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주 강한 개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어울리는 조화는 바로 유행의 첨단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프랑스는 똘레랑스 즉 관용이라고 했다. 남이 하는 것을 잘 이해해주고 반면에 내가 하는 것은 개성적인 행동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남의 사생활은 금기이며 사회적 문제의식 혹은 공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띤 토론으로 끝장을 보는 문화이다. 그럼으로 한국과 같은 개인주의 그리고 입시 위주의 암기 교육과는 전혀 딴판으로 다가온다. 아주 심각한 예로는 대통령의 사생아에 대하여 전 국민이 무관심하다는 것이며, 결혼 전에 동거를 하거나 동성애를 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시비를 걸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좌파이면서 우파를 지지하기도 하고 우파이면서 좌파의 모임에 참석하여 동행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이유는 당시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 후보가 좌파이면서 우파로 혹은 우파이면서 좌파로 전향하여 연설을 하고 당선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좌파와 우파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혹은 국가를 전복할 극진과 국가를 수호하는 보수의 차이가 아니다. 다만 귀족출신 부호들과 혹은 시민단체 세력 간의 차이일 뿐이다. 좀 더 정확이 구분한다면 단순한 보수와 진보의 견해 차이에 지나지 않음에도 우리에게는 이념의 구호로 잘못 전달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홍세화는 진보의 경험을 한 사람답게 글을 잘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남들도 다 쓰는 에세이를 쓰면서 이렇게 쓰니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보수적인 사람이 글을 쓴다면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역사가 성공한 자의 입장에서 즉 실패한 나라의 역사는 항상 어딘지 잘못 하여 패망한 것처럼만 쓰여 진다는 것이다. 홍세화는 진보를 하여 이기는 자의 편에 서고 싶었지만 보수에 세력이 굴복하고 망명을 한 사람이기에 글을 진보적으로 썼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보적이라는 말은 사회를 비판한다는 말이지 현 체제를 부정하고 전복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찬양이나 동참은 퇴보를 가져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인정한다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비평하고 비판하면서 더욱 발전하기 때문에 건전한 비평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다.